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슬롯 혐오·조롱 문화의 실체
냉정과 열정 사이
2003년 2월, 대구 지하철 중앙로역에서 192명이 화재로 사망했다. 방화범은 뇌병변 장애가 있던 한 남성이었다. 2010년 3월, 백령도 앞바다에서 천안함 피격 사건으로 46명의 젊은 해군 장병이 수장됐다. 두 사건 모두 국가적 참사였고, 유가족이 있었고, 지금도 매년 추모식이 열린다.
대구 지하철 참사 희생자에 대한 조롱은 당시 '디시인사이드 국내야구 갤러리' 같은 곳에서 '고인드립'이라는 콘텐츠로 이용되다 사라졌다. 죽음, 그 자체를 희화화하는 무차별적 잔인함이다. 하지만 대구 지하철 참사는 특정 진영의 정체성을 구성하지도, 선거철마다 소환되는 정치적 무기가 되지도, 국회 발언대에 오르는 조직적 왜곡으로 발전하지도 않았다. 천안함 피격 사건은 그마저도 없다. 이 사건을 조롱하는 밈이나 합성사진, 지속적인 놀이 문화는 찾아보기 어렵다.
반면 5.18 광주민주화운동, 고 노무현 대통령 서거, 세월호 참사, 이태원 참사의 죽음은 다르다. 십여 년째 온라인 극우 커뮤니티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핵심 소재이자, 선거철마다 소환되는 정치적 무기이며, 국회 공청회와 입법 논쟁에까지 오르는 조직적 왜곡의 대상이다. 조롱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라, 그 조롱이 얼마나 조직되어 있고 얼마나 정치적 무기로 벼려져 있느냐의 문제다. 이 비대칭이 우연일 리 없다.
혐오와 조롱 문화의 뿌리
'일베'라는 사이트의 탄생 설화부터 들여다보면 답이 보인다. 2011년 문을 연 이 커뮤니티에서 회원들은 5.18 광주민주화운동 희생자들의 시신 사진에 '애미야, 홍어 좀 밖에 널어라'라는 문구를 붙였다. 관에 태극기가 덮인 사진에는 '택배상자'라는 조롱이 붙었다. '홍어'는 시체 섞는 냄새이자 전라도 사람을 비하하는 그들만의 은어였다.
그런데 이 재료들을 일베가 처음 만든 건 아니다. '디시인사이드'는 1999년 디지털카메라 동호회로 시작해 2000년대 내내 '국내야구 갤러리'와 '합성필수요소 갤러리', '옛 정치슬롯 갤러리'를 거치며 '고인드립'과 '지역드립'이라는 조롱 문화를 이미 쌓아왔다. '홍어'와 '운지' 같은 단어들도 사실 일베가 생기기 전, 이 갤러리들에서 먼저 만들어졌다. 호남광주에 대한 지역 비하는 그보다도 훨씬 오래됐다. 박정희 시대와 3김 시대를 거치며 이미 수십 년간 한국 정치의 골조를 이뤄온 지역주의가, 인터넷이라는 새 무기와 전국구 확성기를 만났을 뿐이다.
'일베'가 한 일은 발명이 아니라 응축이었다. 2010년 '디시 코미디프로그램 갤러리'에서 떨어져 나온 이용자들이 이미 흩어져 있던 조롱의 재료를 하나의 정체성으로 묶었다. 다시 말해 '일베'라는 정체성 자체가 처음부터 광주 조롱과 지역 차별의 결합으로 빚어졌다는 뜻이다. 이건 나중에 우연히 곁가지로 붙은 취향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던 산발적 잔인함을 하나의 정치적 서사로 응결시킨 뿌리 그 자체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하필 그런 상대를 골랐을까.
첫째, 상대 진영이 신성하게 여기는 서사여야 한다. 광주와 세월호는 여전히 다수 국민에게 애도의 대상이다. 해마다 5월이면 대통령이 광주 망월동 묘역을 찾고, 4월이면 안산의 기억교실이 다시 문을 연다. 국가가 공식적으로 애도를 승인하고 반복하는 달력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이 서사를 신성하게 만든다. 그 신성함을 깨뜨리는 순간에만 조롱은 전복의 쾌감을 만들어낸다. 이승만이나 전두환, 이명박을 조롱해봐야 아무도 아파하지 않는다. 이미 만인이 욕하는 대상은 아무리 짓밟아도 짜릿하지 않다. 조롱은 언제나 누군가 아직 무릎 꿇고 절하는 제단을 찾아 그 위에 침을 뱉는 행위다.
둘째, 반격할 힘이 없어야 한다. 세월호 유가족협의회와 이태원참사 유가족협의회는 매년 국회 앞에서 농성하고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지만, 이들에게는 상비된 정치 조직도, 정례적인 방송 채널도, 조직적으로 표를 동원할 지역 기반도 없다. 슬픔은 있지만 그 슬픔을 정치적 권력으로 되돌려줄 수단은 상대적으로 빈약하다. 반면 박근혜에게는 여전히 '태극기부대'라는 조직화된 지지층과 현장에 집결하는 동원력이 있다. 그를 건드리면 자기 진영 안에서 반발이 돌아온다. 그러니까 조롱은 언제나 아프게 할 수 있으면서도 되갚음이 돌아오지 않는 상대를 정확히 골라낸다. 힘의 저울을 재는 감각이야말로 이 계산법의 핵심이다.
