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가진 자와 몸을 가진 자
(스포일러 있습니다)
3시간 35분.
인터미션 15분을 포함한 영화 한 편의 상영 시간이다. 이 숫자 하나만으로도 관객은 영화를 보기 전부터 미리 각오를 해야 한다. 그리고 나는 이 영화를 보고 나서야 3시간 반이 넘는 러닝타임이 그저 야심의 과시가 아니라 영화의 태도, 그 자체였다는 걸 알게 됐다.
브래디 코벳 감독의 영화 《브루탈리스트》는 '서곡'으로 열려 '인터미션'을 사이에 둔 '1부'와 '2부'를 지나 '에필로그'로 닫힌다. 각 장에는 '도착의 수수께끼', '아름다움의 단단한 핵심' 같은 제목이 따로 붙어 있다.
미술관으로 치면 제1전시실, 2전시실, 그리고 따로 마련된 회고전 코너처럼 이름표가 걸려 있다. 인터미션의 길이는 15분으로 정해졌는데, 감독은 그 길이가 관객이 자리를 나가 화장실을 쓰고 돌아오는 데 걸리는 평균 시간이라고 밝혔다.
이 영화는 서사영화라기보다 현대미술관에 들어가 미술관 구석구석을 걸어다니며 작품 하나하나를 오래 감상하는 '경험'에 더 가깝다. 설명하는 대신 그저 존재하겠다는 선언이자, 관객에게 그 시간을 통째로 겪게 만들겠다는 계산된 배려다.
자유롭다고 믿는 자들의 노예 상태
그 서곡의 문을 여는 건 괴테에게서 가져온 한 문장이다. '스스로 자유롭다고 잘못 믿는 자들보다 더 절망적으로 노예 상태인 자는 없다.' 이 문장이 뜨자마자 화면에는 뒤집힌 자유의 여신상이 나타난다. 두 이미지가 붙어 있는 것 자체가 이미 하나의 해석을 강요한다. 미국이 약속하는 자유가 애초에 거꾸로 서 있다는 것, 그리고 그 거꾸로 선 자유를 자유라 착각하는 사람들에 대한 경고라는 것.
이 저주는 한 사람에게만 걸리지 않는다. 라즐로는 미국에 도착하며 마침내 자유로워졌다고 느끼지만, 실제로는 후원자에게 예술적 자율성부터 몸까지 종속되어간다. 후원이라는 관계가 겉으로는 기회처럼 보이지만 실은 새로운 형태의 속박이라는 걸 영화는 계속 보여준다.
그런데 백만장자 후원자 해리슨도 이 문장에서 자유롭지 않다. 부와 권력을 가진 그는 스스로 가장 자유로운 사람이라 믿을 텐데 실제로는 라즐로의 재능에 대한 열등감과 그걸 소유하려는 강박에 완전히 얽매인 인물이다.
더 나아가면 이 문장은 미국이라는 국가 자체에도 걸린다. 전후 미국은 스스로를 자유의 땅이라 부르지만, 그 자유는 이민자를 도구로 쓰고 그들의 노동과 예술을 흡수한 다음 정작 완전한 소속은 허락하지 않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스스로 가장 자유롭다고 믿는 나라가, 사실은 자신이 만든 위계와 배제에 가장 깊이 갇혀 있다는 아이러니다.
브루탈리즘, 폐허 위에서 태어난 양식
이 영화가 그리는 브루탈리즘은 2차대전 직후, 폭격으로 무너진 유럽 도시들의 폐허 위에서 태어난 양식이다. 값싼 콘크리트로 빠르게 다시 짓기 위한, 미학적 선택이기 전에 생존을 위한 선택이었다. 그런데도 등장하자마자 흉물스럽다는 비난에 시달렸고, 많은 건물이 지어지자마자 철거 대상으로 지목됐다.
감독은 이 지점에서 라즐로 토스라는 인물과 브루탈리즘 사이의 필연을 봤다. 이민자가 낯선 외모나 신념 때문에 배척당하는 것과, 브루탈리즘 건물이 지어지자마자 철거 요구에 시달렸던 것 사이에는 유사성이 있다. 전쟁 이전의 장식과 낭만을 더는 믿을 수 없게 된 사람들이 날것의 재료로 다시 짓기 시작한 게 브루탈리즘이었고, 홀로코스트에서 모든 걸 잃고 미국에서 처음부터 다시 자신을 세워야 했던 라즐로의 처지가 그 양식과 정확히 겹친다. 라즐로는 그저 자신이 배운 기능주의를 실천했을 뿐이지만, 그 신념이 놓인 역사적 좌표를 아는 관객에게는 이미 그 선택 자체가 그의 존재 조건에 대한 은유로 읽힌다.
정육면체를 설명하는 대신 만드는 사람
이 영화의 주인공 라즐로 토스는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아 미국으로 건너온 헝가리계 유대인 건축가다. 그는 부헨발트 수용소에서 죽지 않고 나왔지만, 그 사실을 아무리 말로 설명해도 믿어주는 사람이 없다. 그의 영어 발음은 영화 내내 조롱거리가 된다. 이 남자에게 언어는 애초부터 신뢰를 잃은 도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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