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라는 이름은 누가 붙이는가

중국 최초의 황후 여태후

byHelia

여태후라는 이름을 들으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는 ‘악녀’다. 중국 최초의 황후라는 기록보다 잔인한 복수로 더 유명한 사람. 남편의 사랑을 빼앗은 여인을 끔찍한 모습으로 만들어 버리고, 자신의 아들을 황제 자리에 지키기 위해 피바람을 일으킨 여자. 역사바카라은 그를 설명할 때 망설이지 않는다. 잔혹하다. 질투가 심하다. 권력에 미쳤다. 인간성이 없다.

그런데 《벌거벗은 세계사》 268회 〈중국 최초의 황후! 여태후는 왜 악녀가 됐나?〉를 보고 나면 그 익숙한 단어 앞에서 잠시 멈추게 된다. 여태후가 저지른 일을 옹호하고 싶어서가 아니다. 그가 가한 폭력은 아무리 불행한 과거를 꺼내 놓아도 정당화할 수 없다. 나 역시 척부인을 향한 복수와 어린 조왕 유여의를 제거하는 대목에서는 여태후에게 마음을 줄 수 없다. 상처받았다고 해서 다른 사람의 몸과 목숨을 자기 분노의 제물로 삼을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다만 한 가지는 묻고 싶다.

그는 정말 처음부터 악녀였을까.

유방이 천하를 얻기 위해 전쟁터를 떠도는 동안 여태후는 남겨진 가족을 바카라임진다. 남편이 영웅이 되는 동안 아내는 생활을 버틴다. 유방의 부모를 모시고 아이들을 돌보며, 남편이 벌여 놓은 전쟁 때문에 적에게 붙잡혀 옥살이까지 감당한다. 유방에게 천하 통일의 시간이 영웅담이라면 여태후에게 같은 시간은 기다림과 불안, 생존의 기록이다.

이 차이가 오래 마음에 걸린다.

한 사람은 밖에서 큰일을 한다는 이유로 가족을 떠나도 영웅이 된다. 다른 한 사람은 그가 비운 자리를 묵묵히 메우면서도 역사 속에서 이름조차 제대로 얻지 못한다. 유방이 전쟁에서 승리하면 모두가 그의 결단력과 배짱을 말한다. 그러나 그가 마음 놓고 싸울 수 있도록 가족을 돌본 사람이 누구인지는 중요하게 다루지 않는다. 승리는 남편의 것이 되고 기다림은 아내의 의무가 된다.

여태후는 조강지처다. 유방이 아직 황제가 되기 전부터 곁을 지키고, 그가 가진 것이 없을 때부터 함께한다. 그렇다고 두 사람의 관계가 아름다운 사랑으로 남는 것은 아니다. 유방은 황제가 된 뒤 젊고 아름다운 척부인을 총애한다. 여기 까지라면 흔한 권력자의 배신이라고 넘길 수도 있다. 문제는 단순한 외도가 아니다. 척부인의 아들 유여의를 황태자로 세우려 하면서 여태후의 아들 유영의 자리가 위태로워진다.

궁궐에서 남편의 사랑을 잃는 일은 마음이 상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황제의 총애는 곧 정치적 권력이고, 아들의 황위 계승은 어머니의 생존과 연결된다. 총애를 잃은 황후와 폐위된 황태자가 어떤 결말을 맞을지는 굳이 오래 설명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다. 여태후에게 척부인은 남편의 사랑을 빼앗은 여자이면서 동시에 자신과 아들의 목숨을 위협하는 정치적 경쟁자다.

그렇다고 여태후의 복수를 사랑에 상처받은 여성의 질투로만 설명하면 너무 단순하다. 나는 오히려 그 분노 안에 배신감과 생존의 공포가 뒤엉켜 있다고 생각한다. 아무것도 없던 시절부터 함께 버티고, 남편 대신 부모와 자식을 지키며 포로 생활까지 견딘 사람이 황제가 되자 자신과 아들을 버리려 한다. 여태후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희생이 모두 이용당한 것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솔직히 나라도 배신감을 느낀다. 화가 나고 억울할 것 같다. 내가 온몸으로 지킨 사람이 권력을 얻은 뒤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그 사람의 아들에게 내가 지켜 온 자리까지 주려고 한다면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동안 나는 무엇이었나”라는 질문이 들 것 같다. 함께 가난을 견딘 아내가 성공한 남편에게 가장 먼저 버려지는 이야기는 이상할 만큼 낯설지 않다. 시대만 달라질 뿐 지금도 비슷한 이야기는 반복된다.

하지만 이해할 수 있다는 말과 용서할 수 있다는 말은 다르다.

