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0원짜리 딸기우유

사랑을 잃은 남자와 기억을 잃은 여자

byHelia

단편소설 | 로맨스 · 심리 드라마

윤아린 침대 끝에 걸터앉아 남편을 바라봤다.

결혼한 지 3년, 알고 지낸 지는 13년이었다. 연애할 때 윤조는 틈만 나면 아리의 손을 잡았다. 지금은 같은 침대에 누워도 손끝 하나 닿지 않았다.

“여보, 우리 얘기 좀 해.”

“또 무슨 얘기.”

윤조는 휴대전화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화면에는 서킷에서 찍힌 사진과 여자들이 남긴 메시지가 번갈아 떠올랐다. 차윤조. 세계적인 F1 드라이버. 카메라 앞에서는 아내의 허리를 감싸고 ‘내 인생의 챔피언은 아내’라던 남자였다.

“나 아직 당신한테 여자로 보여?”

“하…… 피곤하다니까. 나 시즌 중이잖아.”

“난 당신이 피곤하다는 말만 몇 달째 듣고 있어.”

윤조가 휴대전화를 침대 위에 던졌다.

“그럼 영상이라도 좀 틀어봐. 아침까지 이러고 있으면 답이 나와?”

아리는 화내지 않았다. 이미 충분히 애썼다. 먼저 말을 걸고,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고, 예쁘게 차려입었다. 돌아온 건 건성인 대답과 등을 돌린 잠자리였다.

아리는 일어나 협탁으로 갔다. 왼손 약지의 반지를 빼 내려놓았다. 작은 금속 소리에 윤조의 엄지가 멈췄다.

“뭐 하는데?”

“이혼하자.”

아리는 서랍에서 서류 한 장을 꺼냈다. 협의이혼 의사확인 신청서. 아내의 인적 사항만 적혀 있었다.

윤조가 몸을 일으켰다.

“13년을 같이 있었는데, 그 말이 그렇게 쉽게 나와?”

“쉽게 나왔을 것 같아?”

“내가 좀 무심했다고 이혼을 해?”

“좀?”

아리는 기가 막혀 웃었다.

“당신은 내가 옆에 있는지도 모르잖아. 당신한테 말 걸 때마다 눈치 봐야 했고, 나를 만지기 싫다는 말까지 들었어. 그런데 밖에서는 세상에 둘도 없는 사랑꾼이더라. 대체 어느 쪽이 진짜야?”

윤조가 아리의 손목을 잡았다. 아리는 그 손을 내려다봤다. 오래전에는 기다렸던 손이었다. 지금은 아프기만 했다.

“놔.”

“여보.”

“놓으라고.”

윤조는 손을 풀었다.

“나 번아웃이야. 병원에서도 그랬어. 몸이 내 마음대로 안 되는 걸 어떡하라고.”

“그럴 수 있지. 당신도 힘들 수 있어. 그런데 그걸 이유로 나한테 함부로 대해도 되는 건 아니잖아.”

윤조는 입술을 깨물었다. 사랑하냐는 질문에는 대답하지 못하던 남자가 이혼이라는 말 앞에서는 할 말이 많아졌다.

“난 사인했어. 당신이 싫다면 법적으로 진행할 거야. 용건은 변호사 통해서 해.”

아리는 옷장 아래에 넣어둔 캐리어를 꺼냈다. 미리 싸둔 짐이었다. 윤조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언제부터 준비한 거야?”

“당신이 나한테 관심 없던 시간부터.”

현관문이 닫혔다.

윤조는 뒤늦게 쫓아나가 골목 끝에서 아리를 붙잡았다. 새벽바람이 두 사람 사이를 갈랐다.

“이 시간에 어디 가려고. 집에 들어가서 얘기해.”

아리는 손가락을 하나씩 떼어냈다.

“난 당신하고 더 할 얘기 없어.”

캐리어 소리가 멀어졌다. 아리의 눈에는 원망조차 없었다.

집에 돌아온 윤조는 아리가 두고 간 반지를 서랍에 넣으려다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같은 양식의 이혼 서류가 수십 장이었다. 가장 오래된 날짜는 석 달 전. 서명은 매번 아리의 것뿐이었다. 어떤 종이는 구겨져 있었고, 어떤 종이는 얼룩이 번져 있었다.

맨 아래에는 낡은 다이어리가 있었다.

‘나는 왜 이 사람과 결혼했을까. 평생 사랑하겠다고 다정한 눈으로 약속한 남자는 어디로 갔을까.’

장을 넘길수록 문장은 짧아졌다.

‘오늘도 다른 여자 향수 냄새를 묻히고 왔다. 물어보니 시끄럽다고 했다.’

‘내가 먼저 안아도 아무 반응이 없다. 내가 여자로서 끝난 사람 같았다.’

‘외롭다. 이렇게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지.’

마지막 문장 앞에서 윤조는 숨을 삼켰다.

‘죽고 싶다.’