셋째, 상처가 아직 살아 있어야 한다. 부마항쟁은 실제로 박정희 정권에 맞선 저항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 그 이름으로 눈물 흘릴 생존자 공동체가 대중의 눈앞에 뚜렷이 존재하지 않는다. 언론이 매년 조명하지 않고, 유가족 조직이 뉴스에 등장하지 않으면 그 사건은 서서히 조롱의 사정권 바깥으로 빠져나간다. 천안함은 오히려 보수 진영이 자기 서사로 이미 전유해버린 사건이라 조롱할 이유 자체가 없다. 그건 그들 편에선 '상처'니까. 대구 지하철 참사에 붙은 '통구이'라는 조롱이 정치적 무기로 자라지 못한 이유도 이와 맞닿아 있다. 그 조롱은 애초에 진영을 가리지 않는 잔인함이었을 뿐, 국가 폭력과 진영 대립이라는 정치적 서사를 붙들고 살아 있는 특정 공동체의 슬픔을 겨냥한 게 아니었다. 조롱이 겨냥하는 건 과거의 사실 자체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그 사실을 붙들고 슬퍼하는 살아 있는 사람들의 반응이다. 반응이 없으면 조롱도 성립하지 않는다.
이 세 조건을 하나로 묶으면 결국 하나의 심리로 수렴된다. 자기 진영에 아무 손해 없이, 상대 진영에 최대의 고통을 주고, 그 고통에 대한 반격은 돌아오지 않는 대상을 정밀하게 골라내는 것.
르네 지라르는 이걸 '희생양 메커니즘'이라 불렀다. 공동체가 죄의식 없이 폭력을 발산할 대상을 고를 때 작동하는 논리다. 대상은 힘이 없어야 하고, 그 대상을 공격해도 공동체 전체가 등을 돌리지 않아야 하고, 무엇보다 그 대상의 고통이 눈에 보여야 한다. 지라르가 프랑스의 중세 마을을 두고 세운 이론이 21세기 한국의 인터넷 커뮤니티에 그대로 들어맞는다는 사실이, 나는 오히려 섬뜩하다.
죽음을 조롱하며 즐기는 사람들
대체 타인의 죽음 앞에서 웃는 사람들의 심리는 무엇인가.
심리학자 앨버트 반두라는 이를 '도덕적 이탈'이라 불렀다. 사람은 본래 타인에게 해를 끼치면 죄바카라감을 느끼도록 설계돼 있는데, 그 자기 검열 장치를 끄는 몇 가지 방법이 있다는 것이다. '완곡한 명명'이 그 하나다. 시신을 시신이라 부르지 않고 '홍어'라 부르는 순간, 그 대상은 이미 애도할 필요가 없는 사물이 된다. 비인간화가 또 다른 방법이다. 유가족을 '종북 세력'이나 '시체팔이'라 부르면, 그들은 더 이상 슬퍼하는 인간이 아니라 처단해야 할 '적'이 된다. 반두라는 이 도덕적 이탈이 한순간에 일어나지 않고 아주 조금씩, 어제는 용납 못 할 일이 오늘은 그럴 수도 있는 일로 미끄러지며 진행된다고 했다. '일베'라는 커뮤니티가 처음에는 저급한 유머 사이트를 자처하다가 점점 노골적인 혐오 언어를 아무렇지 않게 쓰는 곳으로 변해간 궤적이 정확히 이 미끄러짐이다.
여기에 심리학자 존 슐러가 이름 붙인 '온라인 탈억제 효과'가 겹친다. 얼굴을 마주 보고는 절대 뱉지 못할 말도 화면 뒤에서는 안전하다고 느낀다는 것이다. 익명성, 눈을 마주치지 않는 비대면성, 상대의 표정을 실시간으로 읽지 못하는 단절감이 결합하면 평소라면 스스로 눌렀을 말이 아무 제동 없이 터져 나온다. '일베'나 그와 비슷한 익명 커뮤니티들이 유독 잔인한 언어의 온상이 되는 이유는, 단지 그곳에 나쁜 사람들이 모여서가 아니라 그 공간의 구조 자체가 억제를 풀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정서적 연료는 니체가 원한, 즉 '르상티망'이라 부른 감정에 가깝다. 니체는 힘없는 자가 강자를 향해 품는 무력한 분노가, 정면으로 맞서 싸우는 대신 은밀하고 뒤틀린 방식으로 표출된다고 봤다. 정면 대결에서 이길 수 없으니, 상대가 소중히 여기는 것을 몰래 더럽히는 쪽을 택한다는 것이다.
