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한 문명은 누구의 죽음 위에 세워지는가

우리는 왜 건축물에는 감탄하면서 죽은 사람은 보지 못했을까

byHelia

우리는 오래된 문명을 볼 때 너무 쉽게 감탄한다.

수백 년, 수천 년을 견딘 거대한 건축물 앞에 서면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대개 비슷하다. 도대체 그 시대에 어떻게 이런 걸 만들었을까. 기계도 없고 지금처럼 발달한 기술도 없던 시대에 저 거대한 돌을 어떻게 옮겼으며, 어떻게 저렇게 정교한 건축물을 세웠을까.

나 역시 그렇다.

박물관에 가면 오래된 유물 앞에서 한참을 바라보고, 사진으로만 보던 거대한 유적을 보면 언젠가 직접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오래된 건축물이나 유적을 사진으로 찍는 것도 좋아한다. 시간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들은 이상하게 사람을 오래 붙잡아 둔다.

그런데 <벌거벗은 세계사>의 「찬란한 문명은 누구의 죽음 위에 세워지는가」라는 제목을 보는 순간 조금 다른 생각이 든다.

우리는 완성된 것만 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돌 하나를 옮긴 사람은 누구였을까.

벽 하나를 쌓다가 다친 사람은 누구였을까.

그곳에서 죽은 사람에게도 가족이 있었을 텐데, 그 가족은 이후 어떻게 살았을까.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은 자신이 만드는 것을 정말 원했을까.

나는 이 질문이 꽤 오래 남는다.

찬란한 문명이라는 말은 너무 아름답다

‘찬란한 문명’이라는 표현에는 이상한 힘이 있다.

찬란하다는 말이 붙는 순간 우리는 그 문명을 긍정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 웅장하고 위대하고 아름다운 것. 인류가 이룩한 놀라운 성취. 교과서에서도 역사는 대체로 그렇게 정리된다.

무엇을 건설했다.

어떤 기술을 발전시켰다.

얼마나 넓은 영토를 차지했다.

어떤 왕이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그런데 나는 어느 순간부터 역사에서 ‘누가 만들었는가’보다 ‘누가 시켰는가’가 더 크게 기록된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느껴진다.

왕이 궁전을 건설했다고 말한다.

황제가 거대한 건축물을 만들었다고 말한다.

권력자가 도시를 세웠다고 말한다.

하지만 왕이 직접 돌을 나른 것은 아니다.

황제가 직접 땅을 판 것도 아니다.

우리가 지금 바라보며 감탄하는 거대한 문명의 흔적에는 이름조차 남지 않은 사람들이 훨씬 많이 존재한다.

그들의 손이 있었고, 등이 있었고, 무릎이 있었고, 땀이 있었다.

그리고 죽음도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역사는 그들의 이름을 거의 기억하지 않는다.

나는 이 지점이 가장 씁쓸하다.

명령한 사람의 이름은 수천 년이 지나도 남는데 실제로 만든 사람의 이름은 사라진다.

돌에도 무게가 있지만 사람에게도 삶이 있다

거대한 건축물을 설명할 때 우리는 숫자를 좋아한다.

높이가 몇 미터인지, 돌이 몇 개 사용됐는지, 몇 년 동안 건설했는지, 몇 명이 동원됐는지.

숫자가 커질수록 감탄도 커진다.

그런데 ‘몇만 명이 동원됐다’는 문장을 조금 다르게 생각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몇만 명이라는 숫자 안에는 몇만 개의 하루가 있다.

아침에 눈을 뜨는 사람이 있고, 집에 돌아가고 싶은 사람이 있고, 기다리는 가족이 있고, 아픈 사람이 있고, 쉬고 싶은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들을 전부 지우고 나면 ‘노동력’이라는 단어 하나만 남는다.

나는 역사에서 이 단어가 가끔 무섭다.

사람이 사람으로 보이지 않고 자원처럼 계산되기 때문이다.

노동력 몇만 명.

병력 몇십만 명.

사망자 몇만 명.

숫자가 커질수록 오히려 죽음은 추상적으로 변한다.

한 사람이 죽었다고 하면 그 사람의 얼굴을 상상할 수 있는데 만 명이 죽었다고 하면 갑자기 통계가 된다.

어쩌면 인간은 너무 많은 죽음을 한꺼번에 이해할 능력이 없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역사를 볼 때 일부러 한 사람을 상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거대한 돌을 옮기던 사람 한 명.

오늘만 버티면 집에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

아픈데도 일을 멈추지 못했던 사람.

친구가 사고로 죽는 것을 바로 옆에서 봤던 사람.

그렇게 한 명씩 생각하기 시작하면 ‘위대한 문명’이라는 말이 전처럼 쉽게 나오지 않는다.

왕의 업적이라고 부르는 것이 이상해지는 순간

나는 역사 프로그램을 보면서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왜 이렇게 많은 것이 왕의 이름으로 남았을까.

어떤 왕이 무엇을 세웠다.

어떤 황제가 무엇을 완성했다.

어떤 군주가 대규모 토목 사업을 벌였다.

