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무엇에 기대어 살았나

열여덟 개의 다른 이야기가, 하나의 이야기였다.

by응시

이야기

한자리에 불러 모아 보면 이렇다.


상자를 쌓던 여자가 있었다. 뜯지도 않은 상자가 현관에 쌓여 갔다.


화면 속 숫자를 하루에 열두 번 들여다보던 남자가 있었다. 식구들 한가운데서 혼자였다.


주방에 서서 혼자 잔을 기울이던 여자가 있었다. 잠들려고 마신 게 아니었다.


잠시도 심심할 수 없어 손에서 화면을 놓지 못하던 여자가 있었다. 재미있어서 본 것이 아니었다.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하루를 색으로 칠하던 여자가 있었다. 붉은 칸을 보며 잠들지 못했다.


아프기 전에 미리 약을 먹고 나가던 여자가 있었다. 쉬라는 말이 제일 어려웠다.


다들 다른 사람이다. 산 것도 다르고, 붙든 것도 다르다. 그런데 나란히 놓고 보면 한 가지가 같다.


들여다보기

무언가를 자꾸 가져다 댔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빈 데를 물건으로 메우려 했다. 어떤 사람은 판돈으로, 어떤 사람은 사람으로, 어떤 사람은 술로 메우려 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메우지 않고 빈 데가 생길 틈부터 막았다.


방식은 달라도 하는 일은 같다. 무언가가 있어야 견딜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없으면 마주하게 되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


그러면 그 빈 데는 어디서 왔나. 열여덟 번을 돌아 이제 그것을 물을 차례다.


먼저 한 겹. 사람이 값으로 매겨지는 자리에서 왔다.

사람은 원래 값을 매길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값이 매겨진다. 얼마를 버는지, 어떤 자리에 있는지, 무엇을 가졌는지. 그러면 사람이 사람으로 있지 못하고 얼마짜리로 있게 된다.


그리고 값이 매겨지는 것에는 이상한 일이 따라온다. 값은 늘 견줄 수 있다. 견줄 수 있으면 순위가 생기고, 순위가 생기면 위가 있다. 그러니 아무리 올라가도 위가 있다. 채워지지 않는 것은 그래서다.


여기서 한 겹 더 내려가야 한다. 왜 그것이 그토록 아픈가.


기댈 데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사람이 자기 값으로만 서 있지 않았다. 누구의 자식이고, 어느 동네 사람이고,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이었다. 그 자리들이 사람을 받쳐 주었다. 값이 떨어져도 자리는 남았다.


그런데 그 자리들이 하나씩 헐렸다. 한 곳에 오래 다니지 못하게 되고, 동네가 사라지고, 곁에 오래 두고 보는 사람이 줄었다. 그러면 남는 것은 자기 값뿐이다. 값이 떨어지면 통째로 떨어진다.


그래서 사람이 자기를 늘 팔릴 만한 상태로 두게 되었다. 새벽에 일어나고, 뛰고, 배우고, 아파도 약을 먹고 나간다. 자기를 돌보는 일과 자기를 손보는 일이 구별되지 않는 자리가 여기다.


그리고 마지막 한 겹이 있다. 값으로 재려면 같은 자로 재야 한다. 그러면 자에 안 잡히는 것은 없는 셈이 된다. 남의 말을 오래 들어주는 것, 자기만의 걸음으로 가는 것, 쓸모없어 보이는 데 마음을 두는 것. 다 없는 셈이 된다.


그렇게 사람이 저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같은 줄에 세워진 등수가 되었다. 열여덟 편에서 다들 남들과 같아지려 애쓴 것은 그래서다. 얼굴이 비슷해지고, 하루가 비슷해지고, 사고 싶은 것이 비슷해졌다.


이 빈 데에는 이름이 있다. 소외다. 자기 삶에서 자기가 주인이 아니게 되는 일, 하는 일에서 자기가 빠져나가는 일, 곁의 사람이 사람으로 안 보이는 일. 그것이 열여덟 편의 밑바닥에 흐르던 것이다.


한 걸음 물러서서

여기까지 오면 물어야 할 것이 하나 남는다.


이 상처에서 누가 이익을 얻는가.


빈 데가 있는 사람은 좋은 손님이다. 채워지지 않으니 계속 산다. 그리고 무엇을 사도 잠시만 괜찮으니 또 산다. 그러니 이 시장에서 가장 나쁜 손님은 이미 충분한 사람이다.


그래서 도처에서 그 빈 데에 대고 판다. 물건을 팔고, 한 방을 팔고, 한 잔의 위로를 팔고, 잠시도 심심하지 않을 화면을 팔고, 더 나은 사람이 되는 법을 판다.


그리고 여기가 이 시리즈가 제목으로 삼은 자리다. 이 슬롯는 중독을 말리지 않는다. 권한다. 다만 어떤 것은 말리고 어떤 것은 권하는데, 그 갈림에는 규칙이 있다. 팔 수 있으면 권하고, 팔 수 없으면 말린다.


도박은 말리면서 투자는 권한다. 술은 광고하면서 마약은 잡는다. 굶는 것은 걱정하면서 마른 몸은 부러워한다. 절제하라 하면서 잠시도 심심할 수 없게 만든다. 그 규칙이 사람을 위한 것이었던 적은 없다.

그러면 마지막 손질이 남는다. 안 되는 사람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의지가 약한 사람으로 만들면 된다.


그러면 두 가지가 한꺼번에 해결된다. 상처를 낸 쪽은 아무 바카라임이 없어지고, 상처받은 사람은 아무에게도 따지지 않는다. 대신 자기를 탓하며 다음 것을 산다. 자기를 탓하는 사람만큼 조용한 손님이 없다.


열여덟 편에서 그렇게 애쓴 사람들이, 하나같이 자기가 부족하다고 여겼다. 그것이 우연이겠는가.


그러니 이 말만은 분명히 하고 싶다.


당신이 무언가에 기대어 여기까지 왔다면, 그것은 당신이 약해서가 아니다. 기댈 것이 그것밖에 없는 자리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자리를 헐어 놓고 기댈 것을 파는 곳에서, 사람이 무엇에도 안 기대고 서 있기는 어렵다.


다만 여기서 멈출 수는 없다. 뿌리를 알았다고 뿌리가 뽑히지는 않으니까.


그렇다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그것이 마지막 이야기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