18부
담(膽)이 허하면 잘 놀라고 무서움을 탄다. 담을 따뜻하게 하면 놀람이 가라앉는다. — 《동의보감》 내경편
1
정우빈은 자기가 곧 죽을 거라고 생각했다.
정확히 말하면 매번 다른 이유로 죽을 거라고 생각했다. 삼월에는 췌장암이었다. 사월에는 대동맥 박리였다. 오월에는 루게릭병이었고 유월에는 다시 췌장암으로 돌아왔다. 칠월에는 뇌동맥류였다.
지금은 팔월이었다.
팔월의 병명은 심근염이었다.
정우빈은 서른아홉이었다. 대구에서 보험설계사를 했다. 십일 년째였다. 잘하는 편이었다. 매년 시상식에 갔고 지점에서 상위권이었다. 정우빈이 잘하는 이유는 명확했다. 남들이 대충 넘기는 걸 정우빈은 안 넘겼다.
"고객님 지금 나이에 이 담보 빼시면 나중에 후회하십니다. 사십 대 남성 급성심근경색 발생률이 어떻게 되는지 아세요?"
정우빈은 그 숫자들을 다 외웠다. 나이별 암 발생률. 뇌혈관질환 발생률. 사망 원인 순위. 평균 진단 연령. 오 년 생존율.
십일 년 동안 그 숫자를 외우면서 팔았다.
그 숫자들이 언제부터 자기 얘기로 들렸는지는 정확히 모른다. 아마 서른다섯 넘어서부터였을 것이다. 사십 대 남성 급성심근경색 발생률을 설명하다가 문득 자기가 곧 사십 대라는 걸 알았다. 그날 밤에 처음으로 가슴이 조였다.
응급실에 갔다.
심전도를 찍었다. 피검사를 했다. 정상이었다. 공황발작 같다고 했다.
그게 사 년 전이었다.
그 뒤로 정우빈은 병원을 다녔다. 세 군데 대학병원에 진료기록이 있었다. 위내시경을 일 년에 두 번 했다. 대장내시경도 했다. 심장 CT를 찍었다. 뇌 MRI를 찍었다. 갑상선 초음파도 했다. 다 정상이었다.
정상이라는 말이 정우빈을 안심시킨 건 딱 사흘이었다.
사흘 지나면 다시 시작됐다. 검사가 놓친 게 있을 수 있다. 조영제 없이 찍어서 안 보였을 수 있다. 초기라 안 나왔을 수 있다.
칠월에 한 대학병원 순환기내과 교수가 정우빈한테 이렇게 말했다.
"정우빈 씨 심장은 제가 본 서른아홉 중에 상위권입니다."
"그런데 왜 가슴이 아플까요."
"심장이 아니라서 그렇습니다."
"그럼 뭔데요."
교수가 잠깐 정우빈을 봤다.
"정신건강의학과 한번 가보시겠어요?"
정우빈은 그 말을 듣고 그 병원을 안 갔다.
한의원 얘기를 꺼낸 건 지점 후배였다. 아무 데도 안 아픈데 계속 아프다고 하는 선배한테 후배가 반쯤 농담으로 말했다.
"형 그럼 한의원 가보세요. 약령시에 이상한 데 있대요."
"이상한 데?"
"원장이 좀 유별나다는데 잘 본대요."
정우빈은 그날 저녁에 검색했다. 심의당이 나왔다. 리뷰가 몇 개 있었다. 다 애매했다.
다음 날 갔다.
2
약령시 골목은 한약 냄새가 났다.
정우빈은 골목으로 들어서면서 마스크를 썼다. 여름인데 마스크를 썼다. 한약재 가루가 호흡기에 안 좋을 것 같았다. 근거는 없었는데 그냥 그럴 것 같았다.
골목 입구에 차가 서 있었다.
정우빈이 멈췄다.
포르쉐 카이엔이었다. 정우빈은 차 보험도 팔았기 때문에 저 차의 보험료를 대충 알았다. 그리고 저 차가 이 골목에 서 있는 게 말이 안 된다는 것도 알았다.
정우빈이 마스크 위로 그 차를 한참 봤다.
계단을 올랐다. 나무 계단이었다. 삐걱 끼익. 정우빈은 계단이 낡은 걸 보고 순간적으로 계산했다. 이런 계단은 낙상 사고가 많다. 낙상은 사십 대 이후 사망 원인에서 무시 못 할 비중이다.
정우빈이 난간을 잡고 올라갔다.
대기실에 젊은 여자가 있었다. 폰을 보고 있었다.
"진료 받으러 왔는데요."
"들어가시면 돼요."
정우빈이 가방을 열었다. 파일을 꺼냈다. 두꺼운 클리어파일이었다.
"이거 제 진료기록인데요. 원장님 보여드려야 해서요."
여자가 그 파일을 봤다.
"들어가서 보여드리면 돼요."
"복사해드릴까요?"
"아니요."
정우빈이 파일을 들고 진찰실 문을 열었다.
3
한의사가 진찰 의자에 앉아 있었다.