윤조는 주저앉았다. 아리는 갑자기 떠난 게 아니었다. 수십 번 마음을 접었다 펼친 끝에 겨우 현관문을 열었다.

전화를 걸었다. 전원이 꺼져 있다는 안내만 반복됐다.

윤조는 차 키를 들고나갔다. 친정일까, 호텔일까. 아내가 어디로 갈지조차 몰랐다.

새벽의 한강에서 아리를 발견했을 때, 윤조는 자기 눈을 의심했다. 아린 차가운 물속에 있었고 그의 부름에도 돌아보지 않았다. 윤조는 도움을 요청하며 아리를 물 밖으로 데려왔다.

“왜 왔어?”

“여보, 제발…….”

“날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왜?”

윤조는 바람피운 적 없다고 했다. 먼저 연락받았고 답장만 했다고. 원한다면 통화와 이동 기록도 보여주겠다고 했다.

“진작 그러지 그랬어.”

그 말 앞에서는 아무 변명도 통하지 않았다.

“당신은 내가 사랑해 달라고 할 때는 못 들은 척했잖아. 이제 내가 떠난다니까 사랑한다고? 나 없으면 못 산다고? 그게 사랑이야, 아니면 당신 물건을 빼앗기는 기분이야?”

윤조가 아리의 손을 붙잡으려 하자 아리는 뿌리쳤다.

“나 좀 내버려 둬.”

“난 여보 없으면 안 돼.”

“난 당신 없이는 안 되는 사람이었어. 그래서 이렇게 된 거고.”

아리의 대답에 윤조는 입을 다물었다. 오래도록 자신이 무시했던 문장들이 한꺼번에 돌아와 그를 때렸다.

윤조는 울었다. 아리는 울지 않았다. 눈물도 지치면 나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집에 가자.”

“안 가.”

아리는 캐리어를 끌고 떠났다. 윤조는 더 따라가지 않았다. 대신 연락이 닿지 않는 아내가 걱정되어 주변의 도움을 요청했다. 아리가 원한 이혼과 아리의 안전은 별개의 문제였다. 그걸 너무 늦게 알았다.

아리는 가까운 호텔에서 현금으로 방을 잡았다. 젖은 옷을 갈아입었다. 방 안은 조용했다. 아무도 사랑을 증명하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그런데 조용하다고 고통까지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새벽 여섯 시 무렵, 아리는 다시 호텔을 나왔다. 오래 쌓인 절망이 판단을 흐리게 했고, 그 뒤로 돌이키기 어려운 사고가 일어났다.

아침 아홉 시, 윤조에게 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윤아리 씨 보호자분 맞으십니까? 환자분이 크게 다치셔서 응급 치료 중입니다.”

윤조는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살아 있습니까?”

그것만 물었다.

병원에서 윤조는 떨리는 손으로 보호자 서류에 서명했다. 아리는 수술 중이었다.

수술은 무사히 끝났다. 그러나 아리는 깨어나지 않았다. 의료진은 의식 저하의 원인을 계속 확인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윤조는 그 말을 머릿속으로 수십 번 되풀이했다. 끝났다. 하지만 깨어나지 않았다.

그는 중환자실 앞에서 사흘을 보냈다. 팀에서는 다음 그랑프리 일정을 확인해달라는 연락이 왔다. 그는 이번 경기에 나갈 수 없다고 알렸다. 순위도 트로피도 아무 의미 없었다.

그렇다고 아리의 고통이 그제야 중요한 것이 된다는 사실까지 지워지는 건 아니었다.

면회가 허락될 때면 그는 침대 옆에 앉았다.

“여보. 나 왔어.”

대답은 없었다.

“비 온다. 당신 비 오는 날 좋아하잖아.”

여전히 대답은 없었다.

“내가 잘못했어. 당신이 힘들다는 말을 그렇게 많이 했는데, 듣기 싫어서 피했어. 나도 힘들다는 말로 당신 입을 막았어.”

그는 처음으로 ‘나도 힘들었다’ 뒤에 ‘그래서 미안하다’를 붙였다.

열흘째 되던 날, 아리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윤조가 간호사를 불렀고, 잠시 후 아리의 눈이 천천히 열렸다.

“여보. 나 보여?”

아리는 한참 그를 바라봤다.

“……누구세요?”

윤조는 손을 놓았다.

“나야. 윤조.”

“죄송한데, 저 아세요?”

아리는 자기 이름은 알았지만 최근 기억은 혼란스러웠다. 남편이라는 남자는 기억나지 않았다. 담당 의사는 외상과 극심한 스트레스 이후 나타날 수 있는 기억 문제를 평가하고 있다며, 지금은 억지로 기억을 떠올리게 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윤조는 병실로 돌아와 말없이 서 있었다.

“정말 제 남편이에요?”

“응.”

“그런데 왜 하나도 기억이 안 나죠?”

그 질문에 윤조는 대답할 수 없었다.

“죄송하지만 나가주실래요? 좀 무서워요.”