지금 광주와 세월호를 조롱하는 이들 다수가 정치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승자가 아니라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그들은 정면으로 이길 수 없는 싸움에서, 상대의 신성한 것을 조롱함으로써 이겼다는 착각을 산다. 도덕적 이탈이 죄바카라감을 꺼주는 스위치라면, 온라인 탈억제는 그 스위치를 더 쉽게 누르게 하는 환경이고, 르상티망은 애초에 그 스위치를 누르고 싶게 만드는 감정의 뿌리다. 이 세 겹이 겹칠 때, 한 사람은 자신이 '정의로운 반항아'라고 믿으며 실제로는 가장 비겁한 폭력을 저지른다.
이쯤에서 떠오르는 질문. 희생자의 죽음과 유가족의 고통을 조롱하는 이들 중에는 분명 자기 가족을 잃어본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자신이 겪은 상실의 고통을 알면서도 타인의 상실 앞에서 웃을 수 있을까. 이 모순이 이해되지 않는다면, 그건 이해력의 문제가 아니라 당신의 온전한 도덕 감각이 작동하고 있다는 증거다.
다만 심리학이 설명하는 메커니즘은 있다. 공감이라는 감정은 인격 전체에 골고루 적용되는 총량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헨리 타지펠이 정리한 내집단과 외집단 개념을 다시 가져오면, 공감은 애초에 보편적으로 작동하도록 설계된 능력이 아니라 자신이 속한 집단의 경계 안에서만 활성화되도록 진화한 능력에 가깝다.
실제로 자기 가족을 잃은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도, 그 상실이 활성화시키는 공감은 자기 진영이라는 경계 안쪽에만 흐르고, 그 경계 밖에 있는 타인의 상실 앞에서는 전혀 다른 회로가 작동한다. 슬픔과 잔인함이 같은 사람 안에서 모순 없이 공존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공감은 성품이 아니라, 경계선을 따라 켜지고 꺼지는 스위치에 가깝다.
세월호 참사 당시 단원고 교복을 입고 희생자를 조롱하는 사진을 올려 실형을 선고받았던 한 남성은, 훗날 인터뷰에서 그 행동에 대해 "예상보다 파급력이 커서 기분이 좋았다"라고 말했다. 이 증언은 그가 특별히 메마른 인간이라서가 아니라, 경계 밖의 대상 앞에서는 누구든 이 스위치가 켜질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다만 이 설명은 절대 면죄부가 아니다. 메커니즘을 이해하는 것과 그 행동을 용서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이다.
그들만의 신호, 사과도 놀이의 일부
조롱의 재미는 단지 상대를 아프게 하는 데만 있지 않다. 거기에는 자기들끼리만 알아채는 암호가 있다. 초성으로 줄인 은어, 특정 숫자, 특정 이미지를 서로 던지며 낄낄대는 이들은, 그 신호를 알아듣지 못하는 외부인 앞에서 우월감을 느낀다. 이건 놀이를 가장한 소속 확인 절차에 가깝다. 슬롯심리학자 헨리 타지펠이 말한 슬롯적 정체성 이론에 따르면, 사람은 자신이 속한 집단을 다른 집단과 구별함으로써 자존감을 얻는다. 그 구별의 표식이 은밀할수록, 그것을 알아채는 소수의 결속감은 강해진다.
문제는 이 은어가 슬롯적으로 논란이 될 때 벌어지는 두 번째 판이다. 언론이 지적하고 여론이 들끓으면, 이들은 해명하고 사과하고 핑계를 댄다. 그런데 이 사과와 해명 자체가 진심 어린 반성이 아니라 또 다른 놀이의 한 수라는 게 여러 증언에서 드러난다.
네덜란드의 문화사학자 요한 하위징아는 그의 바카라 《호모 루덴스》에서 '놀이는 일상의 규칙이 잠시 정지되는 자기만의 원 안에서 벌어진다'고 했다. 그 원 안에서는 평소의 도덕이 적용되지 않고, 원 안의 규칙만이 작동한다. 조롱을 즐기는 이들에게는 조롱도, 그 조롱이 걸렸을 때의 사과도, 모두 이 원 안에서 벌어지는 하나의 연속된 게임이다. 진짜로 뉘우쳐서 사과하는 게 아니라, 얼마나 그럴듯하게 반성하는 척할 수 있는지를 겨루는 것이다. 그 능청스러움 자체가 그들 사이에서는 또 하나의 재밌는 콘텐츠가 된다.
여기에 '포의 법칙'이라 불리는 인터넷 문화의 오래된 경험칙이 겹친다. '극단적인 주장은 진심으로 하는 말인지 풍자로 하는 말인지 구별할 수 없다'는 법칙이다. 이 구별 불가능성이 바로 이들의 방패가 된다. 진심이었냐고 추궁하면 농담이었다고 발뺌하고, 농담 아니냐고 하면 은근히 진심을 흘린다. 잡히지 않는 유령처럼 두 가지 해석 사이를 오가며, 그 모호함을 즐긴다. 앞서 말한 반두라의 도덕적 이탈 가운데 완곡한 명명과 바카라임 회피가, 이 지점에 이르러서는 아예 하나의 세련된 사교 기술로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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