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우스의 바람이 불어온 문명의 시작, 냉혹한 신 크로노스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제우스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올림포스 최고의 신, 천둥과 번개를 다루는 신, 신과 인간의 세계를 지배하는 절대적인 존재.
그리고 하나가 더 있다.
바람둥이.
어쩌면 제우스에게는 최고신이라는 설명보다 이쪽이 더 유명할지도 모르겠다. 인간이든 여신이든 마음에 드는 여자가 나타나면 어떻게든 접근한다. 모습까지 바꿔 가면서 말이다. 구름이 되기도 하고 황금비가 되기도 한다. 그 정도의 정성을 아내인 헤라에게 쏟았으면 그리스 신화의 절반은 사라지지 않았을까 싶다.
《벌거벗은 세계사》 〈제우스의 바람이 불러온 문명의 탄생〉을 보면서 처음에는 나도 웃는다.
아니, 최고신이 왜 저래.
그런데 이야기를 계속 따라가다 보니 조금 이상해진다.
제우스의 복잡한 여자관계에서 신들이 태어나고 영웅들이 태어난다. 그 영웅들의 이동과 건국 이야기가 다시 여러 지역과 문명의 기원을 설명한다.
결국 제우스의 바람은 단순한 막장 연애사가 아니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이 자신들이 알고 있던 세계를 하나의 거대한 가족관계 안에 집어넣은 이야기처럼 보인다.
그 순간 제우스가 조금 다르게 보인다.
물론 좋은 남편으로 보인다는 뜻은 절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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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우스를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봐야 하는 것은 그의 집안이다.
이 집안은 시작부터 심상치 않다.
우라노스는 자신의 자식들을 두려워해 억압하고, 아들 크로노스는 어머니 가이아의 도움을 받아 아버지를 몰아낸다. 그런데 권력을 차지한 크로노스도 아버지와 별로 다르지 않다.
자기 자식에게 권력을 빼앗길 것이라는 예언을 듣자 태어나는 아이들을 차례대로 삼킨다.
자식을 사랑하기 전에 경쟁자로 보는 아버지다.
그리고 살아남은 막내가 제우스다.
제우스는 결국 크로노스를 몰아내고 권력을 차지한다.
여기까지 보고 있으면 한 집안에서 같은 일이 계속 반복되는 것 같다.
아버지는 아들을 두려워하고, 아들은 아버지를 몰아낸다.
권력을 잡은 아들은 다시 자기 자식을 두려워한다.
제우스도 다르지 않다.
메티스가 낳을 아들이 자신보다 강해져 권력을 빼앗을 것이라는 신탁을 듣자 메티스를 삼켜 버린다. 아버지 크로노스가 자식들을 삼킨 것과 묘하게 닮았다.
나는 이 부분이 재미있으면서도 조금 섬뜩하다.
그토록 아버지와 싸워 놓고 결국 아버지와 비슷한 행동을 한다.
사람도 가끔 그렇다.
나는 절대 저렇게 살지 말아야지 하고 싫어했던 모습을 어느 순간 자신이 반복한다. 부모에게 받은 상처를 자기 자식에게 똑같이 주기도 하고, 싫어했던 상사의 행동을 승진한 뒤 그대로 따라 하기도 한다.
권력의 자리도 비슷한 것 같다.
아래에 있을 때는 부당하다고 느끼던 일을 위에 올라간 뒤에는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한다.
제우스 역시 아버지의 폭압을 무너뜨린 혁명가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똑같이 두려움에 사로잡힌 지배자가 된다.
그런데 한 가지 차이는 있다.
제우스는 혼자 모든 것을 차지하지 않는다.
포세이돈과 하데스에게 각각 바다와 지하세계를 나누고 자신은 하늘을 맡는다. 그리고 자신의 형제와 자식들을 중심으로 올림포스의 질서를 만든다.
여기서부터 제우스는 단순히 힘이 센 신이라기보다 권력을 유지할 줄 아는 정치가처럼 보인다.
혼자 다 가지는 대신 나눈다.
그리고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을 자기 주변에 둔다.
문제는 그 믿을 만한 사람들이 대부분 가족이라는 것이다.
현대식으로 생각하면 상당히 노골적인 가족경영이다.
