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부
사람이 누우면 피가 간으로 돌아간다. 간은 피를 저장하고 피는 혼(魂)을 담는다. — 《황제내경》 소문편
1
박나리가 약침 트레이를 떨어뜨린 건 칠월 셋째 주 화요일이었다.
진찰실에서였다. 환자가 엎드려 있었고 김원효가 등 쪽 경혈을 짚고 있었다. 박나리가 트레이를 들고 옆에 서 있었다. 김원효가 손을 내밀었다. 박나리가 주사기를 집으려는데 트레이가 기울었다.
바닥에 떨어졌다.
소리가 났다. 스테인리스 트레이가 나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였다. 환자가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죄송합니다."
박나리가 바로 주저앉아서 주웠다. 주사기는 포장이 안 뜯긴 채였다. 그래도 떨어진 건 못 쓴다. 박나리가 다 챙겨서 나갔다. 새 트레이를 준비해서 다시 들어왔다.
김원효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환자가 가고 나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박나리는 그게 편했다. 삼 년 동안 그랬다. 실수해도 뭐라고 안 했다. 잘해도 뭐라고 안 했다.
박나리는 자리에 앉아서 손을 봤다.
왼손이었다. 트레이를 왼손으로 들고 있었다. 박나리가 왼손을 폈다가 쥐었다. 펴고 쥐는 건 됐다. 힘도 들어갔다.
그냥 미끄러진 것 같았다.
박나리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2
두 번째는 금요일이었다.
컵이었다. 쌍화탕을 종이컵에 따라서 환자한테 가져가는 길이었다. 대기실에서 진찰실 앞까지 다섯 걸음이었다. 세 걸음째에 컵이 기울었다.
박나리가 다른 손으로 잡았다. 다 쏟지는 않았다. 절반쯤 흘렀다. 손등이 뜨거웠다.
"어 괜찮아요?"
환자가 물었다. 나이 든 여자였다.
"네 괜찮아요."
박나리가 휴지로 닦았다. 손등이 빨개졌다. 데인 건 아니었다. 뜨겁긴 했는데 데일 정도는 아니었다.
박나리가 새로 따라서 가져다줬다. 이번엔 두 손으로 들었다.
진찰실 문이 열렸다.
김원효가 나왔다. 대기실을 봤다. 바닥에 흘린 자국이 아직 있었다.
"뭐 쏟았나."
"쌍화탕이요. 다 닦았어요."
"어."
김원효가 진찰실로 들어갔다.
박나리는 그날 퇴근할 때까지 왼손을 신경 쓰면서 일했다. 신경 쓰니까 더 이상했다. 뭘 집을 때마다 잘 집히나 보게 됐다.
3
세 번째는 그다음 주 월요일이었다.
이번엔 아무것도 안 떨어뜨렸다. 대신 접수 카드에 글씨를 쓰는데 글씨가 이상했다. 박나리가 자기 글씨를 봤다. 삐뚤었다. 원래 글씨가 예쁜 편은 아니었는데 이건 다른 종류로 이상했다. 획이 떨렸다.
박나리가 볼펜을 다시 쥐었다. 힘을 줬다. 글씨를 다시 썼다.
또 떨렸다.
박나리가 손을 무릎에 내려놓았다. 잠깐 가만히 있었다.
그때 진찰실 문이 열렸다.
김원효가 나왔다. 박나리를 봤다.
"나리야."
"네."
"손 좀 줘봐라."
박나리가 김원효를 봤다.
"왜요."
"줘봐라."
박나리가 손을 안 내밀었다.
"저 괜찮은데요."
김원효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삼 년 동안 트레이 떨어뜨린 적 없다."
박나리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쌍화탕도 안 쏟았고."
"그냥 실수예요."
"두 번은 실수고 세 번은 아이다."
"세 번 아닌데요."
"방금 글씨 쓰다가 멈췄지."
박나리가 김원효를 봤다.
봤는데 눈을 오래 못 봤다.
"손 줘봐라."
박나리가 잠깐 그대로 있다가 왼손을 내밀었다.
4
김원효가 맥을 짚었다.
대기실에서였다. 진찰실로 안 들어가고 대기실 의자에 마주 앉아서 짚었다. 박나리는 그게 좀 이상했다. 환자들은 다 진찰실로 들어갔다.
"오른손도."
박나리가 오른손을 내밀었다. 김원효가 짚었다.
오래 짚었다.
"혀 내밀어봐라."
박나리가 혀를 내밀었다. 김원효가 봤다.
"눈 봐라."
박나리가 눈을 크게 떴다. 김원효가 아래 눈꺼풀을 살짝 내렸다.
"손톱."
박나리가 손을 뒤집었다. 김원효가 손톱을 봤다.
"세로줄 있제."
박나리가 자기 손톱을 봤다. 세로줄이 있었다. 언제부터 있었는지 몰랐다.
"이거 원래 있는 거 아니에요?"
"아이다."
김원효가 손을 놓았다.
"간혈허(肝血虛)다."
"그게 뭔데요."
"간에 피가 모자란 거라예. 간이 피를 저장하는 장기거든. 저장된 피가 모자라면 근육이랑 힘줄에 못 간다. 손이 떨리고 힘이 안 들어가는 게 그거라."
"저 빈혈이에요?"
"빈혈 검사하면 정상일 수도 있다. 한의학에서 혈이라는 게 피검사 수치랑 다른 거라."
김원효가 말했다.
"잠 잘 자나."
"자요."
"몇 시간."
박나리가 잠깐 생각했다.
"다섯 시간이나 여섯 시간이요."
"몇 시에 자는데."
"두 시나 세 시요."
"왜 그렇게 늦게 자노."
"그냥요."
김원효가 박나리를 봤다.
"누우면 뭐 하노."
박나리가 대답을 안 했다.
"폰 보나."
"네."
"뭐 보는데."
"그냥 이것저것이요."
김원효가 잠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람이 누우면 피가 간으로 돌아간다 카는 말이 있다."
박나리가 고개를 들었다.
"혈귀어간(血歸於肝)이라꼬. 낮에 몸을 돌던 피가 밤에 누우면 간으로 돌아와서 쉬는 기라. 그래야 다음 날 다시 나가는 기라."
"그래서요."
"두 시 세 시까지 안 누우면 피가 돌아갈 시간이 없다."
박나리가 자기 손을 봤다.
"돌아갈 데가 있어야 쉬는 기라."
박나리가 그 말을 들었다.
"약 지어줄게."
"약 안 먹어도 돼요."
"먹어라."
"저 진짜 괜찮아요."
김원효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리야."
"네."
"니 삼 년 동안 나한테 아무것도 안 물어봤제."
박나리가 김원효를 봤다.
"나도 니한테 아무것도 안 물어봤고."
박나리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늘 하나 물어보자."
"……뭔데요."
김원효가 잠깐 있다가 말했다.
"41번 버스 왜 아노."
5
지금 바로 작가의 멤버십 구독자가 되어
멤버십 특별 연재 콘텐츠를 모두 만나 보세요.
오직 멤버십 구독자만 볼 수 있는,
이 작가의 특별 연재 콘텐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