여태후의 상처는 이해한다. 그가 불안해진 이유도 이해한다. 그러나 그가 척부인에게 가한 형벌은 이해의 범위를 넘어선다. 여태후는 척부인의 팔다리를 훼손하고 감각을 빼앗은 뒤 ‘사람돼지’라 부르며 변소에 가둔다. 죽이는 것으로도 부족해 인간의 존엄을 완전히 무너뜨린다. 복수라기보다 상대가 더는 인간으로 존재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행위다. 척부인의 아들 유여의 까지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이 대목에서 여태후를 피해자로만 바라볼 수 없게 된다. 상처받은 사람이 반드시 타인의 상처를 이해하는 사람으로 성장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자신이 당한 고통을 더 잔인한 형태로 되돌려 준다. 여태후가 바로 그렇다. 그는 남편에게 버림받을 수 있다는 공포를 느꼈지만, 그 공포를 이겨 내는 방식으로 다른 여인과 아이를 파괴한다. 자신이 가장 싫어했을 법한 권력의 폭력을 결국 자신이 행사한다.

특히 척부인 역시 황제의 총애에 기대어 자기 아들을 황태자로 만들려고 했다는 점에서 완전히 순수한 피해자라고만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정치적 야망이 있었다고 해서 그런 고문을 받아 마땅한 것은 아니다. 권력 싸움에서 패배한 대가가 인간 이하의 모습으로 훼손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나는 여태후가 느낀 배신에는 공감하지만 그가 선택한 복수에는 단호하게 선을 긋고 싶다.

그런데 여기서 또 다른 불편함이 생긴다. 중국 역사에는 수많은 남성 권력자가 있다. 그들은 반대 세력을 숙청하고, 가족을 죽이며, 도시를 불태우고, 수많은 사람을 전쟁터에서 희생시킨다. 그래도 그들에게는 잔혹함만 붙지 않는다. 영웅, 정복자, 개혁가, 전략가라는 이름이 함께 따라다닌다. 사람을 많이 죽여도 나라를 세우면 건국자가 되고, 형제와 신하를 제거해도 권력을 안정시키면 뛰어난 정치가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여성이 권력을 쥐고 잔인한 행동을 하면 다른 업적은 순식간에 사라진다. 그는 정치가가 아니라 악녀가 된다. 남성 군주의 잔혹함은 시대적 한계나 권력 투쟁의 불가피함으로 설명되지만, 여성 권력자의 잔혹함은 질투와 광기의 결과로만 축소된다.

여태후가 잔인하지 않았다는 말이 아니다. 분명 잔인하다. 다만 같은 잣대가 모든 권력자에게 적용되고 있는지는 따져 볼 필요가 있다. 남성의 폭력은 정치가 되고 여성의 폭력은 성격이 된다. 남성이 적을 제거하면 결단력이라 하고 여성이 경쟁자를 제거하면 독하다고 한다. 남성이 자기 집안을 권력의 중심에 세우면 왕조를 안정시키려는 선택으로 해석하고, 여성이 친족을 등용하면 욕심 많은 외척 정치로 기억한다.

이 차이는 우연이 아니다. 역사를 기록한 사람도, 그 기록을 해석한 사람도 오랫동안 대부분 남성이기 때문이다. 권력을 쥔 여성은 기존 질서에 불편한 존재다. 여성이 통치하면 그 능력을 평가하기 전에 어떻게 권력을 얻었는지부터 의심한다. 남자를 유혹했는지, 질투했는지, 모성에서 벗어났는지를 따진다. 정치는 사라지고 사생활만 남는다.

여태후의 통치 역시 잔혹한 복수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는 유방이 죽은 뒤 사실상 한나라의 권력을 장악한다. 어린 황제와 무력한 황제 뒤에서 정국을 운영하고, 막 세워진 왕조가 흔들리지 않도록 질서를 유지한다. 진나라 말기의 전쟁과 초한쟁패를 거치며 백성들은 지칠 대로 지쳐 있다. 이런 상황에서 여태후는 무리한 전쟁을 벌이기보다 나라를 회복시키는 방향을 택한다. 백성의 삶을 안정시키고 생산력을 되살리는 정바카라을 이어 간다.

나라 전체의 입장에서 보면 그의 시대는 무조건적인 혼란기라고만 볼 수 없다. 궁궐 안에서는 피비린내 나는 권력 투쟁이 벌어지지만, 왕조는 유지되고 백성의 삶은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아간다. 바로 이 모순이 여태후라는 인물을 쉽게 판단할 수 없게 만든다. 한 사람에게는 끔찍한 가해자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나라를 운영할 능력을 가진 통치자다.