올림포스라는 초거대 기업의 회장이 제우스이고 이사진을 형제와 자식으로 채워 놓은 셈이다.
그런데 그 자식들을 만드는 과정이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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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우스에게는 헤라라는 아내가 있다.
그런데 결혼했다고 해서 제우스의 연애가 끝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느낌이다.
여기서부터 헤라는 늘 화가 난 아내로 등장한다.
어릴 때 신화를 읽으면 나도 헤라를 무서운 여신이라고 생각한다. 남편이 만난 여자들을 괴롭히고 그 여자에게서 태어난 아이까지 미워한다.
그런데 지금 다시 보면 조금 다르다.
남편이 끊임없이 바람을 피우는데 화가 안 나는 게 더 이상하지 않나.
물론 그렇다고 헤라가 다른 여성과 아이에게 가한 복수가 정당하다는 뜻은 아니다. 화를 내야 할 상대는 제우스인데 이상하게 피해자들이 더 고생한다.
그리고 정작 제우스는 다음 사랑을 찾아간다.
보고 있으면 좀 얄밉다.
사고는 제우스가 치고 수습은 다른 사람들이 한다.
특히 이오의 이야기는 그렇다.
제우스가 이오에게 마음을 품는다. 이오가 원했는지는 별로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는다. 제우스는 구름으로 변해 이오에게 접근하고, 헤라에게 들킬 것 같아지자 이오를 암소로 바꿔 버린다.
여기서 나는 잠깐 멈추게 된다.
자기가 바람을 피우다가 걸릴 것 같으니까 상대 여성을 소로 만들어 버린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정말 황당하다.
그런데 고생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헤라는 이오를 감시하게 하고, 이후 이오는 쇠파리에 시달리며 여러 지역을 떠돌게 된다.
제우스가 시작한 일인데 가장 큰 대가를 치르는 사람은 이오다.
신화를 보다 보면 이런 구조가 꽤 자주 나온다.
힘 있는 존재가 욕망하고, 힘없는 존재가 그 욕망의 결과를 감당한다.
나는 이걸 단순히 사랑 이야기라고 부르기가 어렵다.
좋아한다는 감정 자체는 잘못이 아니다. 하지만 상대의 의사보다 자신의 욕망이 먼저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제우스에게는 자신의 욕망을 현실로 만들 힘까지 있다.
인간에게는 거절할 수 있는 힘이 거의 없다.
사랑처럼 보이지만 권력관계가 섞여 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이오의 고난이 여기서 끝나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오가 떠돌아가는 길은 고대 그리스인들이 바라보던 세계와 연결되고, 신화는 여러 지역과 문명을 하나의 계보 안에 넣는다.
나는 이 지점에서 이 회차의 제목을 다시 생각한다.
‘제우스의 바람이 불러온 문명의 탄생.’
처음 들으면 농담 같은 제목이다.
그런데 정말 신화 속에서는 한 남자의 욕망이 지리와 문명의 설명으로 확장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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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나에의 이야기는 더 기막히다.
아르고스의 왕 아크리시오스는 자신의 딸 다나에가 낳은 아들에게 죽게 될 것이라는 신탁을 받는다.
그러자 딸을 청동 탑에 가둔다.
아직 아무 일도 하지 않은 딸이 아버지의 공포 때문에 감금된다.
이 집안도 결국 두려움 때문에 자식을 가두는다는 점에서는 앞의 이야기와 닮았다.
운명을 피하려고 사람을 가둔다.
그런데 신화에서 운명을 피하려고 하는 행동은 거의 항상 운명을 완성하는 쪽으로 흘러간다.
다나에가 갇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제우스가 나타난다.
청동 탑도 제우스를 막지 못한다.
황금비로 변해서 들어간다.
여기까지 들으면 정말 제우스의 집념 하나는 인정해야 하나 싶다.
문이 닫혀 있으면 포기하는 게 아니라 비가 되어 들어간다.
하지만 나는 이 장면 역시 마냥 낭만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다나에의 삶에서 자신의 의지는 얼마나 있었을까.
아버지는 신탁이 두려워 딸을 가둔다.
제우스는 그곳으로 들어온다.
아이를 낳자 아버지는 다나에와 아이를 상자에 넣어 바다에 버린다.
