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여라 돌멩이들아
인간은 언어로 사유한다
급식충, 한남충, 꼴페미, 영포티, 개저씨, 개줌마, 틀딱충, 진지충, 지방충 등등. 몇 가지 예일 뿐이다. 우리는 어느새 이런 꼬리표들로 사람들을 나눠 부르는 슬롯에 살고 있다. 문제는 이 꼬리표가 실제 만남을 대신해버린다는 데 있다. 이십대 남성 한 명, 노년의 이웃 한 명과 마주 앉아 이야기를 들어보는 대신, 우리는 그 단어가 이미 만들어놓은 이미지만 소비한다.
무려 한 세기 전 언론학자이자 칼럼니스트였던 월터 리프먼이 이 현상을 정확히 짚었다. 1922년 《여론》에서 그는 이것을 "머릿속의 그림들"이라 불렀다. 현대인은 세계를 직접 경험하는 게 아니라 세계에 대해 미리 그려진 그림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그 그림을 스테레오타입, 한국어로 고정관념이라 부른다. 직접 겪어본 적 없는데도 이미 다 안다고 믿게 만드는 그림이다.
그런데 지난주, 영상 하나가 내 고정관념을 흔들었다. 청년의 날을 기념해 2030 청년들을 직접 만난 이재명 대통령이 한 명씩 인사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 슬롯가 이기적이고 극우화되었다고 낙인찍은, '이대남'이라 불리는 남성들이 악수 대신 포옹을 하는 게 아닌가. 대통령을 보더니 와락, 크고 투박하게 안았다. 그냥 온몸으로 안았다. 아니, '안아줬다'라는 표현이 더 어울렸다. 아마도 전날 열린 대통령의 힘겨운 기자회견을 본 청년들의 위로가 아니었을까. 눈시울이 붉어졌다. 서로 다른 집단이 직접 만나 부대끼면 편견이 줄어든다는 심리학의 접촉 가설로 보면, 이건 우연이 아니다. 문제는 우리가 점점 만나지 않고, 단어로만 서로를 단정하고 오해하며 혐오한다는 것이다.
나는 언어로 사유하는 사람이다. 문장 하나를 쓸 때마다 수십만 개의 단어 중 왜 하필 이 단어를 골랐는지 스스로에게 묻는다. 그러니 남의 언어도 유독 잘 보이고 잘 들린다. 축복이라기보다 과잉에 가까운 예민함이다. 그런데 이 과잉이 최근 몇 달 나를 한 사람 앞으로 계속 끌고 갔다. 유시민이라는, 한때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지식인이었던 사람. 지금은 우리 공동체의 에너지를 비생산적이고 하등 가치 없는 일에 소진하게 만드는 슬롯의 해악.
정교하게 포장된 혐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사람이 내 채널 댓글에 멸칭 하나를 남기고 사라질 때, 나는 이상한 감각에 사로잡힌다. 마치 묻지마 폭행을 당한 것 같다. 가해자와 나 사이엔 아무 관계도 대화도 없다. 그저 그 순간 화면 저편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표적이 된다. 심리학에서는 이걸 온라인 탈억제 효과라 부른다. 익명성과 물리적 거리, 그리고 콘텐츠 제작자를 향한 왜곡된 친밀감이 합쳐지면, 실제로 자신의 얼굴과 이름을 드러내야 하거나 서로 얼굴을 마주했다면 절대 못 할 말이 손끝에서 쉽게 태어난다.
그런데 이 즉흥적인 폭력보다 훨씬 무서운 게 있다는 걸 알았다. 바로 정교하게 설계된 폭력이다.
유시민이 던진 말들을 시간순으로 늘어놓아 보자.
민주당과 조국혁신당의 합당이 불발된 후인 지난 3월, 매불쇼에 나온 그는 민주당 지지층을 자신처럼 가치를 좇는 'A그룹'과 자기 이익 때문에 이재명 대통령을 지지하는 'B그룹'으로 나눴다. 이른바 ABC론이었다. 6월에는 김어준의 다스뵈이다에 나와 자신을 비판하는 젊은 평론가들을 '촉법평론가', '용역평론가'라 불렀다. 촉법소년이라는 법률 용어를 가져다 바카라임 능력 없는 존재로, 철거 용역이라는 이미지를 가져다 젊은 신진 평론가들을 신념 없이 고용된 도구로 만들어버렸다. 7월에는 뉴이재명이라는, 원래 지난해 《한겨레》와 한국정당학회가 만든 중립적인 여론조사 용어를 가져다 '수장이 있는 세력', '배후에 이재명 대통령이 있다'는 음모론으로 뒤집었다. 그다음엔 이재명 정부를 향해 '어물전 비린내 썩은내가 난다' '반드시 실패할 것이다'라는 저주를 퍼부었다.
