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끼다 다다르는 곳
매일, 가끔, 띄엄띄엄, 또는 어쩌다 한 번씩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글을 쓴다. 나도 그렇다. 한 때 매일 쓰다가 가끔 들르다가 지금은 띄엄띄엄 발행을 하고 자주 멈칫거린다. 두려운 행복이다.
남의 글을 훔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훔치고도 그게 잘못인 줄 모르는 사람들에 대한 무용담이 무겁다. 영감을 얻었을 뿐이에요. 누가 봐도 특이한 소재, 누가 읽어도 비슷한 스토리라인, 원작자와 표절자가 확실한 상황에도 하늘 아래 새로운 게 뭐 있냐며 힘 겨루자 한단다. 그게 어디 겨루기 대상인가.
매년 신문에 등짝만 한 이름이 발표되면, 많이 팔리는 유명 작가가 되면, 인기 있는 시나리오 작가가 되면, 문예지 등단을 하고 나면 더 바카라임감 있고 더 열정적인 작가가 될 거다, 읽거나 쓰는 사람 대부분 그럴 거라 믿는다. 나도 그렇게 믿어 왔다, 부러움까지 얹어 가면서.
하지만 글 쓰는 사람들 사이에 인정과 유명과 돈을 위한 스릴러가 횡행하나 보다. 이 또한 자본주의의 폐해다. 등급을 매겨 그 사이에 끼워 넣을 희생자를 찾는다. 등단하고 싶은 사람은 많고 등단하는 사람들은 극소수라 신규 등단자의 글쓰기 클래스에는 등단 욕망으로 들끓는 이들이 심장을 바친다.
작법 클래스, 비평 클래스, 개인 수업뿐 아니라 출판사도 신문사도 브랜드 지명도에 따라 이름을 올린 작가의 수나 유명세에 따라 수업료도 천차만별이다.
그럼에도 물심을 얹으며 배우며 어느덧 문우기 되어 글로 구하게 될 세상을 꿈꾸겠지 혼자 상상하곤 한다. 하지만 소재를 베끼고 때론 통째의 글이 다른 사람 이름으로 공표될 때 최소한 누구 하나의 삶은 죽음이 된다. 그게 원작자일지 표절자 일지 알 수는 없다. 고통의 가시성이 실제 그 강도와 비례하지 않을 수도 있다.
글을 쓰며 서로 위안하며 다정하게, 그런 슬로건을 걸고 꾸준히 글을 쓰는 곳을 찾는다. 너무 작은 구멍을 통과하려고 자신을 찢고 쪼개고 베어내고 자르는 고통을 감내하는 것이 글 쓰는 사람의 최선의 삶인가.
쓴 거보다 더 많이 읽는 사람이 좋다. 읽은 것에 마음을 얹어 나누는 사람을 더 좋아한다. 읽고 쓰는 것이 그 자신의 삶인 사람을 존경한다. 온라인에 쓰고 읽고 오프라인에 나누는 삶을 동경한다. 온오프 소통, 그게 참 어려운 시대에 산다.
그래서 소통하는 기척이 나는 곳을 응원하게 된다.
매번 궁해서 꾸준히 헤매면서도 글을 쓴다.
◇ 사진 from 막스 시덴토프 전시 (그라운드시소센트럴, 2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