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핑은 소유가 아니라 통제감이다"
이야기
누구에게나 자기가 한순간에 무너지는 일이 있다. 믿었던 사람의 배신, 오래 매달린 자리에서의 밀려남, 거울 앞에서 마주한 낯선 얼굴. 그날을 기점으로 그 전과 후가 다른 사람이 된다.
그 여자에게도 그런 날이 있었다. 그날 이후로 그 여자는 물건을 사는 순간에만 괜찮은 사람이 됐다.
결제 버튼을 누르고 나면 마음이 가라앉았다. 하루가 아무리 엉망이어도, 누르는 그 잠깐은 아직 자기가 멀쩡한 것 같았다. 무얼 샀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누른다는 것, 그게 중요했다.
이상한 건 그다음이었다. 택배가 와도 그 여자는 상자를 뜯지 않았다. 옷은 옷장에 걸리지 못하고, 그릇은 상자째 베란다로 갔다. 갖고 싶었다면 썼을 텐데, 쓰지 않았다. 그래도 다음 날 또 담았다.
그사이 살림이 무너졌다. 설거지가 밀리고 빨래가 쌓였다. 냉장고는 비어 가고, 아이는 알아서 끼니를 챙겼다. 무얼 살지, 언제 올지, 그다음엔 무얼. 하루가 거기서 다 갔다.
상자는 쌓이는데, 살림은 줄어 갔다.
이윽고 돈이 무너졌다. 카드로 카드를 막고, 또 한 장을 만들었다. 쌓인 건 뜯지 않은 상자뿐이었다.
들여다보기
그 여자에게 흔한 진단이 따라붙는다. 의지가 약한 사람. 분수를 모르는 사람.
틀렸다. 이건 의지의 문제가 아니다. 이름이 있는 병이다. 물건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사는 행위 자체를 멈추지 못하는 이 상태를, 강박적 구매(compulsive buying disorder)라 부른다. 도박을 못 멈추는 마음과 같은 자리에 있는, 행위 중독의 하나다.
이제 두 번 들어가야 한다.
먼저 한 겹. 그 여자가 채우려던 건 물건이 아니었다. 뜯지도 않았으니까.
자존이 무너진 자리에는 무력감이 들어선다. 아무것도 내 뜻대로 못 하는 사람이 됐다는 느낌. 그날 이후 그 여자의 하루가 그랬다.
그런데 물건을 사는 일만은 달랐다. 무엇을 살지, 어떤 색으로, 언제 받을지 전부 그 여자가 정했다. 누구의 허락도, 누구의 눈치도 필요 없었다. 손가락 한 번이면 세상이 그 여자가 정한 대로 움직였다. 주문하고, 결제하고, 받는다. 어긋나는 법이 없었다.
아무것도 내 뜻대로 안 되던 사람에게, 그건 통제감이었다. 내가 다시 무언가를 쥐고 있다는 감각. 그 잠깐 그 여자의 눈이 빛났다. 상품을 고르고 정하는 동안만은 활기가 돌았다. 결제 버튼을 누르는 순간만 다시 자기 삶을 모는 사람이 됐다.
누르는 그 찰나, 무언가 확 차올랐다. 무력하게 가라앉아 있던 몸에 생기가 돌고, 짧게 짜릿했다. 잃었던 주도권이 손끝으로 돌아오는 느낌. 도파민이 도는 그 순간에 그 여자는 못 멈췄다.
그런데 그 차오름은 오래가지 않았다. 결제가 끝나면 곧 꺼졌다. 상자가 채 오기도 전에 다시 가라앉았다. 그러면 또 눌렀다. 채우려는 게 아니라, 그 짧은 생기를 한 번 더 켜려고.
그러니 물건은 도착하는 순간 할 일을 다 했다. 필요한 건 상자 안이 아니라, 세상이 내 뜻대로 움직이던 그 잠깐이었다. 살려고 물건을 산 게 아니라, 물건을 사려고 살았다.