그리고 얼마 전, 그것도 이재명 대통령의 힘겨웠던 기자회견 이틀 뒤, 유시민은 문재인 정부 시절 '대통령의 구두', 장애인 고용 슬롯적 기업 브랜드로 유명해진 '아지오'를 소재로 한 탁현민의 유튜브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이재명 대통령 지지자들을 급기야 '신발 속 돌멩이'까지 빗댔다. 신발 브랜드를 주제로 한 프로그램에 출연했다고 '신발'을 비유로 억지로 끌어다 이재명 대통령을 비판하는 그 꼰대스러움과 비루함에 실소를 금치 못했다. 썸네일 문구가 '이런 신발 같은 세상'이었다. 반박할 가치가 전혀 없는, 비평이라고도 할 수 없는, 그저 소음이었다. 저들에게는 장애인 고용 슬롯적 기업 브랜드마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정치적으로 이용될 뿐이구나, 하는 씁쓸함도 함께 밀려왔다.
신발 속 돌멩이. 돌멩이는 판단도 이유도 없는 사물이다. 신발 속에 들어가면 그저 불편함을 유발하는 이물질일 뿐, 마땅히 빼내 버려야 할 존재다. 살아 있는 시민을 그 자리에 놓는다는 건, 시민들의 정치적 판단과 존재 이유를 지우고 그냥 성가신 잡음으로 축소해버리는 일이다.
슬롯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이걸 '상징 폭력'이라 불렀다. 지배는 몽둥이가 아니라 세련된 언어로 행사되며, 그 언어가 정교할수록 청중은 그걸 폭력이 아니라 통찰로 착각한다. 그런데 이 정교함은 매번 다른 소재를 만나도 결국 같은 자리로 도달한다. 즉흥이 흉내 낼 수 없는, 설계의 흔적이다.
이 정교함은 유시민 한 사람에게서 그치지 않는다. 김어준의 딴지일보는 이재명 대통령을 영화 《독전》의 마약왕이자 살인자에 빗대 '이선생'이라 부르고, 김민석 대표를 '김민새'라 부르고, 조국혁신당과의 합당을 반대한 이언주 의원을 '리박 언주'라 부른다. 노무현재단 이사 황희두는 이재명 지지층을 '뉴일베'라 불렀고, 박구용 교수는 '신손가혁'이라는 말로 같은 무리를 규정했다. 이름 대신 붙은 이 멸칭들은 하나같이 그 사람의 존재 자체를 우스꽝스럽거나 사악한 캐릭터로 축소한다. 반박할 사람이 아니라 조롱할 대상으로 만들어버리는, 유시민식 설계의 다른 버전들이다.
혐오의 말은 결국 물리적 폭력이 된다
혐오의 말은 결국 물리적 폭력이 된다. 지난 7월, 이언주 의원을 향한 딥페이크 음란 합성물이 유포됐고, 그 충격으로 의원이 입원까지 했다. 가해자는 '조국과 함께하는 사람들'이라는 모임에서 활동해온 60대 남성 기업인, 이중당적자였다. 서울경찰청은 그를 성폭력처벌법 위반과 모욕 혐의로 검찰에 송치했다. 그가 겨냥한 건 이언주 의원만이 아니었다. 이재명 대통령, 김민석 당대표, 송영길 의원까지, 소위 '친명'으로 분류되는 민주당 정치인을 향해 같은 종류의 합성물을 반복적으로 만들어왔다.
유시민, 김어준, 조국 카르텔과 딴지일보의 조롱이 인간을 사물로 만드는 '상징 폭력'이라면, 이건 그 상징 폭력으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실제로 한 사람의 몸과 존엄을 짓밟은 범죄다. 정도의 차이가 아니라 종류의 차이다. 그런데 유시민은 '신발 속 돌멩이'라는 말로 지지층을 대통령 곁에서 털어내라 요구할 만큼 단호하면서도 정작 자신과 가까운 진영에서 나온 이 끔찍하고 천박한 실제 범죄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누구의 말은 즉각 문제 삼고 누구의 범죄는 개인의 일탈로 흘려보낼지, 유시민은 마치 그걸 자기 혼자 정할 자격이 있는 사람처럼 군다.
