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편 04 · 다른 곳은 더 싸게 해준다던데요

화학제품 100박스, 80만 원과 65만 원은 같은 조건의 운송일까

by핸섬데블

“다른 곳은 65만 원에 해준다던데요.” 화학제품 제조 D사가 다음 주 목요일에 출고할 포장제품 100박스의 운송 견적을 보낸 뒤다. 내가 협력 운송사와 확인해 제시한 금액은 80만 원이다. 계산표를 다시 열고 어느 항목에서 15만 원을 줄일 수 있을지 찾는다. 상대의 숫자가 어느새 오늘의 목표 가격처럼 보인다.


가격 비교를 받으면 거래를 잃을까 마음이 급해진다. 하지만 아직 비교한 것은 숫자 두 개뿐이다. 우리 견적에는 지정 시각 도착과 하차 인력 한 명이 포함돼 있다. D사가 말한 65만 원에도 같은 조건이 있는지는 모른다. 지금 단가를 내리면 비교가 끝나기도 전에 양보부터 정하게 된다.


15만 원을 내리고도 같은 일을 해야 한다면, 그 차이는 우리 부담으로 남습니다. 멤버십에서는 두 견적을 같은 조건으로 펼쳐 놓고, 가격을 유지하거나 조정하는 답장을 고릅니다. 필요한 문장은 ‘상황별 답장 20개 · 복사해서 쓰는 문장집’ 04번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앵커링에서 빌려올 질문


처음 접한 숫자에 이후 판단이 끌리는 현상을 앵커링이라고 한다. 갤린스키와 무스바일러의 2001년 협상 연구는 세 가지 실험에서 처음 제시한 가격이 최종 합의 가격을 강하게 예측했고, 먼저 제안한 쪽이 더 유리한 결과를 얻었다고 보고했다. 눈앞의 숫자가 이후 협의의 기준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S2]


그 연구가 지금 거래처의 의도를 알려 주지는 않는다. 이 사례에서 최초 제안은 우리의 80만 원이었고, 65만 원은 이후 전달된 비교 가격이다. 여기서 실무적으로 빌려올 질문은 하나다. “나는 포함 범위를 확인하기도 전에 65만 원을 목표 가격으로 삼았나?” 여섯 항목 비교표는 그 질문에 답하려는 이 원고의 제안이다. 비교표 자체가 실험으로 검증된 재앵커링 기법이라는 뜻은 아니다.


싼 견적은 확인할 정보다


화학제품이라는 이름만으로 같은 취급조건의 화물이라고 볼 수도 없다. 제품자료와 필요한 취급조건, 위험물 해당 여부와 운송상 요구사항을 화주·운송사와 먼저 확인한다. 확인한 제품과 포장 상태를 같은 기준에 놓은 뒤 가격을 비교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 제안의 과한 부분을 발견할 수도 있다.


실제로 같은 서비스를 더 효율적으로 제공하는 업체가 있을 수 있다. 다른 운송 건과 동선을 합치거나 해당 지역에 차량이 많아 원가가 낮을 수도 있다. 이 경우 우리 가격이 더 비싸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어느 부분까지 조정 가능한지 계산해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도착 시간이나 하차 조건이 달라 가격 차이가 날 수 있다. 거래처 담당자가 내부 예산 65만 원을 맞추기 위해 비교 가격을 협의의 출발점으로 제시했을 가능성도 있다. 어느 경우든 ‘정말 그런 견적을 받았느냐’고 진위를 따지는 것부터 시작하면 필요한 조건을 듣기 어려워진다.


경쟁사의 견적서 원본을 요구할 이유도 없다. ‘비공개 견적서를 보내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동일 조건인지 확인할 수 있도록 도착 시간과 하차 포함 여부를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라고 물으면 된다. 상대가 공유할 수 있는 범위에서 비교 항목을 맞추는 것이 목적이다.


숫자 옆에 여섯 가지 조건을 놓는다


제품과 포장·취급조건을 먼저 맞춘 다음 여섯 행을 쓴다. 구간·수량, 차량 조건, 도착 시간대, 상하차 범위, 대기·재방문, 부가세다. 가격은 표 위에 따로 적는다. 이 사례의 우리 조건은 100박스, 확인된 취급조건에 맞춰 견적에 기재한 차량, 목요일 오전 열 시 도착, 하차 인력 한 명 포함, 현장 대기 30분까지 포함, 부가세 별도다. 재방문은 별도 협의한다. 상차 담당 범위처럼 아직 명시되지 않은 항목은 양쪽 모두 확인해야 한다.


확인 결과 D사는 오전 열 시 지정 도착이 필요 없고, 확인된 취급조건에 맞춰 자체 인력으로 하차할 수 있다고 하자. 그 조건을 바꾸면 우리도 65만 원으로 운영 가능한지 운송사와 다시 계산한다. 가격을 낮추면서 기존 서비스는 모두 유지하는 것과, 필요 없는 서비스를 덜어 가격을 맞추는 것은 비용 구조가 다르다. 필요한 취급 절차까지 가격에 맞춰 생략하는 선택은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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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섬데블·최호순 | 무역·물류·영업 26년, University of Wisconsin MBA. 거래의 조건을 풀고, 소설로 인간의 선택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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