좋은 정치가였다고 해서 잔혹한 범죄가 사라지지 않는다. 반대로 잔혹한 일을 저질렀다고 해서 정치적 능력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되지는 않는다. 인간은 한 단어로 정리하기 어려운 존재다. 하지만 역사는 자꾸 복잡한 사람을 간단하게 만들려고 한다. 영웅 아니면 악인, 충신 아니면 배신자, 성녀 아니면 악녀. 그래야 외우기 쉽고 이야기도 재미있어진다.

《벌거벗은 세계사》가 흥미로운 이유는 바로 이 익숙한 이름에 다시 질문을 붙인다는 점이다. “여태후는 악녀다”라고 결론부터 주는 대신 “왜 악녀가 되었는가”라고 묻는다. ‘왜’가 붙는 순간 한 사람의 과거가 보이기 시작한다. 남편이 떠난 뒤 홀로 가족을 돌본 시간, 포로로 끌려가 생사를 넘나든 경험, 황후가 된 뒤에도 자신의 자리와 아들의 목숨이 언제든 사라질 수 있었던 공포가 함께 드러난다.

그렇다고 방송이 여태후를 무죄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의 삶을 처음부터 따라가면 선택의 바카라임이 더 선명해진다. 우리는 그가 왜 변했는지를 알 수 있지만, 그런 사정이 있다고 해서 모든 행동을 용납하지는 않는다. 그는 상처를 받았고 배신당했지만, 결국 자신도 다른 사람을 짓밟는 권력자가 된다.

나는 여태후의 삶에서 권력이 사람을 바꾸는 과정도 보지만, 정확히는 권력이 원래 안에 있던 공포와 분노를 키우는 모습을 본다. 아무 힘이 없을 때 그는 견디는 사람이다. 가족을 지키고 고통을 감당한다. 그러나 누구도 자신을 함부로 버릴 수 없는 힘을 얻자, 다시는 약자가 되지 않기 위해 주변을 제거한다. 그는 안전해지기 위해 권력을 붙잡지만 권력을 붙잡을수록 더 많은 사람을 의심한다.

권력은 불안을 없애 주지 않는다. 오히려 잃을 것이 생긴 사람을 더 불안하게 만든다. 여태후는 황후가 되고 태후가 되지만 마음까지 평안해지지는 않는다. 자신의 아들을 지키고 여씨 가문을 세우며 권력을 움켜쥔다. 그러나 그가 죽은 뒤 여씨 일족은 대대적으로 숙청된다. 그렇게 지키려고 했던 가문은 권력과 함께 무너진다.

이 결말은 씁쓸하다. 사람을 죽여 가며 만든 안전은 결국 안전하지 않다. 공포로 지킨 권력은 더 큰 공포가 되어 돌아온다. 여태후가 살아 있는 동안 사람들은 그를 두려워해 따르지만, 그가 사라지자마자 억눌렸던 적대감이 폭발한다. 그가 남긴 힘은 가족을 영원히 보호하지 못한다. 오히려 가족을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만든다.

나는 그가 조금 다른 선택을 할 수 없었을까 생각한다. 척부인과 유여의를 제거하지 않고도 자신의 아들을 지킬 방법은 정말 없었을까. 자신이 겪은 버림과 공포를 알고 있었다면 같은 두려움을 다른 사람에게 주지 않을 수는 없었을까. 물론 수천 년 뒤 안전한 곳에 앉아 당시의 권력 투쟁을 평가하는 일은 쉽다. 그 시대의 궁궐에서는 한 번 밀려나는 것이 곧 죽음을 뜻했을 수 있다.

그래도 사람은 결국 선택으로 기억된다. 환경이 잔혹했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같은 방식으로 잔혹해지는 것은 아니다. 여태후에게 선택의 여지가 전혀 없었다고 말하면 그것 역시 그를 하나의 인간이 아니라 시대에 끌려간 존재로 축소하는 일이다. 그는 상황에 당하기만 한 사람이 아니다.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며 권력을 움직인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능력을 인정하는 동시에 바카라임도 물어야 한다.

여태후를 보면서 나는 우리가 여성 권력자를 평가하는 방식도 다시 생각한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더 가혹하게 비난받은 부분은 분명히 걷어 내야 한다. 그러나 여성이라는 이유로 그의 잔혹함까지 대신 변명할 필요는 없다. 공정한 평가는 무조건 감싸는 것이 아니다. 남성 권력자에게 허용했던 폭력을 여성에게도 허용하는 것이 평등은 아니다. 오히려 모든 권력자의 폭력을 같은 기준으로 비판하는 것이 맞다.