누가 멸칭을 정하는가
문조털래유는 문재인, 조국, 김어준, 정청래, 유시민 다섯 글자를 딴 조어다. 김어준을 '털'로 표현했으니 멸칭이라는 주장인데, 김어준은 딴지일보 커뮤니티나 그를 아는 지인들 사이에서 언제나 '털보'라 불렸다. 엄연히 따지면 문조털래유는 멸칭이 아니라 약칭이다. 조선 왕들의 이름 첫 글자를 딴 태정태세문단세처럼. 나는 개인적으로 이들을 문조털래유보다 문재인, 조국, 김어준, 정청래, 유시민 등으로 연결된 '카르텔'이라고 부르는 것이 적확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얼마 전 조국이 나서 문조털래유라는 멸칭을 즉각 중단하라며 친명 진영에 강력히 요청했다. 이 반응은 심리학에서 다르보(DARVO)라 부르는 패턴과 닮아 있다. 부인하고, 공격하고, 가해자와 피해자의 위치를 뒤바꾸는 방식이다.
게다가 조국은 그 안에 자기 이름이 있는 당사자다. 그러니 이 중단 요청은 원칙의 선언이 아니라 자기 방어다. 유시민이 촉법평론가, 용역평론가, 어물전 비린내를 던질 때는 침묵하던 사람들이, 자기가 다섯 글자 중 하나로 불릴 때만 억울하다고, 피해자라고 하소연을 한다. 전형적인 나르시시스트의 특성이다.
조응천, 금태섭, 박용진, 김해영을 묶은 조금박해를 조롱과 비하, 비아냥의 수단으로 쓴 게 바로 유시민이었다. 이들은 2019년 조국 사태 당시 조국을 감싸는 흐름에 반기를 들었던 민주당 소장파였고, 유시민은 그 반대편에서 검찰 수사를 심한 오버라 규정하며 조국을 가장 열렬히 옹호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조금박해라는 약칭은 유시민이 감싸던 사람을 비판한 이들에게 되돌려준 멸칭이었다. 그는 《민들레》라는 매체에 '조금박해는 왜 그럴까'라는 제목의 칼럼을 시리즈로까지 쓴 바 있다.
정작 멸칭 중단을 요청해야 할 자리에서 목소리를 낸 건 김어준도 유시민도 조국도 아니라 이재명 대통령이었다. 기자회견에서 그는 진영 갈등을 화합으로 풀자며 멸칭을 쓰지 말자고 먼저 말했고, 다음 날 '대통령의 친구'라는 제목으로 소셜 미디어에 글을 올려 자신의 지지자들에게 자제를 당부했다. 자신을 향한 낙인은 참아 넘기면서 지지자들에겐 품격을 당부하는 사람과, 자기 이름이 낙인 안에 들어가니 오직 자신만이 피해자라고 소리치며 누군가를 좌표 찍고 폭력을 지시하는 사람. 이 대비가 이미 많은 걸 말해준다.
대통령의 기자회견 이후 조국은 소셜 미디어에, 진영 갈라치기에 앞장서고 비판자를 반명으로 몰아세운 청와대 참모진과 집권 민주당, 자칭 친명 평론가와 유튜버는 석고대죄해야 한다고 썼다. 정치인으로서 자신의 그릇이 이렇게나 작다는 걸 계속해서 스스로 증명하고 있는 중이다. 조국은 이전부터 자신은 이재명에게 옳은 소리를 하는 레드팀이자 충신(忠臣)이며, 이재명 정부에 호의적인 일부 기자, 비평가, 유튜버들을 간신(奸臣)이라고 말해왔다. 스스로 내로남불의 이미지를 계속해서 강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럴 때 보면 조국은 참 정무 감각도 없다. 그가 이렇게 물고 늘어질수록 문조털래유를 몰랐던 중도층조차 김어준, 유시민, 조국이 발끈한 반응을 보고 오히려 더 그 단어를 찾아보게 된다. 문조털래유 나무위키까지 생겼다. 그렇게 문조털래유라는 단어는 점점 더 대중 사이에 퍼진다. 감추려 애쓸수록 오히려 더 많은 사람이 그 존재를 알게 되는 현상을 스트라이샌드 효과라 부른다. 정무 감각이라 부를 만한 게 있다면 바로 이 파급을 읽는 능력일 텐데, 그 감각이 김어준, 유시민, 조국에게는 유독 결핍돼 있다.
나름의 계산이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대통령과 정면으로 부딪히는 구도 자체가 자신들을 범여권의 주요 플레이어로 격상시키는 길이라 여겼을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밀실이 아니라 실시간 검증의 시대다. 누가 대통령과 싸우는지가 아니라 누가 옳은 말을 하는지가 판단 기준이 된다. 게다가 조국은 이미 대법원 유죄 확정이라는 짐을 지고 있다. 사면복권되어 형 집행과 피선거권 박탈은 사라졌을지라도 대중들의 감각을 지울 순 없다. 김어준, 유시민, 조국은 좁은 우물 안에서는 이기고 있다고 느끼겠지만, 우물 밖에서는 계속 지고 있다.
