밖에서 하는 것의 반만이라도

딸들한테 화내고 나서 씁니다 20.

by소년의 초상

남자들은 밖에서 하는 것의 반만이라도 집에서 하면, 100점이지 않을까 싶다.




남자들은 생존본능이 있다. 남자가 남자를 보면 경계를 하는 것도 이와 비슷한 맥락이다. 그 옛날 수컷이 수컷을 바라볼 때는 무리를 지키고 종족번식을 위함이 있었다. 이 때문에 남자는 어느 정도 공격성을 타고나는 것이다.


다만, 오늘날 먹고살기 위해서 회사 속에서는 이러한 본능을 철저히 억누르고 상사에게 조아리며 산다. 본능을 억누르고 생존을 위해 참다 보니, 집에 귀가한 남편은 방전되고 만다. 가족은 뒷전이다.


아이들은 이러한 사정을 모른다.


우리 천진난만한 자식들은 그저 아빠라는 존재가 밤늦게 집에 돌아와 나와 놀아주기만을 바랄 뿐이다. 본인에게 별로 잘해주는 것도 없지만, 마치 알 수 없는 미지의 존재에게 이끌리듯이, 혈연으로 이루어진 끈끈한, 그런 당연한 감정을 느끼며 아빠를 사랑해 준다.


그렇지만 이 무조건적인 사랑은 상호 노력이 없다면 유통기한이 짧은 식품에 불과할 뿐이다. 빨리 봉지를 터서 신선하게 요리를 해야 하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지만, 차일피일 미루다가 상해버리고 만다. 결국 모두에게 좋지 않다. 누구도 승자가 없다.




첫째에게는 관대한 양육방식을 취했었다. 그런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첫째는 여리여리, 여성스러운 구석이 제법 있다. 눈물이 먼저 나고 귀여운 그림을 그리는 아이. 여전히 아빠와 스킨십을 좋아한다. 미주알고주알 어떤 일이든 다 털어놓는다. 걱정이 없다.


서로 큰 소리가 오가지 않으니 감정선이 오르락내리락할 일도 없었다. 그래서 첫째는 순간 감정이 폭발하거나, 본인의 화를 주체하지 못하는 경우는 보지 못했다. 장단점이 있겠지만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첫째가 너무 키우기 편했던 것일까. 아니면 첫째라서, 귀한 첫 생명체라서, 무조건 이해만 해줬던 것일까. 이런 양육방식 때문에 첫째가 그늘진 잘못을 해도 그 그늘을 모두 치워버리기 위해 햇님이라도 따다 줄 정도로 사랑해 줬던 것은 아닐까?


둘째는 어떤가. 천방지축 파괴마왕.


둘째가 태어났을 때는 당연한 존재로 여겼다. 당연히 우리 가족의 일원이 되었고, 앞으로도 우리 가족의 막내 역할을 수행할 것으로 보이는 존재.


둘째 역시 첫째처럼 수월하게 클 것으로 생각했던 것일까? 너무 안일했다. 첫째가 너무 쉬운 아이였다. 둘째는 지극히 정상이었겠지만, 첫째에게 길들여진 우리는 둘째가 너무 힘들었다.


둘째 돌을 기념하여 제주도 여행을 갔을 때부터 밥상을 엎는 기이한 행동을 벌였을 때,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첫째는 이러지 않았는데, 왜 숟가락을 던지는 거지?'


이 띵한 마음은 나뿐 아니라 아내도 느꼈을 터이다. 물론 서로 말은 하지 않았다. 그때부터 알게 모르게, 둘째에 대한 프레임이 씌워졌다.


'보통이 아닌 아이.' - 장점으로 말하면 크게 될 아이. -


둘째가 첫째처럼 잘못을 해도 더 혼냈다. 더 큰소리로 혼내고, 맴매도 들었다. 첫째에겐 한 번도 하지 않았던 행동이다. 부모의 시선 때문에 첫째 역시도 둘째를 자주 혼내기도 했다. - 서로 편이 돼야 하는 것이 맞는데. -




둘째가 커갈수록 집안에 큰 소리가 자주 나기 시작했다. 실수로 숟가락을 떨어뜨려도, 손가락 힘을 주지 못해 실수로 스틱 꿀물을 흘려도, 큰 의자에 발이 걸려 넘어져도 호통을 쳤다. 안아주기 보다도 호통을 먼저 쳤다.


"넌 대체 왜 그래!"


"왜 일어나서 짜증부터 내는 거야. 말하는 방식을 바꿔. 그렇게 짜증내면 누가 좋아하겠어."


"흘리지 마. 실수도 잘못이야."