남자들이 두려워하는 운명과 욕망 사이에서 다나에는 계속 끌려다닌다.
그리고 그 아이가 페르세우스다.
여기서 이야기는 갑자기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영웅 신화로 넘어간다.
메두사의 목을 베는 영웅.
결국 페르세우스의 계보와 이야기는 미케네의 기원으로 이어진다.
나는 이 부분이 굉장히 흥미롭다.
우리가 역사 시간에 ‘문명’이라고 배우면 유적과 연도부터 떠올린다.
도시가 생기고 왕국이 만들어지고 궁전이 세워진다.
그런데 신화는 전혀 다르게 설명한다.
누가 누구를 사랑했고, 누가 누구를 낳았으며, 누가 쫓겨났고, 누가 새로운 땅에 도착했는지를 이야기한다.
문명의 탄생을 가족 이야기로 설명한다.
그래서 외우려고 하면 정신없는데 이야기로 들으면 이상하게 기억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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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예전에는 신화를 그냥 옛날 사람들이 만들어 낸 판타지라고 생각한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사람이 황금비가 되고, 신의 머리에서 딸이 태어나고, 눈이 백 개 달린 거인이 등장한다.
현실성이라고는 없다.
그런데 《벌거벗은 세계사》를 보고 있으면 신화를 꼭 사실인지 아닌지만 따져 볼 필요는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신화는 당시 사람들이 세상을 이해했던 방식이기 때문이다.
왜 우리가 여기에서 살고 있는지.
이 도시는 어떻게 생겼는지.
우리 조상은 누구인지.
왜 저 지역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는지.
과학적 설명이 없던 시대에는 이야기가 그 자리를 채운다.
그리고 그 이야기의 중심에 제우스가 있다.
최고신의 혈통과 연결시키면 자신의 도시와 왕조에도 특별한 의미가 생긴다.
‘우리의 시조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 제우스의 후손이다.’
이보다 강력한 정통성도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제우스의 자식이 그렇게 많은 이유를 단순히 제우스가 여자를 좋아했기 때문이라고만 보면 신화의 절반밖에 보지 못하는 셈이다.
여러 지역에서 전해지던 서로 다른 이야기를 제우스라는 하나의 거대한 계보에 연결하면서 그리스 세계가 하나의 신화적 세계관 안으로 묶였다고 볼 수도 있다.
생각해 보면 꽤 영리하다.
제우스의 연애사가 일종의 세계지도 역할을 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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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나는 제우스의 행동을 문명의 탄생이라는 결과로 미화하고 싶지는 않다.
결과가 위대하다고 과정까지 아름다워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오가 훗날 어떤 문명과 연결된다고 해서 이오가 겪은 고통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페르세우스가 영웅이 되고 미케네와 연결된다고 해서 다나에가 아버지에게 감금되고 바다에 버려진 일이 아름다운 운명이 되는 것도 아니다.
나는 오히려 이런 여성들에게 눈이 간다.
신화의 중심에서는 제우스와 영웅들이 움직이는 것 같지만 이야기를 조금 옆에서 보면 그들의 욕망과 권력 때문에 삶이 완전히 바뀐 여성들이 있다.
이오도 그렇고 다나에도 그렇다.
세멜레 역시 마찬가지다.
제우스의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축복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그 여성들의 삶이 행복해지는 경우는 별로 없다.
제우스는 사랑하고 떠난다.
남은 사람들은 그 사랑의 후폭풍을 견딘다.
그래서 ‘제우스의 사랑’이라는 표현보다 ‘제우스의 욕망’이라는 표현이 더 정확하게 느껴지는 순간도 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 사람이 자기 때문에 어떤 일을 겪게 될지도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제우스는 그런 부분에서는 놀랄 만큼 무바카라임하다.
최고신인데 연애 뒤처리는 최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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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또 재미있는 점이 있다.
이렇게 엉망진창인 신을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최고신으로 만들어 놓았다.
완벽하고 도덕적인 존재를 최고신으로 만들 수도 있었을 텐데 제우스는 그렇지 않다.
질투도 하고 욕망도 많고 권력에 민감하며 자기 자리를 빼앗길까 두려워한다.
