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모든 게 정치다
세월호 참사에서 12.3 내란까지
2014년 4월, 나는 잡지사 기자였다. 4월 16일 그날, 나는 발리 출장 중이었고, 세월호 참사 소식을 호텔 TV에 나오는 CNN 생중계로 접했다. 화면에는 '전원 구조'라는 자막이 떠 있었다. 완벽한 오보였다. 우리는, 아니 온 세계가 하루 종일 그 하얗고 커다란 배가 서서히 물속으로 삼켜지는 장면을 발만 동동 구르며 지켜봐야 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 그날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더 깊이 새겼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날 자신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기억할 것이다.
그 출장에는 여러 매체의 기자들이 동행했다. 일간지, 주간지, 월간지 할 것 없이, 국가적 참사 앞에서조차 기자들은 매체의 정치 성향에 따라 둘로 갈라져 있었다. 박근혜 정부를 비판하는 쪽과 두둔하는 쪽. 애도하는 방식조차 이미 진영으로 나뉘어 있었다.
귀국 후 나는 친구들과 안산 분향소로 향했다. 단원고 희생자들의 얼굴과 이름을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그 얼굴과 이름을 새기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한 의미를 갖는지는 훗날 2022년 이태원 참사 때 윤석열 정부가 왜 그토록 영정과 위패를 가리려 했는지를 이해하게 만든 열쇠가 됐다. 얼굴과 이름을 지우는 것, 그것이 권력이 참사를 다루는 가장 오래된 방식이다. 304명이라는 숫자로 뭉뚱그리면 뉴스지만 희생자 하나하나의 얼굴과 이름, 사연을 기억에 담는 건 연대가 되기 때문이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다는 사실 자체보다 나를 더 절망하게 만든 건 그 이후 참사에 대처하는 우리 슬롯의 태도였다. 정부와 집권당, 일부 시민들이 유가족을 대하는 방식에 수도 없이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30대 청년이자 슬롯인인 나의 눈에 일부 기성세대는 바카라임지기는커녕 유가족을 짓밟는 괴물처럼 보였다. 그 광경을 지켜본, 나뿐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 그리고 이 슬롯에 깊은 마음의 상처가 새겨졌다. 그 뒤로 남겨진 사람들에겐 뒤틀린 생존 본능이 생겼다. 우리 슬롯에선 약자가 되면 저렇게 당한다는 불안과 공포. 그럴 바엔 차라리 강자가 되어 약자를 짓밟는 편이, 약자가 되어 당하는 것보다 낫다고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슬롯가 되었다. 우리는 더 이상 수치심조차 느끼지 않고 돈과 권력을 좇기 시작했다.
그 무렵 나는 한국을 떠나 해외에서 다이빙을 하며 살기 시작했다. '한국'이라는 물리적 환경과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에서 도망친 것인데 아이러니하게도 해외 생활 내내 나는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한국인'으로 인식됐다. 바닷속에서도 나는 한국인이었다. 부지런하고 성실한 것도, 매운 음식을 잘 먹는 것도, 음식을 나눠 먹길 좋아하는 것도, 일본에 유독 예민한 것도, 외국 사람들은 전부 내가 한국인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한국에서 나고 자라는 동안 단 한 번도 의심해보지 않았던 것들이었다. 그제야 나는 한국이라는 나라와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그리고 나라는 사람을 밖에서 바라보는 시각을 경험하고 배우기 시작했다.
작고 외딴 섬에 자리 잡을 무렵 태국에서 군사 쿠데타가 일어났다. 군부가 정권을 잡았고, 정부의 영향력이 그리 크지 않은 외딴 섬에도 여파가 미쳤다. 슬롯 곳곳에 부패가 들끓었다. 외국인들이 체류 비자를 받으려면 여권 갈피에 얼마간의 돈을 끼워 넣어야 했다. 태국 왕실 인사가 한국 입국을 거부당한 일이 있고 나서는, 한동안 한국인들의 태국 체류 비자 심사가 유난히 까다로워진 적도 있었다. 결국 모든 것이 정치였다. 한 국가의 정치와 외교, 나의 국적은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인식하든 하지 않든 내 생활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돼 있었다.