이 모진 말들을 당연히 내뱉었다. 여과 없이. 그냥 내가 보았을 때는 이상하니까. 꼬마의 눈높이에서 생각하지도 않고.


한 번 안아주고, 그래. 실수야. 그렇지만 안 흘려보게 노력해 보자. 짜증을 내기보다는 원하는 것을 말하는 습관을 들여보자. 이렇게 말해줄 수도 있었는데.


화는 화만 부른다. 화를 내다보면 결국 둘째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도 헷갈린다. 이런 실수들로 인해 아이를 등원시키고 하루 종일 마음이 아팠던 적도 많다. 그렇지만 또 돌아오는 감정. 도돌이표.




어느 날인가. 둘째와 함께 놀이터에서 놀고 있었다. 둘째의 어린이집 친구 여동생이 유모차에서 달랑달랑 웃고 있는 게 보였다. 둘째도 그 모습이 신기했는지 활짝 웃으며 뛰어갔다. 처음엔 신기하게 쳐다보더니 생후 8개월짜리 아이의 순수함에 무장해제되어 30분 동안 그 앞을 서성이며 놀아주었다.


나의 사고뭉치 둘째가 아이를 놀아주는 모습이 뭔가 이상했다.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나는 그저 아이를 잘 키워야 한다는 마음에 - 난 분명 잘하고 있다는 마음 - 둘째에게 단호한 태도를 취했었다. 혹독히 훈육했다. 아이가 힘들어하는 것을 알면서도 내가 아니면 누가 혼내나 싶어서 봐주지 않았다.


이런 마음은 되려 아이를 이해하지 않겠다는 선언과도 같았다. 아이의 입장이 돼 보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SNS에서도 많이 봤다. 그렇지만 정작 나는, 수컷의 본능으로 상대방을 이해하기보다는 지배하기 바빴다. 비록 그것이 내 자식이라도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그날, 그 시간. 그 따뜻한 햇살 아래서 웃고 있는 둘째를 보고 있자니, 무언가 내 마음속에서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 들었다. 요르단에 있는 거대한 성벽처럼 생긴 나무 문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그 공원에서 둘째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미세하게 웃어보았다. 둘째는 나에게도 미소를 주었다. 최근 들어 냉랭했던 부녀의 관계가 다시 회복되는 순간이었다. 그 순간부터 둘째를 조금 더 사랑으로 대했다. 무언가 잘못을 해도 실수라고 여기고 지적이 아닌 가르쳐 주려는 마음으로 대했다.


더 안아주었다. 번쩍 들어 안아보니 왠지 낯설었다. 내가 그동안 훈육이라는 명목으로 안아주지도 않았구나. 여전히 가벼웠다. 몸에 근육이라곤 없는 철저히 솜사탕 꼬마 아이였다. 오랜만에 맡아보는 손톱의 꼬순내도 달콤했다.


집에서도 흔들흔들 이불 바이킹을 자주 태워줬다. 코어 힘이 필요한 발 자전거도 빼지 않고 태워줬다. 구석에서 플러스펜으로 벽을 칠하고 있어도 웃어보았다. 노력을 한 것이다. 밖에서 상사한테 관계의 노력을 하듯이 그의 반에 반에 반도 아닌 마음만 써서 둘째를 대했다. - 귀찮을 뿐이지 마음은 진심이니까. -


조금의 노력으로 사랑을 표했더니 첫째와 둘째가 모두 아빠와 자겠다고 난리다. 더워 죽겠는데, 밤에도 아빠의 몸을 떠나질 않는다. 발끝이라도 몸을 대고 있으려고 한다.




나의 그간 불평불만들이 너무 하찮게 느껴졌다. 비록 둘째는 지금 4살. 2살 때부터 내가 주로 돌봐왔지만 그 모든 시간들을 되돌리고 싶었다. 훈육도 훈육이지만 사랑으로 키울걸. 밖에서 하는 것의 반에 반에 반만큼이라도 마음을 써서 대해볼걸. 이런 모든 감정이 솟구치며 내 빗장이 무너져 내린 것이다.


이제 다시 리셋이다. 아이는 아이처럼 키워야 한다. 그렇지만 당연히 부모 입장에서 화도 날 것이다. 그렇지만 이 화도 잘 다스리고, 아이의 마음을 이해해 주는 과정이 필요하다. 바깥 생활에서 관계에 대해 노력하는 것만큼은 아니더라도 조금의 수고를 들여 가정에서도 적용한다면 확 달라진다.


아내도, 아이들도, 나 자신도. 모두가 행복해진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 남자들은 밖에서 하는 것의 반만이라도 집에서 노력을 해야 한다. 당연한 것이라고 여겼다간 결국 상해버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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