유방 역시 냉정하게 다시 봐야 한다. 가난한 시절 자신과 함께한 아내에게 가족의 바카라임을 떠넘기고, 황제가 된 뒤 총애하는 여인과 그 아들에게 마음을 주며 후계 구도까지 흔든다. 그는 여태후의 분노와 불안을 키운 원인을 제공한다. 그런데 역사에서는 유방이 한나라를 세운 영웅으로 먼저 기억되고, 그 뒤에 벌어진 비극은 여태후라는 악녀의 이야기로 남는다.

참 편리한 결론이다.

남편이 만든 균열은 사라지고 아내가 일으킨 폭발만 기록된다. 유방이 가족을 어떻게 대했는지보다 여태후가 얼마나 잔인하게 복수했는지가 훨씬 오래 전해진다. 원인을 제공한 사람과 가장 끔찍한 결과를 만든 사람이 다르다는 이유로 모든 바카라임을 한쪽에만 몰아줄 수는 없다. 그렇다고 원인이 있었다는 이유로 결과의 바카라임을 없앨 수도 없다.

그래서 여태후는 내게 억울한 여자도, 타고난 악녀도 아니다. 그는 버림받을까 두려워하는 아내이고 아들의 자리를 지키려는 어머니이며, 권력의 구조를 읽고 움직이는 정치가다. 동시에 자신이 받은 상처보다 훨씬 잔인한 고통을 다른 사람에게 돌려준 가해자다. 이 얼굴들은 서로 지워지지 않는다.

한 사람 안에 피해자와 가해자가 함께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은 불편하다. 우리는 피해자는 끝까지 선해야 하고, 악인은 처음부터 악해야 마음이 편하다. 그래야 누구를 미워하고 누구를 불쌍히 여길지 쉽게 결정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의 인간은 그렇게 단정하지 못한다. 상처받은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잔인한 사람이 나라를 안정적으로 운영하기도 한다.

여태후의 이야기가 오래 남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를 이해하려고 가까이 다가가면 끔찍한 폭력과 마주치고, 비난하려고 멀리 밀어내면 그가 감당한 배신과 희생이 눈에 들어온다. 어느 한쪽만 보면 설명이 쉬워지지만 인간은 사라진다.

나는 여태후를 좋아하지 않는다. 특히 척부인과 유여의에게 가한 일을 생각하면 그를 멋진 여성 통치자로 포장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그를 그저 질투에 미친 악녀로만 부르는 데도 동의할 수 없다. 그런 표현은 그의 정치적 능력뿐 아니라 그를 그런 자리까지 몰고 간 유방과 당시의 권력 구조까지 모두 가려 버리기 때문이다.

그의 잔혹함은 비판해야 한다. 동시에 남성 권력자들의 잔혹함도 같은 목소리로 비판해야 한다. 여태후만 악녀의 전형으로 세워 놓고 더 많은 사람을 죽인 남성 군주를 영웅으로 부르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 잔인함에는 성별이 없다. 권력욕에도 성별이 없다. 정치적 능력 역시 성별로 결정되지 않는다.

방송을 다 보고 나서 여태후라는 이름 옆에 어떤 말을 붙여야 할지 생각한다. 악녀라는 단어 하나로는 부족하다. 최초의 황후라는 영광스러운 표현만으로도 부족하다. 그는 살아남기 위해 버티고, 권력을 얻은 뒤에는 타인을 짓밟으며, 나라를 운영하면서도 사적인 원한을 놓지 못한 사람이다.

나는 그를 ‘상처를 권력으로 바꾼 사람’이라고 기억하고 싶다. 문제는 그 권력이 자신을 지키는 방패에서 멈추지 않고 다른 사람을 찌르는 칼이 되었다는 데 있다. 상처는 사람을 설명해 줄 수 있지만 면죄부가 되어 주지는 않는다.

여태후는 왜 악녀가 되었을까.

배신당해서, 살아남기 위해서, 아들을 지키기 위해서, 권력의 맛을 알아서. 아마 그 모든 이유가 조금씩 섞여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 선택은 결국 여태후 자신의 몫이다. 그 선택까지 시대와 남편에게 돌릴 수는 없다.

다만 우리가 그를 악녀라고 부르기 전에 한 번쯤은 물어야 한다. 같은 일을 한 남자에게도 우리는 똑같은 이름을 붙였는가. 그의 잔혹함만 기억하는 동안, 그가 견딘 시간과 나라를 운영한 능력, 그리고 비극의 씨앗을 뿌린 다른 사람들의 바카라임을 너무 쉽게 지워 버린 것은 아닌가.

역사는 여태후를 악녀로 기록한다. 나는 그 기록 옆에 작은 문장을 하나 덧붙이고 싶다.

그는 악녀이기 전에 사람이었고, 사람이기에 이해할 부분과 끝내 용서할 수 없는 부분을 동시에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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