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동하는 양심이 죽음의 바다에서 건져 올린 이름들

넷플릭스 영화 《2만 3천 명의 목숨》

by조하나

<스포일러 있습니다>






넷플릭스 신작 《2만 3천 명의 목숨》은 마르쿠스 골러 감독이 연출한 실화 기반 독일 영화다. 독일의 한 시민단체 '유겐트 레테트'(독일어로 '청년이여 구하라'는 뜻)의 실제 이야기에 기대고 있다. 해상 구조 경험이라곤 전혀 없던 베를린의 대학생 몇 명이 크라우드펀딩으로 돈을 모으고 기부를 받아 낡은 어선 한 척을 산다. 그 배에 '이우벤타'(청춘)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지중해로 나간다. 유럽으로 향하던 난민들이 물에 빠져 죽어가는 걸 정부가 조용히 외면하기로 한 바로 그 시점에, 이 청년들은 그 바다로 직접 가서 사람들을 구하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2016년부터 2017년까지 2만 3천 명이 넘는 사람을 건져 올렸다. 제목의 그 숫자는 선원들이 직접 세어 기록해 둔 숫자다.



그런데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2017년, 이탈리아 당국이 이우벤타호를 나포한다. 구호선 크루들은 밀입국 조직과 결탁했다는 인신매매 혐의로 기소된다. 유럽인권센터와 국제앰네스티가 시민 해상 구조 단체를 상대로 벌어진 재판 중 가장 길고, 가장 비싸고, 가장 광범위했다고 평했을 정도의 소송이 그렇게 시작된다. 재판은 2017년부터 2024년까지, 무려 7년을 끌었다. 이우벤타 혼자만 겪은 일이 아니었다. 같은 시기 유럽연합이 국경 통제 기구의 권한을 대폭 늘리면서, 2017년부터 2020년 사이에만 열일곱 척의 민간 구조선이 비슷한 법적 절차에 휘말렸다. 시민이 국가가 외면한 빈자리를 대신 채우는 걸 본보기 삼아 막으려는 움직임이었다. 이우벤타는 그중 가장 먼저, 가장 크게 걸려든 배였을 뿐이다.



작품 자체를 분석하자면, 9년에 걸친 실화를 112분에 눌러 담으려다 보니, 서사가 몽타주와 급격한 시간 점프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한계점은 분명히 있다. 한 해외 매체는 이 영화를 두고 삽화가 곁들여진 위키피디아 항목 같다고 썼다. 인물들이 마치 언론 인터뷰용으로 준비된 말을 하는 것처럼 들린다는 평도 있다. 다 맞는 말이다. 아홉 해를 두 시간 안에 구겨 넣으면 어디선가는 반드시 구겨지게 마련이다.



그런데도 나는 이 영화가 유의미했다고 생각한다. 서사의 완성도와는 별개로, 이 작품이 붙들고 놓지 않는 질문 하나가 있기 때문이다. 정부가 하기로 되어 있던 일을, 정부가 조용히 그만두기로 한 바로 그 순간에 시민이 대신 떠맡았을 때, 국가는 그 시민에게 무엇을 하는가. 이 글은 그 질문 하나를 따라가 보려 한다. 줄거리를 복기하는 대신, 이 질문이 지금 이 세계에서 어떤 얼굴로 반복되고 있는지를 짚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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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 옷을 입은 홍보 담당자와 파시스트의 이메일



영화 속에는 두 쌍의 대비가 있다. 하나는 주인공 루카스와 그의 여자친구 키티다. 루카스가 지중해에서 몸을 갈아 넣는 동안, 키티는 법학을 공부하며 커리어를 쌓고 유럽 곳곳에서 열리는 인권 학회를 다닌다. 위험한 바다에 몸을 던져 난민을 건져 올리는 사람과, 그 행위의 가치를 근사한 학회에서 세계 석학들과 둘러앉아 언어로 논하는 자리를 오가는 사람. 이 대비를 보면서 나는 씁쓸하고 부끄러웠다.



다른 하나는 이우벤타호 캡틴 비올라와 유겐트 레테트의 홍보 담당 도미다. '바다에서 사람 목숨을 구하는 나에게, 너는 명품 옷 따위나 신경 쓰냐'고 캡틴이 쏘아붙이는 장면이 있다. 그런데 도미의 자리에서 생각해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는 매일 파시스트들이 보내는 욕설로 가득한 항의, 협박 메일을 견뎌야 하는 사람이다. 후원자와 정치인 앞에서 신뢰를 얻어야 하는 사람이고, 그 신뢰를 얻기 위한 최소한의 장비로 그 옷을 입었을 사람이다. 몸으로 구조하는 사람은 언어의 노동을 가볍게 보고, 언어로 설득하는 사람은 몸의 소진을 온전히 알기 어렵다.



이 두 대비를 보며 나는 결국 내 이야기를 하게 됐다. 나는 종종 나 자신이 행동하지 못하는 양심은 아닌가 하는 자괴감에 빠지곤 한다. 몸을 던지는 것만이 진짜 행동이라는 감각, 그 앞에서 글이나 쓰고 앉아 있는 나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지는 순간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면 이 위계 자체가 의심스럽다. 목숨을 걸어야만 진짜 행동이라는 감각은, 어쩌면 몸을 던지는 소수를 소진시켜 침묵시키고 나머지 다수는 부족함을 느끼며 아무것도 하지 않게 만드는 데 가장 효율적인 구조일 수도 있다.



슬롯는 두 가지 노동 모두를 필요로 하면서도, 그 가치를 다르게 매긴다. 언어로 설득하는 자리는 대체로 안전하고, 이력이 되고, 때로는 존경받는 자리로 이어진다. 반면 몸을 던진 사람은 법정에 서고 피고인이 되고, 소진된 채로 남겨진다.



이 자괴감의 뿌리를 좀 더 정직하게 들여다보면, 사실 그 밑에는 경외심이 있다. 나는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사람들, 그러니까 낡은 어선 한 척을 사겠다는 결심을 실제 배 한 척으로, 2만 3천 개의 이름으로 바꿔낸 사람들에게 오래전부터 감화받아온 쪽이다. 행동하는 양심. 오래전부터 있어온 이 말이 가리키는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다. 그런 사람들은 스스로 발광체가 된다. 자기 몸을 태워 다른 이의 어둠을 밝히고, 그 빛을 본 사람들은 다시 그 에너지를 동력 삼아 저마다의 자리에서 앞으로 나아간다. 나 역시 그렇게 빛을 받아 여기까지 걸어온 사람 중 하나다. 그러니 이 존경심이야말로 자괴감의 진짜 뿌리였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렇게 스스로를 태워 빛을 낸 사람들에게, 정작 세상은 무엇을 돌려주었는지가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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