여기서 한 겹 더 내려가야 한다. 그 통제감이 그렇게 떠받쳐 주었다면, 왜 아무리 사도 자기가 서지 않았나.
그동안 자기라고 믿어 온 것이, 자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남편의 아내. 아이의 엄마. 남들 눈에 괜찮아 보이는 사람. 그 여자가 자기라 여겨 온 건 전부 바깥에서 매겨 준 값이었다. 누가 알아줄 때만 켜지는 불빛 같은 것. 그래서 자존이 무너지던 날, 자기가 사라진 게 아니다. 사라진 게 아니라, 처음부터 없었다.
게다가 그 통제감마저 빌려 온 것이었다. 정한다고 믿었지만, 어떤 상품을 고를지·얼마에·언제 올진 파는 쪽이 미리 깔아 둔 판이었다. 그 여자는 차린 상에서 골랐을 뿐이다. 세상을 내 뜻대로 움직인 게 아니라, 그렇게 느끼도록 짜인 길을 걸었다.
되찾았다고 믿은 그 통제권조차, 처음부터 자기 것이 아니었다.
정신분석가 하인츠 코헛(Heinz Kohut)이 이 마음을 평생 들여다봤다. 그는 어떤 자기는 바깥이 비춰 줄 때만 자기로 선다고 보았다. 그것을 빈 자기(empty self)라 불렀다. 빈 자기는 바깥에서 끝없이 무언가를 끌어와 자기를 메우려 한다. 안 그러면 자기가 흐려지니까.
그 여자가 끌어안은 건 그래서 상자가 아니었다. 기대야 할 사람이 사라진 자리에, 사람 대신 들어선 물건이었다. 위로받고 곁을 두고 싶던 마음이 결제 버튼으로 옮겨 갔다. 사람 사이에 오갈 것이, 사람과 상자 사이의 일이 됐다.
한 걸음 물러서서
여기서 물러서면 다른 그림이 보인다. 바깥이 비춰 줘야만 서는 자기—그걸 가장 잘 아는 쪽이 따로 있다. 파는 쪽이다.
원클릭. 새벽배송. 다음 날 문 앞에 놓인 상자. 모두 그 잠깐의 차오름을 빠르고 잦게 만든 길이다. 차오름과 꺼짐 사이를 좁힐수록, 더 자주 눌러야 하니까. 고민할 틈을 주지 않는다. 광고는 다정하게 말한다. 당신은 소중하니까, 당신을 위한 작은 선물. 비어 있다고 느끼게 하고, 메울 것을 바로 옆에 둔다.
그 빈 자기는 그 여자 혼자 만든 게 아니다. 누구의 아내, 누구의 엄마로 불렸지만, 제 이름으로 불려 본 게 언제였는지 그 여자는 떠올리지 못했다. 너는 그대로 충분하다는 말을, 세상은 한 번도 들려준 적이 없었다. 그렇게 비워 둔 자리에 대고, 세상은 끝없이 살 것을 판다.
상처는 한쪽에서 내고, 약은 다른 쪽에서 판다. 그러니 멈추지 못한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멈추지 못하도록 닦아 둔 길 위에 서 있었을 뿐이다.
당신도 어쩌면 알 것이다. 결제하고 나서 잠깐 괜찮아지던 그 마음을.
그건 당신이 약해서가 아니다. 자기라 믿을 것을 한 번도 제대로 가져 본 적 없이, 그래도 버텨 온 사람이 손 닿는 곳에서 찾은 위안이었을 뿐이다.
다만 하나만 같이 보고 싶다. 그 손이 정말 쥐려던 건 상자가 아니었다는 것을. 바깥이 비춰 줄 때만 켜지는 불빛 말고, 스스로 켜지는 자기가 당신 안에 있다는 것을. 그 손은 다른 것을 쥘 수도 있다. 누르는 손이 아니라, 무언가를 만들고 어루만지는 손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