손에 옥수수를 들고 있었다. 찐 옥수수였다. 알을 하나씩 뜯어 먹고 있었다.
정우빈이 그걸 봤다.
"어서 오이소. 앉으이소."
정우빈이 앉았다. 파일을 테이블에 올렸다.
"이거 제 진료기록입니다."
한의사가 옥수수를 내려놓고 파일을 봤다. 넘겼다. 한 장 두 장 넘기다가 좀 빠르게 넘겼다.
"검사 많이 하셨네예."
"네."
"위내시경이 사 년 동안 여섯 번이네예."
"일 년에 두 번씩 했습니다. 두 번 한 해도 있고요."
"대장내시경도 두 번이고."
"네."
"심장 CT랑 뇌 MRI도 있고."
"네."
한의사가 파일을 덮었다.
"다 정상이네예."
"그게 문제입니다."
한의사가 고개를 들었다.
"정상인 게 문제입니꺼."
"정상인데 제가 아프니까요."
정우빈이 말했다.
"검사가 다 정상인데 저는 계속 아파요. 그러면 검사가 못 잡는 게 있다는 거잖아요."
"아니면 검사가 맞는 걸 수도 있지예."
"그러면 제가 왜 아파요."
한의사가 잠깐 정우빈을 봤다.
"어디가 아픕니꺼."
"가슴이요. 왼쪽이요. 조이는 것 같고요. 그리고 가끔 심장이 빨리 뛰어요. 계단 오를 때 숨도 차고요."
"언제부터예."
"사 년 됐는데 요즘 심해졌어요."
"뭐 하시는데예."
"보험 합니다. 설계사요."
한의사가 그 말을 듣고 잠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몇 년 하셨습니꺼."
"십일 년이요."
4
"약침 한 방 맞아보이소."
정우빈이 자세를 바꿔 앉았다.
"약침이 뭔데요."
"한약 성분을 경혈에 주사하는 겁니더."
"부작용은요."
"드물게 알레르기 반응이 있습니더."
"확률이 몇 퍼센트인데요."
한의사가 정우빈을 봤다.
"정확한 수치는 모릅니더."
"모르시면 어떡해요."
"드물다는 건 압니더."
"드물다는 게 몇 퍼센트인지가 중요하죠. 0.1퍼센트랑 0.001퍼센트는 다르잖아요."
한의사가 잠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면 안 맞으셔도 됩니더."
정우빈이 좀 당황했다.
"안 맞아도 돼요?"
"싫다는데예."
"그럼 치료를 어떻게 해요."
"약만 드셔도 됩니더."
"약은 부작용 없어요?"
"있습니더."
"뭔데요."
"사람마다 다른데 속이 불편할 수 있고 설사할 수 있고 두드러기 날 수 있습니더."
정우빈이 그 말을 들었다.
"솔직하시네요."
"물어보시니까예."
정우빈이 잠깐 생각했다.
"약침 맞을게요."
"괜찮으시겠습니꺼."
"네."
"확률 안 궁금하십니꺼."
"모른다면서요."
"모릅니더."
"그럼 됐어요."
정우빈이 소매를 걷었다. 한의사가 그 모습을 잠깐 봤다.
5
맥을 짚고 혀를 보고 나서였다.
한의사가 정우빈의 가슴 아래쪽을 눌렀다. 정우빈이 "아" 했다.
"여기 아픕니꺼."
"네."
"명치 근처라예."
"심장 쪽 아닌가요."
"심장은 더 위입니더."
한의사가 손을 뗐다.
"심담허겁(心膽虛怯)이라예."
"그게 뭔데요."
"심장이랑 담이 약해서 겁이 많아진 상태라예."
정우빈이 좀 표정이 굳었다.
"제가 겁이 많다는 거예요?"
"그렇게 됐다는 겁니더."
"저 원래 안 그랬어요. 저 회사에서 실적 상위권이에요. 고객 앞에서 발표도 하고 클레임도 처리하고 다 해요."
"압니더."
"근데 왜 겁이 많다고 하세요."
한의사가 잠깐 정우빈을 봤다.
"담(膽)이 뭐 하는 덴지 압니꺼."
"쓸개요."
"한의학에서 담은 결단을 담당합니더. 그리고 겁을 담당합니더."
한의사가 말했다.
"담이 튼튼하면 결단이 빠르고 잘 안 놀랍니더. 담이 약해지면 결단이 느려지고 잘 놀랍니더. 담대하다 담이 크다 이런 말이 그기서 나온 겁니더."
정우빈이 그 말을 들었다.
"저는 결단 빠른데요."
"일에서는예."
정우빈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검사 결과가 정상으로 나왔을 때 그거를 믿는 게 결단이라예."
한의사가 말했다.
"정우빈 씨는 그 결단을 못 하십니더. 여섯 번 위내시경이 다 정상인데 일곱 번째를 생각하시지예."
정우빈이 손을 만졌다.
"그건 조심하는 거예요."
"조심은 한 번 하면 조심이고 일곱 번 하면 다른 겁니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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