화살을 옆으로 돌리는 자들
앞서 말한 유시민의 ABC론으로 돌아가 보자. A그룹과 B그룹으로 나눈 그 발언 직후, 친명 성향 커뮤니티에 'B준호', 'B언주' 같은 낙인이 퍼졌고, 지지층 내부가 서로를 색출하는 내전 양상으로 번졌다. 정작 화살이 향해야 할 내란 세력과 적폐, 구태 기득권은 이 소동 바깥에 조용히 남았다.
교육학자 파울루 프레이리는 억압받는 이들이 억압자를 직접 겨냥하는 대신 자기들끼리 서로를 억압하는 방식으로 그 폭력성을 발산한다고 봤다. 그는 이걸 '수평 폭력'이라 불렀다. 지배 계급의 삼각형에서 화살을 위로 쏘지 못하고 옆으로만 쏘는 이들이 우리 슬롯엔 많다. 그리고 유시민은 이를 이용한다.
유시민의 ABC론을 통해 일부러 이 수평 폭력을 발생시켰다. 그는 A그룹과 B그룹이라는 선만 직접 그었을 뿐, 그 선을 따라 서로를 색출한 건 민주당 지지층이었다. 그리고 정작 그 선을 그은 유시민은 소동이 벌어지는 동안 뒤로 물러나 있었다. 이게 바로 그가 교활하고 악랄한 이유다. 그는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는다. 자신이 촉발한 내전에 바카라임지는 대신, 마치 갈등이 이미 존재했다는 듯 관찰자로 자리를 옮긴다. 지배는 총칼이 아니라, 피지배 계층이 지배 질서를 자연스럽거나 심지어 자기가 선택한 것처럼 느끼게 만드는 문화적 동의로 유지된다.
유시민이 손을 떼도 이 분열은 저절로 굴러간다. 알고리즘과 클릭 경제가 정치적 의도 없이도 분노와 갈등이 체류 시간을 늘린다는 이유만으로 그 낙인을 자동으로 증폭시키기 때문이다. 유시민이 첫 문장을 던지고 발을 빼면, 김어준의 유튜브 뉴미디어 카르텔 시스템이 그 뒤를 대신 완성해준다.
왜 우리는 그의 말에 흔들리는가
정치적 언어는 사실을 전달하는 게 아니라 사고의 틀을 짠다. 촉법평론가라는 말은 촉법소년, 그러니까 형사 바카라임을 물을 수 없는 나이라는 법률 용어에서 나왔다. 유시민의 시각에선 한마디로, 어린 것들이 겁도 없이 까분다는 것이다. 이 용어로 누군가를 낙인찍어 버리면, 그 평론가가 실제로 무슨 주장을 했는지는 뒷전으로 밀린다. 누군가 그를 옹호하려 해도, 이 사람이 애초에 바카라임 있게 말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는 걸 먼저 증명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반박은 그다음 문제다.
공자의 정명 사상도 겹쳐 읽을 수 있다. 제자 자로가 정치를 맡으면 무엇부터 하겠느냐고 묻자, 공자는 반드시 이름부터 바로잡겠다고 답했다. 이름이 바르지 않으면 말이 이치에 맞지 않고, 말이 이치에 맞지 않으면 일이 이루어지지 않고,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예악이 흥하지 않고, 예악이 흥하지 않으면 형벌이 맞지 않게 되고, 결국 백성이 손발 둘 곳을 잃는다는 논리였다. 이름의 왜곡은 말과 일의 실패에서 그치지 않는다. 공동체가 함께 지키는 규범과,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가르는 기준까지 함께 무너뜨린다. 정명(正名)이란 이렇게 다스리는 사람이 이름을 실제에 맞게 바로잡는 일이었다.
유시민이 뉴이재명에게 한 일은 정확히 그 반대다. 원래는 지난 대선에서 이재명을 뽑지 않았지만 정부 출범 후 성과를 보고 지지로 돌아선 유권자를 가리키던 용어 뉴이재명을, 배후와 수장이 있는 불순 조직이라는, 실체와 전혀 다른 말로 비틀어버렸다. 이름을 바로잡는 게 아니라 거꾸로 어지럽힌 것이다. 그렇게 이름과 실제 사이의 틈이 벌어지면, 그 이름을 둘러싼 모든 말과 판단도 함께 어긋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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