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현의 자유'라는 이름의 폭력

워싱턴 한복판에서 백인우월주의자들이 노예제 깃발을 들고 행진하는 세상

by조하나






그 여자는 카메라를 정면으로 보고 있었다



2026년 7월 4일. 미국이 태어난 지 250년이 되던 날.



한 흑인 여성이 워싱턴으로 향하는 지하철 안에 앉아 있다. 초록색 티셔츠를 입은 젊은 여자다. 그 주위를 하얀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남자 수십 명이 둘러싸고 있다. 백인 민족주의 단체 '패트리엇 프런트'의 회원들이다. 그들의 모자에는 파쇼의 상징이 박혀 있고, 손에는 성조기와 남부연합기가 들려 있다.



남부연합기가 무엇인가. 노예제를 지키겠다고 나라를 둘로 쪼갠 남부의 깃발이고, 그 뒤로는 KKK가 흑인을 나무에 매달 때마다 휘날린 인종차별의 문장이다. 그러니까 이 여자는 지금, 자신을 인간 이하로 여겨온 역사의 한복판에 혼자 앉아 있는 것이다. 그것도 미 건국 250주년 기념일인 2026년 7월 4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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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이터 사진기자 체니 오어가 이 장면을 찍었다. 사진은 순식간에 전 세계로 퍼졌다. 어떤 이는 퓰리처상 감이라 했고, 어떤 이는 앞으로 오랫동안 이 시대의 미국을 정의할 사진이 될 거라고 했다. 나는 그 말에 동의한다. 하지만 내가 이 사진에서 눈을 떼지 못한 이유는 따로 있다.



그 여자는 고개를 숙이고 있지 않았다. 몸을 웅크리지도 않았다. 카메라를, 그러니까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두려움이 없어서가 아니다. 도망칠 곳 없는 지하철 안에서, 얼굴을 가린 다수에게 에워싸인 채, 두렵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 침착함은 공포를 느끼지 않는 자의 것이 아니라, 공포를 느끼면서도 그것을 내주지 않기로 한 자의 것이다. 흑인 여성에게 이런 순간에 표정을 지키는 일은 오래된 생존의 문법이었다. 1957년 리틀록의 엘리자베스 엑퍼드가 그랬고, 2016년 배턴루지에서 무장 경찰 앞에 홀로 선 이에샤 에번스가 그랬다. 인간의 존엄이란 때로 이런 얼굴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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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의 자유'라는 이름의 폭력



같은 날, 트럼프 대통령은 미 건국 250주년 무대에 올라 '멸공'을 외쳤다. 뉴욕에서 민주슬롯주의 노선을 내세운 조란 맘다니가 시장에 당선되고 그 뒤를 이어 비슷한 성향의 정치인들이 잇따라 부상하자,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이 흐름 전체에 공산주의라는 낙인을 찍어두려는 발언이었다. 공산주의는 암과 같으니 빨리 잘라내야 한다고, 미국에 공산주의자들을 결코 원하지 않는다고 했다. 1950년대 매카시즘이 그랬듯, '낙인'과 '분류'는 통합이 아니라 분열을 부르고, 적을 지목하는 도구였다. 잘라내야 할 암 덩어리로 누군가를 부르는 순간, 그 누군가는 사람이 아니라 제거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다음 날, 내무부 장관 더그 버검이 방송에 나와 패트리엇 프런트의 행진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그들이 내세우는 가치에는 동의할 수 없지만, 미국의 근본 원칙은 "표현의 자유"라고. 명시적인 지지가 아니다. 규탄도 아니다. 원칙 뒤로 한 발 물러서는 화법이다. 그 한 발이, 얼굴을 가린 인종주의자들의 행진을 국가가 눈감아 준 하루로 만들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이지 않은가.



바다 건너 대한민국, 이곳에서도 똑같은 문장이 울려 퍼지고 있다. 배재고등학교 야구부 학생들이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조롱하는 응원 구호를 맞춰 외쳤다. 국가 폭력에 스러진 사람들을, 그 유족들이 아직 살아 숨 쉬는 도시의 비극을, 십대 아이들이 입을 맞춰 조롱했다. 야구부는 6개월 출전 정지 징계를 받았다.



그러자 대통령 직속 규제합리화위원회 부위원장 이병태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이 땅에 5.18이 성역이 됐다고. 발언을 근거로 처벌하는 것은 기본권의 부인이라고. 서울 한복판에서 "김일성 만세"를 외쳐도 허용되어야 한다고. 그가 반복해서 꺼내 든 단어가 바로 '표현의 자유'였다.



이 사람은 카이스트 명예교수 출신이다. 이재명 정부가 통합과 실용을 내세우며 보수 쪽에서 데려온 사람이다. 배웠다는 사람이, 지식으로 단련된 사람이, 그 지식을 광주의 상처를 다시 헤집는 도구로 썼다. 나는 마음 한쪽이 뻐근했다. 배운 사람일수록 폭력을 더 정교하게 포장할 수 있다는 사실이 사람을 더 지치게 한다.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표현의 자유는 원래 누구의 것이었나. 권력에 짓눌린 약자가 두려움 없이 말할 수 있도록 지키려고 만든 개념이다. 힘없는 자가 힘 있는 자에게 아니라고 외칠 권리다. 그런데 지금 이 개념은 정반대로 뒤집혀 쓰이고 있다. 다수의 힘을, 혹은 권력에 기댄 자들이, 소수와 피해자를 향해 혐오를 쏟아낼 권리로. 광주의 유족을 조롱하는 학생을 감싸면서 정작 그 유족의 자유는 한 번도 입에 올리지 않는 논리. 이것이 그 뒤틀림의 정확한 얼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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