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인간임을 증명하시오

의심이 자원이 된 시대

by조하나


어느 일러스트레이터가 공모전에서 상을 받았다. 얼마 뒤 사무국에서 메일이 왔다. 당신의 그림이 인공지능(AI)으로 만든 것이라는 제보가 들어왔다고. 그는 작업 과정을 담은 영상과 겹겹이 쌓인 레이어 파일, 31시간이 찍힌 작업 기록을 제출하고 나서야 혐의를 벗었다. 그가 남긴 한 문장이 오래 걸렸다. 왜 내가 직접 그린 그림을, 내가 그렸다고 증명해야 하는가.





31시간을 제출하고도



한때 규칙은 이랬다. AI의 손을 빌렸으면 밝혀라. 밝히지 않은 사람이 문제였고, 의심은 그 사람의 몫이었다. 지금은 완전히 뒤집혔다. 밝히고 말고가 없다. 먼저 증명하라. 네가 사람이라는 것을. 무죄로 시작해 유죄를 입증받던 자리에, 이제 유죄로 앉혀두고 결백을 받아내는 절차가 들어섰다.



나는 영상을 만든다. 내가 원고를 쓰고, 내 입으로 말한다. 그런데도 댓글이 달린다. '이거 AI 아니야?' 얼굴을 내밀고 목소리를 내도 소용이 없다. 사람이 화면 안에서 직접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 더는 아무것도 보증하지 못하는 세상이다.



문제는 내가 인간이라는 증명에는 바닥이 없다는 것이다. 31시간짜리 작업 기록을 내밀어도, 그 파일마저 조작이라 우기면 되받을 방법이 마땅치 않다. 없음을 증명하는 일에는 끝이 없다. 법정에서 '악마의 증명'이라 부르는 그 구조가 창작을 하는 사람들에게까지 작용한다.



더 지독한 건 뛰어난 재능과 실력이 오히려 AI 생성물로 의심받는 데 확실한 증거가 된다는 점이다. 어느 나라의 한 일러스트레이터는 바카라 표지 한 장에 백 시간을 들였다가, 너무 잘 그렸다는 이유로 커뮤니티에서 쫓겨났다. 레이어 파일이라는 증거를 손에 쥐고도 해명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온라인에서는 'AI 의혹을 축하한다'는 말이 반쯤 조롱, 반쯤 훈장처럼 오간다. 잘 그릴수록 의심받는 세계에서는, 오래 갈고닦은 손이 도리어 자기를 고발하는 증거가 된다.





의심을 파는 사람들



의심하는 사람들을 그저 매정하다고 몰아세울 생각은 없다. 그들에게도 진짜 상처가 있다. 실제 도용이 있었고, 사람 행세를 하며 밝히지 않은 기계가 있었고, 뻔뻔한 사기가 있었다. 검증하라는 요구는 피해망상이 아니라 반복된 배신에서 자란 것이다. 나는 그 반사신경을 이해한다. 그런데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처방은 병보다 나쁘다.


우리가 서로를 법정에 세우는 동안, 누군가는 그 법정의 입장권을 팔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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