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일찍 휴대폰 화면을 켜 보니 밤이면 줄줄이 쌓여 있곤 하던 카톡 알림이 하나도 없었다. 도현과의 대화창은 어젯밤 멈춘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어 있었다. 엄지가 화면 위에서 한참 머물다가 내려왔다. 이불을 걷고 일어나 세수를 하고 지하철을 탔다. 4층 계단을 오르는 동안에도 숨이 차올랐다. 예전엔 3층부터 차던 숨이 언제부턴가 2층에서 차기 시작했다.
편집회의는 창가 쪽 낡은 탁자에서 열렸다. 다음 호 아이템이 한 바퀴 돌아 내 순서로 오자, 홍대 인디 소속사들 정산이 몇 년씩 밀린다는 얘기가 도는데 한번 파 보면 어떻겠냐고 했다. 체르팔이라는 이름은 입에 올리지 않았다. 편집장은 창밖을 보며 그 바닥 아는 사람을 손가락으로 꼽는 얼굴이었고, 대표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 바닥에도 사정이 있잖아. 광고 하나가 아쉬운 판에 굳이 어른들 건드릴 때는 아니지. 다음에 얘기하자고. 옆자리 동료가 삼각김밥 포장을 뜯다 말고 나를 쳐다봤다. 사정이 있다, 다음에 하자. 며칠 전 내가 일러스트레이터와 칼럼니스트에게 쓴 말과 똑같은 모양이었다. 같은 문장을 반대편에서 받아 보니 생각보다 매끈했다. 하려던 말을 꾸역꾸역 삼키고 수첩을 덮었다. 동료가 삼각김밥 하나를 슬쩍 내 바카라상 모서리로 밀어 놓고 갔다.
저녁에 도현의 카톡이 왔다. 밥은 먹었냐는 한 줄이었다. 정산 얘기는 둘 다 꺼내지 않았다. 그날 밤 옷장 맨 위 칸에서 신발 상자를 내렸다. 이사 때마다 못 버리고 끌고 다닌 상자였다. 뚜껑을 열자 오래된 담배 냄새가 배어 나왔다. 명함이 고무줄에 묶여 벽돌처럼 들어 있었다. 대부분 홍대 대형 클럽에서 일할 때 VIP 존 입구에 서서 받은 것들이었다. 돈 많은 사장님들과 연예인들의 손목에 팔찌를 채워 주던 자리였다. 손목을 내밀던 사람들은 내 얼굴을 보지 않았고, 명함은 얼굴 대신 권위를 들이밀던 물건이었다. 뒷면마다 볼펜 글씨가 있었다. 진저에일. 케이크와 초. 생일 3월. 새벽에 택시 잡아 줌. 약속 어기면 두 번 안 봄. 오빠라고 부르면 착각함. 술 취하면 진상. 절대 대화를 길게 잇지 말 것. 그때는 이런 걸 적어 두는 게 일이었다. 누가 뭘 마시고, 누가 뭘 싫어하고, 누가 얼마나 진상인지.
바닥에 네 무더기를 만들었다. 공연장, 방송, 브랜드, 연예인. 손이 알아서 움직였다. 방송국 작가 명함 하나에서 손이 잠깐 멈췄다. 몇 해째 통화 한 번 안 한 이름이었다. 옆으로 밀어 두었다. 쓸 일이 없을 것 같았다. 4년제 나온 애가 여기서 뭐 하냐는 말을 듣던 시절에 받아 모은 이름들이 방바닥 위에서 각자 자리를 찾고 있었다. 공연장 무더기에서 한 장을 뽑아 뒤집었다. 석호, 막내, 밥 잘 먹음. 고무줄 자국이 깊게 팬 명함이었다.
류서준은 이튿날 낮에 합정의 카페에서 만났다. 맥북을 펴 놓고 있었고 컨버스는 오늘도 낡은 자리가 정확했다. 지난번 뒤풀이에서 다른 밴드 소속사 얘기를 했다면서요. 내가 물었다. 제가요, 하며 서준이 웃었다. 술자리에서 한 얘기를 뭘. 저는 인디끼리 서로 힘들게 하는 게 제일 안 좋다고 봐요. 자본에 잡아먹히는 것도 걱정인데 안에서 싸우면 더 그렇잖아요. 인디 씬을 걱정한다는 그의 말이 커피잔 위로 매끈하게 굴러갔다. 더 묻지 않고 가방을 챙기는데, 서준이 아메리카노를 저으며 아무 일 아닌 얼굴로 덧붙였다. 근데 걔네는 공연장에서 정산서 받아서 확인해 보고 알았대요. 공연장에서 나간 돈이랑 받은 돈 맞춰 보고. 서준은 방금 뭘 내줬는지 모르는 얼굴이었다. 소문은 부지런히 나르면서 그게 어디에 가 닿는지는 보지 않는 사람이었다. 지퍼를 올리던 손이 멈췄다. 정산서, 하고 속으로 한 번 더 굴렸다. 고맙다고 하고 일어섰다. 서준은 뭐가 고마운지 묻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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