어떻게 보면 인간보다 더 인간적이다.
나는 오히려 그래서 그리스 신화가 오래 살아남았다는 생각이 든다.
완벽한 신의 이야기는 존경할 수는 있어도 재미는 없을 것 같다.
하지만 그리스 신들은 끊임없이 사고를 친다.
사랑하고 질투하고 싸우고 복수한다.
가족끼리 권력을 놓고 싸우고 부모와 자식이 서로를 두려워한다.
인간이 가진 감정을 엄청난 힘을 가진 존재들에게 그대로 집어넣어 놓았다.
그러니 이야기가 끝날 수가 없다.
특히 제우스를 보면 권력과 욕망이 묘하게 붙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제우스는 원하는 것을 얻을 힘이 있다.
그래서 원하는 순간 행동한다.
현실에서도 권력이 무서운 이유가 비슷하지 않을까.
욕망 자체는 누구에게나 있다.
문제는 그 욕망을 막아 줄 것이 없는 사람이다.
평범한 사람은 하고 싶은 일이 있어도 법과 규칙, 다른 사람의 거절 때문에 멈춘다.
하지만 권력이 너무 커지면 그 선을 넘어갈 수 있다.
제우스에게는 그 선이 거의 없다.
그래서 그의 연애 이야기는 사랑 이야기인 동시에 권력 이야기로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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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을 다 보고 나서 가장 재미있었던 것은 결국 ‘문명’이라는 단어였다.
문명이라고 하면 나는 거대한 궁전이나 도시, 문자, 예술 같은 것을 먼저 떠올린다.
그런데 신화 속 문명의 출발점을 따라가면 인간의 욕망이 나온다.
사랑하고 싶다는 욕망.
권력을 지키고 싶다는 욕망.
자식에게 자리를 빼앗기고 싶지 않다는 두려움.
자기 혈통을 이어 가고 싶은 마음.
운명을 피하고 싶은 공포.
거창한 문명의 시작에 너무나 인간적인 감정이 놓여 있다.
어쩌면 실제 역사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나라를 만들고 전쟁을 하고 도시를 세우는 것도 결국 사람이 한다.
그 사람 안에는 욕망과 질투와 공포가 있다.
역사바카라에서는 전쟁, 건국, 왕조 같은 단어로 정리되지만 그 일을 움직인 사람의 마음까지 들여다보면 훨씬 복잡할 것이다.
그리스 사람들은 그것을 신들의 이야기로 만들어 남긴다.
그래서 제우스의 바람 이야기를 단순한 불륜 이야기로만 보면 우습지만, 그 뒤에 붙어 있는 계보를 따라가면 이야기가 갑자기 커진다.
한 신의 욕망에서 아이가 태어나고, 그 아이의 후손이 이동하고, 새로운 지역에 정착하고, 도시와 왕조의 기원이 만들어진다.
사랑 이야기가 지도가 되고 족보가 역사가 된다.
나는 이 방식이 꽤 매력적이다.
사실인지 아닌지를 떠나 사람들이 자신들의 세계를 어떻게 이해했는지가 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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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제우스에게 좋은 남편 점수를 줄 생각은 없다.
최고신 점수와 남편 점수는 따로 매겨야 한다.
권력을 유지하는 능력은 뛰어나다.
형제들과 영역을 나누고, 자신의 주변에 강력한 신들을 배치하고, 수많은 신과 영웅의 계보 중심에 자신을 놓는다.
하지만 관계에서는 거의 재난에 가깝다.
그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마다 헤라는 분노하고, 사랑받은 여성은 고난을 겪고, 아이들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기구한 운명에 휘말린다.
제우스 혼자 즐겁고 주변 사람들이 수습하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그런데 바로 그 난장판에서 수많은 이야기가 태어난다.
아테나가 나오고, 디오니소스가 나오고, 페르세우스 같은 영웅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는 도시와 문명, 예술 작품으로 이어진다.
참 아이러니하다.
모범적인 가정이었다면 우리가 아는 그리스 신화의 상당 부분이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제우스가 헤라에게 충실했다면 세계 문명사는 조금 덜 재미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제우스의 바람에 감사해야 하는지는 모르겠다.
