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대의 미학

가장 고결한 명령을 가장 치사하게 쓰는 법

by김경훈

네 적을 사랑하라. 그것이 네 적의 신경을 거스르는 가장 훌륭한 방법이다.


이 문장을 처음 읽으면 잠깐 멈추게 된다. 앞의 절반은 인류가 남긴 가장 고결한 명령 중 하나다. 뒤의 절반은 지극히 치사한 복수의 기술이다. 그 둘이 한 문장 안에 붙어 있다. 성스러운 것과 유치한 것이 접착제도 없이 딱 붙어서 아무렇지 않게 서 있다.


농담의 구조는 대개 이렇다. 익숙한 형식을 가져와 알맹이만 바꿔치기하는 것. 이 문장은 산상수훈의 문법을 그대로 빌려온 뒤 엔진만 슬쩍 갈아 끼웠다. 원래 그 자리에는 사랑이 있었는데 지금 그 자리에 앙심이 앉아 있다. 그런데도 문장은 여전히 멀쩡하게 작동한다. 그게 이 문장의 무서운 점이다.


보통 이런 개조를 하면 문장이 망가진다. 고결한 명령에 치사한 동기를 붙이면 위선이 되고 위선은 대개 티가 난다. 그런데 이 문장은 티가 나지 않는다. 오히려 원본보다 설득력이 있다. 원본은 성인에게나 가능한 요구처럼 들리는데 이 버전은 당장 오늘부터 해볼 수 있을 것 같다. 눈높이를 낮춘 것이 아니라 진입로를 하나 더 낸 것이다.



일단 이 전략이 실제로 효과가 있는지부터 따져보자.


효과가 있다. 그것도 상당히 있다.


갈등에는 구조가 있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은 나에게 특정한 역할을 배정해 둔 상태다. 자기를 미워할 사람. 반격할 사람. 상처받을 사람. 그 역할을 내가 맡아줘야 갈등이 굴러간다. 미움은 혼자서는 성립하지 않는다. 상대가 받아줘야 성립한다. 캐치볼과 같다. 던졌는데 아무도 받지 않으면 공은 그냥 땅에 떨어진다.


그러니까 친절은 공을 안 받는 행위다. 상대가 기대한 반응을 주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 상대의 미움은 갈 곳을 잃는다. 준비한 대사가 있는데 상대 배우가 다른 극에서 연기하고 있는 상황. 이건 실제로 사람을 몹시 답답하게 만든다.


싸움이 재미있으려면 상대가 있어야 한다. 화를 냈는데 상대가 웃으면 화가 어색해진다. 비난을 퍼부었는데 상대가 고맙다고 하면 비난이 허공에 남는다. 그 순간 미워하는 쪽은 자기가 혼자 떠들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관객 없는 무대에 서 있는 기분이 든다. 그리고 이런 종류의 민망함은 분노보다 훨씬 오래간다.


여기에 하나가 더 붙는다. 자기가 미워하는 사람이 자기에게 잘해주면 인지적으로 불편해진다. 나쁜 사람이어야 미워하기 편한데 계속 좋은 짓을 한다. 그러면 둘 중 하나를 수정해야 한다. 그 사람에 대한 평가를 바꾸거나 아니면 더 열심히 미워할 이유를 새로 찾아내거나. 어느 쪽이든 에너지가 든다. 미워하는 데 추가 비용이 발생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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