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시간의 합

천 개쯤의 시작을 모두 더해보니

by수의서재

나로부터 소리로 세상에 던져진 단어들을 반드시 지나야 하는 숙명쯤으로 여긴다. 순수인지 욕망인지 애정인지 애증인지 사랑인지 집착인지 바람인지 중단인지 순응인지 도발인지, 그렇게 목록에 적어 둔 색깔들을 하나씩 꺼내어 하루를 산다. 그날 필요한 색을 고르는 일은 언제나 벅차다.


시작은 다채롭다. 내가 좋아하지만 실현이 가능하지 않을 것 같은 색깔, 샵샵에프에프이사공공의 온도를 지근하게 유지하며 하나씩 잘 해내고 싶다. 근질거리던 근육을 꺼내 쓰며 땀을 맛볼 때라 여긴다. 들어차 있던 상상으로 폭죽을 터뜨리고 싶다. 그런 저런 기대들, 자신에 대한 믿음 같은 거다.


모든 이상은 닿지 않는 그 무엇, 허상일 뿐, 상상의 도발일 뿐, 그러면서도 반드시 앞으로 나가야 할 힘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을 고되게 깨닫는다. 흐르던 땀이 마치 생명을 짜내어 쓰는 일처럼 힘겨운 노동이 되고 나면 스스로의 한계에 탄식한다. 체념은 눈물이 되고 용기는 어디로 숨었는지 비겁하게 우물거린다.


그래도 끝까지 자신을 붙들고 느리게 느리게라도 가는 건 중요하다. 그런 때 하나씩 시작을 세어 보고 시작의 색깔을 상기한다. 그것들의 초입에서 얼마나 기쁜 기대가 많았는지 마음을 다독이고 심장을 다시 두드린다. 그래서 내 삶이 여기까지 다다른 거다.


이루고 싶은 꿈의 색깔들, 하얗게, 푸르게, 올리브 그린을 지나가면서, 나만의 주홍색도 가슴에 새긴다. 하늘을 올려다보며 저런 스카이 블루도 좋겠다며 한 공간의 벽을 채운다. 반드시 그것이어야만 하는 고집이 다른 면의 시간을 채우는 여행이 된다. 피곤한 여로의 끝에서 현실을 채울 물감을 고른다. 힘을 기른다.


각오했던 일들이 마무리되고, 아집으로 다짐했던 집착을 놓아주고, 한바탕의 발작과 맹점들의 공황을 겪어 내면서도 그 시작의 흥분을 잃지 않는 것은 중요하다. 그런 것들이 다시 조금 더 용기를 내게 하기 때문이다.


매몰되어 허우적일 때는 그 힘듦의 모든 합이 어둠을 흡수한 색깔의 합인 검정에 가까울 줄 알았다. 하지만 각각 하나의 시작은 다양한 색깔의 빛이었다. 모든 것을 통과하고도 새롭게 태어나는 그 빛의 합, 투명한 흰색으로 나를 끌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려준 열 시간의 잠에서 깨어난 아침이다.


때로는 가지고 있던 모든 기운을 쏟아야만 하는 한계의 순간이 온다. 밤 동안 깊이 침잠하며 몰두한 잠은 그런 한계를 다시 리뉴얼하는 힘을 준다. 내 한계가 올 때마다 까만 죽음 같은 오랜 잠은 나를 다시 하얗게 새로 태어나게 한다.


늦은 오전, 느리게 똑똑 투명한 유리컵으로 떨어지는 커피를 바라보며 내가 최근 했었던 시작들의 다채로운 색깔을 떠올린다. 잘 잤다. 커피 향에 취하는 아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