물론 명령하고 계획하고 자원을 동원한 권력자의 역할을 역사에서 빼놓을 수는 없다.

하지만 그 문장을 조금만 바꿔 보면 느낌이 완전히 달라진다.

‘왕이 만들었다’가 아니라 ‘왕의 명령으로 사람들이 만들었다.’

나는 후자가 훨씬 정확하게 느껴진다.

주어 하나를 바꿨을 뿐인데 보이지 않던 사람들이 갑자기 나타난다.

역사는 결국 누가 주어가 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된다.

권력자를 주어로 쓰면 업적이 된다.

노동자를 주어로 쓰면 삶이 된다.

희생자를 주어로 쓰면 비극이 된다.

같은 사건인데도 그렇다.

그래서 나는 <벌거벗은 세계사>를 볼 때 사건 자체보다 가끔 이런 부분에 더 눈이 간다.

기록되지 않은 사람들.

이름이 없는 사람들.

누군가의 위대한 업적을 완성하기 위해 존재했지만 정작 역사에서는 한 줄도 얻지 못한 사람들.

그 사람들이 없었다면 우리가 지금 ‘문명’이라고 부르는 것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이 잘못은 아니다

그렇다고 오래된 유적을 보며 감탄하면 안 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아름다운 것은 아름답다.

정교한 것은 놀랍고, 당시의 기술 수준을 생각하면 경이로운 것도 사실이다.

나 역시 그런 것을 보면 사진을 찍고 싶다.

빛이 어느 방향에서 들어오는지 보고, 오래된 벽의 질감을 보고, 사람이 지나간 흔적을 찾는다.

다만 이제는 사진 한 장을 찍더라도 조금 다른 생각을 하게 될 것 같다.

이 벽을 만든 사람은 누구였을까.

이 돌을 만졌던 손은 몇 개였을까.

여기에서 누군가는 웃었을까.

누군가는 도망가고 싶었을까.

누군가는 집에 있는 아이를 생각했을까.

그런 생각을 한다고 해서 유적의 아름다움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나는 그때부터 비로소 그것이 진짜 역사처럼 느껴진다.

건축물만 남아 있는 역사는 박제에 가깝다.

그 안에 사람을 다시 넣어야 살아 있는 역사가 된다.

죽음까지도 미화되는 순간

더 불편한 것은 희생이 때때로 너무 쉽게 미화된다는 점이다.

‘위대한 문명을 위해 희생했다.’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

이런 문장은 익숙하다.

그런데 나는 ‘희생’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조금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희생에는 자발성처럼 들리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죽은 사람이 정말 자신의 죽음을 선택했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누군가는 선택권 자체가 없었을 것이다.

누군가는 명령 때문에 움직였을 것이고, 누군가는 생계를 위해 일을 했을 것이고, 누군가는 권력 앞에서 거절할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의 죽음까지 전부 ‘위대한 문명을 위한 희생’이라고 부르면 너무 편리해진다.

죽음을 요구한 사람의 바카라임은 사라지고 죽은 사람에게 숭고함만 남는다.

나는 그것이 싫다.

죽음을 아름답게 만드는 순간 우리는 왜 그 사람이 죽어야 했는지를 묻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역사는 이상할 정도로 승자의 얼굴을 좋아한다

역사바카라에는 얼굴이 있다.

왕의 얼굴.

황제의 얼굴.

장군의 얼굴.

정복자의 얼굴.

그런데 그 시대를 실제로 살아낸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얼굴이 없다.

나는 그것이 역사 기록의 한계라는 것을 알면서도 가끔 억울하다.

전쟁에서도 마찬가지다.

누가 승리했는지는 자세히 남는다.

어떤 전략을 사용했고 어느 지역을 점령했고 영토가 얼마나 넓어졌는지도 기록된다.

하지만 그 전쟁 때문에 평범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는 몇 줄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문명 역시 비슷하다.

완성된 건축물은 수천 년 동안 남아 관광지가 되는데 그것을 만들다 죽은 사람은 이름조차 남지 않는다.

조금 잔인한 농담처럼 느껴질 정도다.

건물은 살아남았는데 사람은 사라졌다.

그리고 후대의 우리는 살아남은 건물을 보면서 감탄한다.

그래서 나는 이번 제목이 좋다.

‘찬란한 문명은 누구의 죽음 위에 세워지는가.’

문명을 부정하는 질문이 아니라 우리가 감탄하기 전에 한 번쯤 아래를 내려다보게 만드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높은 곳만 바라보면 왕과 황제가 보인다.

아래를 보면 그것을 떠받친 사람들이 보인다.

결국 문명을 만든 것은 평범한 사람들이다

나는 역사에서 영웅 한 사람이 모든 것을 바꿨다는 이야기를 예전만큼 좋아하지 않는다.

물론 한 사람의 결정이 역사의 방향을 크게 바꾸는 경우는 있다.

하지만 슬롯는 한 사람만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도시도 그렇고, 국가도 그렇고, 문명도 그렇다.

수많은 평범한 사람이 움직여야 한다.

