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것들이 고개를 쳐들면 안 되는 나라

저들이 두려워하는 건 이재명이 아니라 다음 이재명이다

by조하나






목포상고, 부산상고, 소년공



대한민국은 여러 의미로 대단한 나라다.



목포상고, 부산상고, 소년공 출신이 대통령이 되는 나라다. 김대중, 노무현, 이재명이 대통령이 됐다. 학연, 지연, 혈연이라는 전통적 출세 장벽을 정규 엘리트 코스 없이 뚫고 올라간 사람들 말이다. 김대중은 목포상고를 졸업한 뒤 정치인이 됐고, 노무현은 부산상고 졸업이 학력의 전부인, 대학 문턱을 밟은 적 없는 순수한 고졸 대통령이었다. 이재명은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성남의 공장에서 소년공으로 일하며 팔에 영구 장애를 얻었고, 검정고시로 중졸과 고졸 자격을 딴 뒤 1982년 중앙대 법대에 입학해 1986년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이들이 대통령이 되는 과정은 마냥 드라마틱하고 낭만적이기만한 운명의 계시는 아니었다. 김대중은 그때가 네 번째 도전이었다. 1971년 박정희에게 90만 표 차로, 1987년에는 김영삼과 후보 단일화에 실패해 노태우에게, 1992년에는 다시 김영삼에게 밀려 세 번 낙선한 끝에야 대통령이 됐다. 1997년의 승리도 5.16 쿠데타 주역이었던 김종필과 손잡은 DJP연합, 이회창 후보 두 아들의 병역 기피 의혹, 이인제의 경선 불복 출마로 갈라진 보수표, 그리고 대선 한 달 전 터진 IMF 외환위기까지 겹친 결과였다. 이회창과의 표차는 겨우 1.6퍼센트포인트, 39만 표였다. 신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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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도 이 이변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1987년 6월 항쟁으로 직선제를 쟁취한 지 불과 11년 만에 목포상고 출신 김대중이, 다시 5년 뒤인 2002년에는 순수 고졸 노무현이 연달아 대통령이 됐다. 노무현 역시 정몽준과의 극적인 단일화가 선거 전날 밤 파기되는 초유의 사태를 겪고도 결국 이겼다. 군사독재가 무너진 지 한 세대도 지나지 않은 슬롯가 학벌 엘리트 코스를 완전히 건너뛴 두 사람에게 연이어 최고 권력을 맡긴 것이다. 한 번은 우연이라 쳐도 두 번은 우연이 아니다.







반대편의 계보도 있다. 독재자의 딸 박근혜, 검찰총장 윤석열은 태생부터 권력을 물려받거나 국가 시스템 안에서 가장 정통적인 엘리트 경로를 밟아 올라갔다. 이명박은 현대건설 출신 기업가로 청와대에 들어갔다가, 다스 자금 252억여 원 횡령과 삼성 등에서 받은 756만 달러 뇌물 혐의로 대법원에서 징역 17년을 확정받았다. 대기업의 논리로 나라를 경영하겠다던 사람이 나라를 사금고처럼 쓰다 감옥으로 갔다.



문재인은 다른 방식으로 이 흐름을 배신했다. 촛불혁명으로 민주당에서 누가 나와도 대통령이 될 수밖에 없던 시기에 그 자리에 올랐지만, 광장의 바람을 온전히 끌어안지 못하고 기득권과 적당히 타협하는 길을 택했다. 정권은 결국, 검찰총장 출신 윤석열에게 넘어갔다.



대한민국은 상고 출신 고졸 대통령을 뽑아 엘리트 카르텔을 흔들어 놓고, 독재자의 딸을 다시 청와대로 불러들이고, 기업 엘리트에게 나라를 맡겼다가 감옥으로 돌려보내고, 혁명의 기회를 쥐고도 흘려보내고, 검찰 수장을 곧바로 대통령으로 만드는 나라다. 그러다 87년 헌법 체제 초유의 내란이자 45년 만의 군사 쿠데타를 겪고는 소년공 출신을 대통령으로 뽑았다. 그만큼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학벌과 혈통이라는 카르텔에 대한 갈망과 반발을 동시에 품고 있다는 뜻이다.



이재명이 대통령이 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이 나라의 엘리트 기득권 계급주의자들에겐 위협이다. 상것들이 감히 고개를 쳐들면 안 되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하려는 이야기는 전부 이 한 문장을 증명하는 사례들이다.








호의를 권리로 아는 사람들



우리 슬롯엔 호의를 권리로 아는 이들이 많다. 영화 《부당거래》에 나오는 대사다. 호의가 반복되면 상대는 그걸 당연한 몫으로 여기게 되고, 나중에 그 호의를 고맙게 생각하기는커녕 더 큰 호의를 베풀지 않는다고 오히려 화를 내거나 배신자라 손가락질한다.



그렇다. 자신들을 이 나라의 민주 진보 진영의 대표 스피커와 지식인, 정치인이라 자처하는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재명 대통령의 지지율이 흔들리는 시기마다 이들은 어김없이 목소리를 높인다. 유시민은 이 대통령이 '모두의 대통령'이 되겠다는 목표는 바람직하지만 자신감이 지나쳤다고 지적했고, 지지층의 온도가 싸늘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김어준은 이례적으로 '코어 지지층'이 흔들리는 생소한 풍경이 펼쳐지고 있다며 대통령 지지율과 정당 지지율이 분리되는 신호는 위험하다고 경고했다. 조국은 '중도 확장을 위해 전통적 진보층 내부를 갈라놓는 방식이 맞는지 회의적'이라고 말했다.