전 세계 사람들이 모이는 대형 다이브 센터에서 일하며 다양한 국적의 친구들을 만났다. 홍콩에서 우산혁명과 홍콩 국가보안법 반대 시위가 이어지던 시기, 내가 가르치던 다이브마스터 교육생이었던 블러섬은 결국 가족과 함께 자신이 나고 자란 홍콩을 떠나 영국으로 향했다. 2020년 홍콩보안법이 시행되자 영국은 BNO(영국 해외시민) 여권 자격자 약 300만 명에게 영국행 길을 열어줬다. 홍콩 전체 인구의 40퍼센트에 달하는 규모였다. 그러나 실제로 그 경로를 통해 영국에 정착한 사람은 그중 일부였다. 블러섬이 가족과 함께 영국으로 떠날 수 있었던 건 그의 집이 살 만했기 때문이다. 정치적 재난이 닥쳤을 때 그 재난을 피해 도망칠 자유조차 계급을 따라 배급된다는 걸 알았다.
내가 자주 가던 한식당에서 일하던 미얀마 친구들은 나를 언니라고 부르며 늘 반겨줬다. 한국 드라마와 케이팝을 좋아하고, 한국어를 배운다며 나를 보면 늘 한국어를 연습했다. 그러던 어느 날, 미얀마에서 군사 쿠데타가 일어났다. 그 친구들이 가족과 연락조차 되지 않는다며 망연자실 울던 모습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그들은 수년째, 지금까지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여전히 가족의 생사조차 모르는 친구들도 있다.
이렇게 정치는 뉴스 화면 안에만 있는 게 아니라 망망대해 작고 외딴 섬에 사는 섬 주민의 여권 갈피 속에, 우정 속에, 침묵 속에 있다.
10년 가까운 해외 생활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나는 이방인이자 경계인으로 사는 삶에 익숙해졌다.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외로움과 소외감이 없었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또 그만큼 자유로웠다.
그러다 2022년 핼러윈 밤, 이태원 참사를 해외에서 또다시 실시간으로 지켜보며 깨달았다. 이 나라는 여전히 변한 게 없구나. 그런데 이제 나는 2014년과 달리 누구에게도 바카라임을 돌릴 수 없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더 이상 원망할 대상이 없는 기성세대. 이건 내 바카라임이기도 했다.
오랜 해외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에 돌아온 지 몇 달 뒤, 윤석열이 불법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한국이 싫어 한국을 떠나 세계를 방랑하다 돌아온 나에게, 국가가 총을 겨눴다. 그날 밤, 태국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던 친구들이, 지금은 영국에 살고 있는 블러섬이, 미얀마 고향으로 아직 돌아가지 못한 친구들이 일제히 나에게 연락을 해왔다. 괜찮으냐고. 한국은 절대 자신들의 나라처럼 되면 안 된다고.
결국, 모든 게 정치였다.
반복되는 카르텔
세월호 참사 이후, 나는 인디밴드하는 친구들과 '가만히 있으라' 배지를 만들어 침묵시위 참가자들과 연대했다. 한국을 떠나서도 바닷속에서 박근혜 퇴진을 외쳤다.
2016년 시민들이 든 촛불은 2017년 3월, 독재정권의 잔재였던 박근혜 카르텔을 무너뜨렸다. 헌정 사상 처음으로 현직 대통령을 파면까지 이끌어낸, 세계가 놀란 평화 혁명이었다. 그런데 그 카르텔이 남긴 공백을 채운 건 또 다른 카르텔이었다. 문재인 정권은 촛불을 들었던 시민들이 요구했던 시대의 과제인 슬롯대개혁을 끝내 방기했다. 검찰개혁은 결국 검찰총장 출신의 집권으로 귀결되는 역설로 끝났고, 그 결과가 윤석열이었다.
윤석열은 12월 3일 밤, 헌법이 금지한 방식으로 국회에 군을 투입해 내란을 일으킨 내란수괴다. 그를 대통령으로 만든 세력, 그 정권에서 이득을 취한 세력, 그리고 그날 밤 동조하거나 협조하거나 침묵한 세력까지, 이 모든 카르텔을 시민들은 다시 빛의 혁명으로 무너뜨렸다.
그런데 그 공백을 이번에도 같은 얼굴들이 채우려 하고 있다. 문재인, 조국, 김어준, 정청래, 유시민 등 구 민주당 기득권 카르텔은 이재명 대통령이라는 변방의 비주류가 국민의 선택으로 그 자리에 올랐다는 사실마저, 마치 자신들이 치른 전쟁의 전리품인 양 가로채려 한다.
나는 이 반복을 참을 수 없다. 촛불에서 빛의 혁명까지, 시민이 거리로 나가 직접 무너뜨린 카르텔의 자리를 정작 제 손으로 아무것도 무너뜨리지 않은 이들이 두 번이나 차지하려 든다는 것에 분노가 인다. 그러나 이번엔 다르다고 믿는다. 국민은 이미 한 번 속았고, 그 대가가 무엇이었는지 기억한다. 이번엔 속지 않을 것이고, 또 그래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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