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만에 답방
5년전
비엔나에 이사를 오고 일주일째 되던 날, 남편의 새로운 온라인 게임 상사인 다정한 이태리 아저씨가 우리 가족을 초대했다.
낯선 나라에서 처음 받아보는 정식 초대였다. 감사한 마음도 잠시,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할 정도로 긴장이 되었다. 아직 집도 못 구해 임시숙소에서 생활하던 때라 변변히 뭐 하나 만들 여건조차 없었지만, 그래도 잡채 하나를 정성껏 만들고 와인과 작은 꽃다발도 챙겼다.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숨을 크게 한 번 들이마셨다.
작은 정원에는 연어카나페 같은 핑거푸드와 웰컴드링크가 준비되어 있었다. 오렌지주스에 감기약을 탄 것 같은 맛이었지만 기분상 "베리 굿"을 외쳤다.
곧이어 식사가 차려진 거실에는 깔끔한 테이블보 위에 정원의 꽃으로 만든 센터피스가 우리를 정중히 반겼다.
배정된 자리에 앉자 음식이 순서대로 나왔다. 라비올리, 새우요리, 내가 만들어 간 잡채, 마지막엔 아저씨가 직접 만든 패션프루트와 라즈베리 두 종류의 아이스크림이 나왔다.
외국 손님을 여러 번 치러본 듯 내 입맛에도 무난하게 잘 맞았지만, 남길까 봐 조금씩만 청해서 먹었다.
테이블 위에 팔꿈치를 올리는 게 예의가 아니라고 해서 최대한 얌전히 무릎에 올려두고 있는데, 정작 이태리 아저씨는 식탁에서 코를 팽팽 풀어댔다.
알고 보니 코를 푸는 건 이곳 사람들에게 아무렇지 않은 일이고, 오히려 콧물을 훌쩍대는 것이 큰 실례라고 한다.
두 분은 한국 얘기만 나오면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김치는 어떻게 담그는지, 명절엔 뭘 먹는지 묻는 게 끝이 없었다. 진땀은 났지만 즐겁고 뿌듯한 모임이었다.
헤어지며 나는 말했다.
"다음엔 저희 집으로 꼭 오세요."
그 말은 그대로 서랍에 들어가 5년을 잤다.
그 사이
핑계는 늘 새로 태어났다. 대화가 잘 안 되니까, 주방이 좁으니까, 아직은 때가 아니니까. 그러는 동안 이사를 했고, 아이들은 졸업과 입학을 했고, 서랍 속 약속은 점점 꺼내기 무거운 물건이 되어갔다.
그리고 지금
이태리 아저씨의 정년퇴직 소식을 들은 날, 나는 더 미루면 이 약속이 영영 유효기간을 넘긴다는 걸 알았다. 정년퇴직 축하를 핑계로 5년 묵은 빚을 갚듯 답초대를 하기로 하고 날짜부터 잡았다.
내 집에서만큼은 내 말로, 품위 있게 손님을 맞고 싶었다. 가족들이 내 말을 통역해 주느라 바쁘겠지만, 5년 전 그 집 정원에서 그저 고개만 끄덕이던 나와는 이번엔 조금 다른 사람이고 싶었다.
음식이 또 문제였다. 맵고 마늘 든 건 못 드신다는 말을 듣자, 손에 익은 반찬이 절반쯤 지워졌다. 고민 끝에 불고기, 잡채, 시금치나물, 콩나물, 새우부추냉채, 오이초무침, 명이조개 맑은 된장국과 밥을 정했다. 3일 전부터 불리고 갈아서 부친 녹두전은 이날의 주인공이 되었다.
두 분은 문에 들어서자마자 한국인의 부엌이 궁금하셨는지, 아저씨가 아내를 슬쩍 안으로 떠밀며 좀 배우라고 했다. 한창 마지막 손질 중이던 어수선한 부엌을 그대로 들켜버려 얼굴이 화끈거렸다.
자리에 앉아서는 아저씨가 양복 깃을 몇 번이고 여몄다. 5년 전 나만큼이나 예를 차리려 애쓰는 게 보였다.그 모습에 살짝 마음이 놓였다.
디저트는 한인마트 몇 군데를 뒤져 겨우 구한 붕어싸만코를 세 도막으로 나누고, 가운데 딸기와 블루베리를 얹어 슈가파우더를 흩뿌렸다. 수정과와 함께 차려지자 두 분이 너무 즐거워하셨다.
"원래 이렇게 차려 먹어요?"
그 한마디에 사흘의 수고가 다 갚아졌다.
며칠 뒤 감사 이메일과 함께 정년퇴직 파티에 와 달라는 연락이 왔다. 친한 지인들을 자신의 집으로 부르는 모임이었다. 마음은 무거웠지만 축하하는 자리에 빠질 수는 없어서 또 갔다. 빚 하나를 갚았다고 생각했는데, 빚은 다른 모양으로 되돌아왔다.
파티는 각자 음식을 하나씩 가져오는 포트럭 방식이었다. 여러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저마다 고향의 음식을 내놓았고, 나는 불고기를 만들어 갔다. 다들 정중하고 조심스럽게 다가와 인사를 건넸고, 우리는 서로의 음식을 나누어 먹었다.
불고기는 가장 먼저 바닥을 드러냈다.
나는 최대한 과묵하게 파티를 마무리하고 돌아왔다.
큰 숙제를 하고 나니 마음이 너무 편했다.
그런데 웬일…
남편에게 J(나)와 맥주 한잔 하자며 또 콜이 온 거다.
5년을 미뤄뒀던 건 어쩌면 초대가 아니라, 그분들과 가까워지는 일 그 자체였을까...
갚아야 할 빚인 줄 알았는데, 그들은 친구가 되고 싶은 것이었다.
아…
몸도 마음도 지치는 요즘인지라 남편에게는 혼자 만나라고 통보했다.
그리고 난 슬며시 요즘 유행하는 어학 앱 듀오링고를 연속 50일째 성공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