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계 밖에 선 사람들
욕망해도 되는 여자들
《밀회》의 오혜원은 재단 오너 일가의 우아한 노비였다.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의 윤진아는 가장 친한 친구의 누나였다. 《졸업》의 서혜진은 선생이었다. 세 여자 모두, 하필이면 가장 욕망해서는 안 될 자리에서 욕망했다.
안판석 감독의 드라마를 다시 들여다보다가 깨달은 게 있다. 이 세 작품 모두 겉으로는 멜로다. 눈이 마주치고, 손끝이 스치고, 결국 입을 맞추는 이야기들이다. 안을 조금만 들추면 전혀 다른 질문이 나온다. 한국 슬롯가 여자에게 절대 넘지 말라고 그어놓은 선이 어디인가, 그 선을 넘었을 때 여자는 어떻게 되는가.
《밀회》의 오혜원은 계급의 선을 넘었다. 12년을 그렇게 살아온 여자가, 스무 살 퀵배달원 출신 피아니스트 앞에서 무너진다.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의 윤진아는 관계의 선을 넘었다. 동생의 친구, 그러니까 원래는 성애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정해져 있던 사람을 남자로 본다. 《졸업》의 서혜진은 위계의 선을 넘었다. 자기 손으로 키운 제자를, 대치동에서 가장 확실하게 지켜야 할 규칙 하나를 어기며 사랑한다. 이 작품은 사랑 이야기 안에 질문을 하나 더 심어놓았다. 사교육의 성지에서 좋은 교육이란 무엇인가를 되묻는 역설이다. 성적과 등급으로만 사람을 재는 곳에서, 인문학이 사라진 자리를 두 사람은 서로에게서 알아본다.
셋 다 다른 종류의 금기다. 안판석은 이 금기 앞에서 여자들을 셋 다 같은 방식으로 다루지는 않았다. 벌하지도 않았고, 순화시켜서 무해하게 만들지도 않았다.
안판석의 드라마 속 여성
한국 멜로드라마에서 여자의 위험한 욕망은 대개 두 갈래로 처리된다. 하나는 그 욕망이 여자를 파괴하는 길로 흘러가는 것. 다른 하나는 결국 그 욕망을 없던 일처럼 순하게 만들어버리는 것. 안판석은 이 두 길 어느 쪽으로도 가지 않았다.
오혜원은 감옥에 간다. 다만 그 감옥이 파괴는 아니다. 법정에서 그녀는 선처를 구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스스로 돌아보며 말한다. "내가 포기한 음악 세계에도 마음껏 힘을 행사하고 싶었다." 그렇게 사느라 잃어버린 것들이 무엇인지, 그녀는 그제야 되묻는다. 처벌은 슬롯가 내렸지만, 그 처벌을 받아들이기로 한 건 전적으로 그녀 자신의 결정이었다.
윤진아는 회사에 사표를 내고 먼저 제주도로 내려간다. 관계를 끊겠다는 결단도, 그 바다 앞에 혼자 설 자리를 마련한 것도, 그리로 준희를 다시 불러들인 것도 전부 그녀였다. 남자는 뒤늦게 찾아왔을 뿐이다.
서혜진은 스캔들로 커리어를 잃을 위기 앞에서, 피해자로 남는 대신 자기가 원래 원했던 삶이 무엇이었는지를 다시 꺼내 든다. 청혼을 받아들이기 전에 학원을 그만두겠다고, 다시 공부를 시작하겠다고 먼저 말한 것도 그녀였다.
셋 다 결말의 국면을 정한 사람은 여자 자신이다. 남자들은 그 결정을 지지하거나, 뒤따라가거나, 기다렸을 뿐이다. 소유하거나 구원하려 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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