윤조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나가려다 뒤돌아봤다. 아리는 경계하는 눈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예전에는 자신을 보면 웃던 여자였다. 이제는 가까이 다가가는 것조차 허락받아야 했다.

윤조가 나간 뒤 아리는 약지에 걸쳐진 반지를 발견했다. 손가락이 부어 꽉 끼었고, 무엇보다 남의 물건처럼 어색했다. 간호사의 도움을 받아 반지를 빼서 수납장 위에 올려놓았다.

그건 아리에게 아무 의미 없는 금속이었다. 윤조에게는 한때 당연히 제 것이라 믿었던 자리였다.

오후 세 시, 아리는 병실 밖으로 나왔다. 깁스한 다리로 몇 걸음 옮기기도 힘들었지만 창밖이 보고 싶었다. 무엇보다 딸기우유가 먹고 싶었다. 왜 하필 딸기우유인지도 몰랐다. 그냥 그 맛이 떠올랐다.

복도에서 아리를 본 윤조가 걸음을 멈췄다.

“어디 가려고?”

“매점이 어디 있어요? 딸기우유 사려고요.”

윤조의 얼굴이 굳었다. 기억을 잃기 전에도 아리는 편의점만 가면 딸기우유부터 찾았다. 그는 그걸 유치하다고 놀리면서도 늘 하나를 더 사곤 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함께 편의점 가는 일조차 없어졌다.

“1층인데, 지금 내려가긴 힘들 거야. 내가 사다 줄까?”

“괜찮아요?”

“응.”

“그럼 돈은 드릴게요.”

윤조는 아무 말도 못 했다. 돈을 줄 필요 없다고 말할 자격조차 낯설게 느껴졌다.

그는 딸기우유 두 개를 사 왔다. 빨대도 두 개 챙겼다. 아리는 우유를 받아 들자마자 빨대를 꽂았다. 예전과 똑같았다.

“맛있어?”

“네. 맛있네요. 얼마예요?”

“됐어.”

“아뇨. 모르는 사람한테 공짜로 얻어먹는 건 좀 그렇잖아요.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어요?”

모르는 사람.

윤조는 그 말을 속으로 따라 했다. 서운하다고 할 수 없었다. 아리가 잊어버린 13년을 자기 말 몇 마디로 되돌릴 수 있는 건 아니었다.

“600원.”

“네?”

“반값. 나도 하나 샀으니까.”

사실 영수증에는 우유 한 개에 1,200원이라고 적혀 있었다. 윤조는 두 개 다 아리에게 주려던 참이었다.

아리가 환자복 주머니를 뒤졌다. 아무것도 없었다.

“아, 저 지금 지갑이 없는데…….”

“나중에 줘.”

“꼭 드릴게요.”

“그래.”

갚겠다는 건 우유값이지 사랑이 아니었다.

두 사람은 나란히 병실로 돌아갔다. 윤조는 아리의 느린 걸음에 맞췄다. 예전 같았으면 답답하다며 먼저 걸어갔을 것이다. 지금은 서두르지 않았다.

“그쪽은 왜 병원에 있어요?”

아리가 물었다.

“누가 아파요?”

윤조는 잠깐 멈췄다.

“응. 내가 아끼는 사람이.”

“많이 아픈가 봐요.”

“많이.”

“빨리 나았으면 좋겠네요.”

윤조는 눈을 내리깔았다. 상처 입힌 사람은 자신인데, 그걸 기억하지 못하는 아리에게 위로받는 게 부끄러웠다.

병실 문 앞에서 아리가 돌아섰다.

“딸기우유 고마웠어요. 돈은 꼭 갚을게요.”

“그래. 천천히.”

윤조는 문을 열어주고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침대 옆 수납장에는 아리의 반지가 놓여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다시 끼워줬을 것이다. 그게 부부니까, 당연히 그래도 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반지를 끼울지 말지는 이제 아리가 결정할 일이었다. 기억이 돌아와도 그 선택은 달라지지 않는다.

“잘 자.”

윤조가 말했다.

아리가 벽시계를 힐끗 봤다.

“지금 오후 세 시인데요?”

윤조는 멋쩍게 웃었다.

“그러네. 푹 쉬어.”

문이 닫혔다.

그는 문밖에 한동안 서 있었다. 수십 번의 사과보다 중요한 게 무엇인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아리가 돌아오도록 설득하는 게 아니라, 아리가 자신 없이도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방해하지 않는 것. 그리고 언젠가 기회가 생긴다면 말이 아니라 달라진 행동으로 바카라임을 지는 것.

병실 안에서 딸기우유 빨대가 바닥을 긁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윤조는 그 소리를 듣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었다. 주머니에는 두 번째 딸기우유가 그대로 있었다. 우유 한 개에 1,200원. 그런데 아리에게는 600원이라고 했다.

그 돈을 돌려받을 일은 없을지도 몰랐다.

괜찮았다.

처음으로, 무엇 하나 돌려받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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