누군가는 돌을 자르고, 누군가는 옮기고, 누군가는 음식을 만들고, 누군가는 도구를 만들고, 누군가는 기록한다.

그 사람들이 사라지면 왕의 명령은 그냥 말 한마디에 불과하다.

그런데 역사는 명령을 내린 사람을 기억하고 명령을 현실로 만든 사람은 잊는다.

생각할수록 묘하다.

어쩌면 우리가 역사를 보는 방식도 조금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

‘누가 명령했는가’만큼 ‘누가 실행했는가’를 묻는 역사.

‘무엇을 만들었는가’만큼 ‘그 과정에서 어떤 사람이 살았는가’를 보는 역사.

나는 그런 이야기가 더 궁금하다.

찬란함과 잔혹함은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

이번 이야기를 보면서 가장 크게 남는 생각은 이것이다.

찬란한 문명과 잔혹한 현실은 서로 반대말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

하나의 문명이 아름답고 뛰어난 예술과 기술을 남겼다는 사실과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이 고통받았다는 사실은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

둘 중 하나를 지운다고 다른 하나가 더 진실해지는 것은 아니다.

나는 오히려 둘 다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름다움을 보면서 그 뒤의 고통을 기억하는 것.

위대한 성취를 인정하면서 그것을 가능하게 만든 사람을 잊지 않는 것.

역사는 그렇게 볼 때 훨씬 복잡해진다.

하지만 사람도 원래 복잡하다.

역사를 선과 악, 영웅과 악당으로 나누는 것은 쉽다.

누군가를 위대한 왕이라고 부르면 이야기는 간단해진다.

하지만 그 왕의 업적 뒤에서 고통받은 사람이 보이기 시작하면 이야기가 불편해진다.

나는 이제 그 불편함이 오히려 좋다.

적어도 아무 생각 없이 박수를 치지는 않게 되니까.

내가 보고 싶은 역사는 이름 없는 사람들의 역사다

<벌거벗은 세계사>를 계속 보게 되는 이유도 결국 이것과 닿아 있다.

학교에서 몇 줄로 배웠던 사건을 펼쳐 보면 그 안에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있다.

욕망도 있고 사랑도 있고 질투도 있고 공포도 있고 생존도 있다.

교과서에서는 한 줄인데 누군가에게는 평생이었다.

나는 역사가 바로 그 지점에서 재미있어진다.

이번 회차 제목을 보고 나서 앞으로 오래된 유적을 볼 때 조금 다른 질문을 하게 될 것 같다.

누가 만들었을까.

얼마나 많은 사람이 여기에 있었을까.

그들은 어떤 하루를 보냈을까.

그중 몇 명이나 집으로 돌아갔을까.

역사는 죽은 사람에게 대답을 들을 수 없다는 점에서 잔인하다.

우리는 그들에게 직접 물을 수 없다.

그래서 더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기록에 이름이 없다고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니까.

문명은 돌이 아니라 사람의 흔적이다

결국 내가 이번 이야기를 통해 가장 오래 생각하게 되는 것은 ‘문명’이라는 단어 자체다.

우리는 문명이라고 하면 건축물부터 떠올린다.

거대한 궁전, 성벽, 신전, 무덤.

하지만 문명을 정말 만든 것은 돌이 아니다.

사람이다.

돌을 자른 사람.

운반한 사람.

설계한 사람.

밥을 지은 사람.

아이를 키운 사람.

그리고 그 과정에서 죽은 사람.

그 사람들의 삶까지 포함해야 비로소 문명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수천 년이 지나 우리는 완성된 결과만 바라본다.

햇빛 아래 서 있는 거대한 유적은 아름답다.

사진도 아름답게 나온다.

사람들은 그 앞에서 웃으며 기념사진을 찍는다.

그것이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도 그 자리에 간다면 분명 사진을 찍을 것이다.

다만 셔터를 누르기 전에 한 번쯤 생각하고 싶다.

이 아름다운 풍경 안에서 지워진 사람은 누구였을까.

그 질문 하나만 가지고 있어도 역사를 보는 시선은 꽤 달라질 것 같다.

찬란함만 바라보면 문명은 위대하다.

하지만 그 아래를 바라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땀 흘린 사람이 있고, 억울한 사람이 있고, 돌아오지 못한 사람이 있다.

그리고 나는 이제 그 사람들까지 포함해서 역사를 보고 싶다.

왕의 이름은 이미 충분히 많이 남아 있으니까.

이번에는 이름조차 남지 않은 사람들의 차례였으면 좋겠다.

어쩌면 찬란한 문명보다 더 오래 기억해야 할 것은 그 문명을 만들고도 자신의 이름 하나 남기지 못한 사람들의 삶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찬란한 문명은 누구의 죽음 위에 세워지는가」라는 질문에 나는 한 사람의 이름을 답할 수 없다.

대신 이렇게 말하고 싶다.

우리가 모르는 수많은 사람들.

역사바카라에 기록되지 않은 사람들.

왕의 업적이라는 한 문장 뒤에서 지워진 사람들.

그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기억하는 순간, 우리가 바라보던 찬란한 문명은 전과 조금 다른 모습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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