이들은 대한민국에 대한 자신들의 지분을 주장한다. 자신들이 민주 진보 진영의 '코어'를 소유하고 있고 통제할 수 있다는 말을 서슴치 않고 뱉는다. 그리고 이재명 정부가 자신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코어 지지층이 빠져 정부 지지율이 하락한다는 식의 발언을 계속해왔다. 이건 사실상 협박이다. 우리가 지분을 갖고 있으니 대우해달라는 압박이다.



문제는 저들이 애초에 이재명에게 베푼 것도 그리 크지 않았다는 데 있다. 지금 저들이 빚쟁이처럼 요구하는 몫은 마치 자신들이 이재명을 대통령으로 만든 것처럼 거대하다. 촛불혁명으로 들어선 문재인 정권에서는 모든 시민의 공을 자기들 소수가 가로채 끼리끼리 전리품 나누고 등 따시고 배 불러 좋았을 것이다. 이재명 정권에서는 그게 안 되니 죽을 맛일 것이다. 실질적 기여와 체감하는 지분 사이의 간극이 벌어질수록 저들의 반응 수위는 점점 더 세진다. 기득권 카르텔이 작동하는 전형적인 방식이다.



이게 한국만의 병증은 아니다. 영국 토니 블레어 총리는 노동당의 슬롯주의 강령을 걷어내고 중도 노선으로 갈아탔다가 배신자 낙인을 얻었고, 세월이 흘러 최근에는 본인이 그 낙인을 찍는 쪽에 서서 스타머 정부를 비판했다. 브라질 룰라 대통령은 온건 노선을 택했다가 좌파 진영에서 배신이라는 반발을 받았고, 독일 메르켈 총리는 좌향좌 노선을 걸었다는 이유로 기민련 내부에서 사민화라는 낙인이 찍혔다. 그 불만이 쌓인 자리에서 극우 정당 AfD가 자라났다. 정당이나 진영의 핵심 지지 기반이 과거의 헌신을 영구적 지분으로 여기고, 지도자가 외연을 넓히려는 순간 그걸 배신으로 해석하는 건 좌우를 막론한 구조다.



다만 한국의 다른 점은, 유시민과 김어준 같은 선출되지 않고 결과에 대한 바카라임도 부재한 사람들이 당 내부 표결권 같은 물리적 권한이 아니라 매주 올라오는 유튜브 조회수로 여론을 움직이는 매체 권력이라는 것이다. 지분을 주장하는 방식조차 진화했다.








감출 수 있는 것도 특권



이재명을 겨냥한 공격은 논리적인 정바카라 비판으로까지 가지도 못한다. 그 대신 그의 가정사를 파고든다.



2018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경쟁 상대는 형수 욕설 녹음 파일을 다시 퍼뜨렸다. 실제 맥락은 이렇다. 이재명의 형은 어머니에게 심각한 폭언과 폭행을 저질러 법원으로부터 어머니 근처 100미터 접근금지 명령을 받은 상태였다. 이재명은 그런 형과 형수에게 화가 나서 욕을 했다. 인과관계로 따지면 그는 가정폭력 피해자인 어머니 편에서 격하게 반응한 쪽이다. 그런데 이 사건을 다룬 어느 온라인 게시글은 형제끼리 저러는 건 집안 내력이고, 형수 욕설이 유전자 단위의 선험적인 문제라면 저런 집안에 국가의 명운을 맡길 순 없다는 결론을 낸다. 원인과 결과를 지우고, 가난한 집안이라는 사실만 떼어내 이 집안은 원래 그렇다는 낙인으로 건너뛴다.



같은 잣대를 재벌가에 대보면 비대칭성이 선명해진다. 최태원 SK 회장은 2015년 혼외자를 공개하며 결혼생활이 파국을 맞았고, 9년을 끈 이혼 소송 끝에 올해 7월 노소영 관장에게 9440억 원을 지급하라는 판결을 받았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도 2009년 임세령씨와 이혼했는데 외도설이 돌았고 위자료로 1000억 원가량을 지급했다는 추정이 나왔다. 이재명 대통령은 김혜경 여사와 계속 혼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사실관계만 보면 훨씬 큰 흠을 가진 쪽은 최태원과 이재용인데, 그들의 이혼은 재산분할 액수를 둘러싼 스펙터클로 소비될 뿐 경영 능력이나 인격을 의심하는 근거로는 쓰이지 않는다. 이재명은 가난한 집 출신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의 가족사는 이재명이라는 사람의 자격을 부정하는 증거로 재소환된다.



이 차이는 경제력과 네트워크로 은폐할 수 있는 능력의 차이다. 돈이 있으면 변호사와 비밀유지 계약으로 가족의 문제를 관리할 수 있지만, 가난한 집안은 그럴 자원이 없어 갈등이 그대로 노출된다. 부유층의 가정불화가 적어서가 아니라 그들이 자신들의 치부를 감추는 기술이 발달해 있을 뿐이다. 그러나 한국 슬롯는 그 가시성의 차이를 본질의 차이로 착각한다.



가정사를 파고들기 시작하면 멀쩡한 집은 어디에도 없다. 대통령 관저든 재벌 자택이든 반지하 단칸방이든, 문을 열고 들어가면 저마다의 불화와 상처가 있다. 다만 그 문이 얼마나 두꺼운가가 다를 뿐이다. 이미 정당성을 의심받지 않는 자리에서 태어난 사람에게는 같은 크기의 흠집도 스캔들로 소비되고, 정당성을 계속 증명해야 하는 자리에서 시작한 사람에게는 자격 박탈의 근거로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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