헤라에게 물어보면 절대 아니라고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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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우스의 바람이 불러온 문명의 탄생〉을 보고 나서 제우스는 내게 더 이상 단순한 ‘바람둥이 신’으로만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위대한 문명을 만든 훌륭한 신으로 보이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제우스는 고대 그리스 사람들이 세상을 연결하기 위해 만든 거대한 중심점처럼 느껴진다.
그의 부모와 형제는 세계의 질서를 설명하고, 그의 자식들은 신들의 역할을 나누며, 인간 여성들과의 관계에서 태어난 후손들은 여러 지역과 영웅, 문명의 기원을 연결한다.
복잡하기 짝이 없는 가족관계가 하나의 세계관이 된다.
그리고 그 세계를 움직이는 것은 의외로 거창한 철학이 아니다.
두려움, 사랑, 욕망, 질투, 권력이다.
지금 사람들에게도 너무 익숙한 감정들이다.
그래서 수천 년 전 이야기가 아직도 재미있는 것인지 모른다.
제우스가 황금비로 변했다는 이야기를 실제 역사라고 믿을 필요는 없다.
하지만 사람들이 왜 그런 이야기를 만들었는지는 생각해 볼 만하다.
자신들이 사는 세계에는 시작이 필요했고, 도시에는 조상이 필요했으며, 왕에게는 정통성이 필요했다.
설명할 수 없는 것에는 이야기가 필요했다.
그 수많은 이야기를 이어 붙이다 보니 결국 한 신의 가족사가 세계를 뒤덮는다.
제우스의 바람이 정말 문명을 만들었을까.
당연히 문자 그대로 그렇게 볼 수는 없다.
하지만 제우스의 욕망을 따라 만들어진 신화가 고대인들이 알고 있던 세계와 문명을 설명하는 거대한 이야기가 되었다는 점은 흥미롭다.
나는 그래서 이 회차의 제목이 꽤 절묘하다고 생각한다.
‘제우스의 바람이 불러온 문명의 탄생.’
처음에는 웃기다.
다 보고 나면 조금 다르게 들린다.
제우스가 사랑한 여성들의 이름을 따라가다 보면 영웅이 나오고, 도시가 나오고, 문명이 나온다. 개인의 욕망으로 시작한 이야기가 어느 순간 세계의 기원이 된다.
하지만 그 화려한 문명의 계보 뒤에는 이오와 다나에처럼 자기 뜻과 상관없이 신과 권력자의 욕망에 휘말린 사람들도 있다.
나는 그들을 빼놓고 제우스의 바람을 낭만적인 신화로만 기억하고 싶지는 않다.
문명은 영웅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이야기의 중심에 이름을 남긴 사람도 있지만 그 사람이 움직이는 동안 고통을 떠안은 사람도 있다.
신화를 다시 읽는 재미는 어쩌면 여기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예전에는 제우스만 보였다.
조금 더 들여다보니 제우스가 사랑했다는 여자들이 보인다.
그리고 그들의 아이가 보이고, 그 아이가 도착한 땅이 보인다.
그렇게 한 사람씩 따라가다 보면 신화라고 생각했던 이야기가 어느 순간 역사와 지리와 문명으로 이어진다.
결국 신화가 보여 주는 것은 완벽한 신들의 세계가 아니다.
욕망하고 두려워하고 사랑하고 권력을 놓지 못하는 인간이 자신과 너무 닮은 신들을 만들어 세상을 설명했던 방식이다.
그래서 나는 제우스의 수많은 바람보다 그 바람을 이용해 세계의 시작을 설명했던 사람들의 상상력이 더 재미있다.
최고신조차 완벽하게 만들지 않았다는 것도 마음에 든다.
권력은 가장 강하지만 욕망 앞에서는 한없이 허술한 신.
세상을 다스리면서 자기 집안 하나 조용하게 만들지 못하는 신.
그런 제우스의 뒤를 따라가다 보니 어느새 문명의 이야기에 도착한다.
그리스 신화다운 시작이고, 그리스 신화다운 결말이다.
세상은 번개 한 번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인간이 끝없이 만들어 낸 이야기 속에서 조금씩 설명되어 왔다는 것.
나는 이번 회차에서 제우스의 바람보다 오히려 그 사실이 오래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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