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를 46년째 피해자의 자리에 세워두는 대한민국
목동야구장 더그아웃. 경기는 이미 배재고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6대2. 승기를 잡은 아이들의 목소리는 컸다.
"가야지, 가야지, 스타벅스 가야지."
원래는 "안타 치고 가야지"였을 그 구호에, 누군가 스타벅스라는 단어를 끼워 넣었다. 상대는 광주일고였다. 곧이어 한 아이가 더 크게 외쳤다.
"탱크데이!"
그 두 단어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온 국민이 안다. 5.18 민주화운동 46주년이던 지난 5월, 스타벅스코리아가 탱크 시리즈 텀블러로 역사를 조롱했다는 비판을 받고 대표가 물러났던 바로 그 사건이다. 아이들은 그 문구를 그대로 가져와 광주 연고팀 선수들 앞에 던졌다.
광주일고 선수들은 반응하지 않았다. 코칭스태프가 항의해 경기가 잠시 중단됐고, 감독은 라디오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선수들이 반응을 보이는 것 자체가 스포츠맨십에서 어긋난다고 생각해서 어떻게든 경기를 끝까지 마치려 했다고. 그리고 배재고에 대한 징계가 논의되기 시작하자, 그는 오히려 상대 팀을 걱정했다. 어떠한 처벌을 받게 된다면 자신도 가슴 아픈 일이라고, 야구부 전체가 피해를 받는 것 자체가 안타깝다고. 이 장면을 전한 뉴스의 제목은 "모욕에도 의연하게 대처‥ 가해학생 감싼 광주일고"였다.
나는 이 문장 앞에서 멈췄다. 피해자에게 의연하다는 칭찬이라니.
분노할 자격을 빼앗긴 사람들
지난 46년 동안 한국 슬롯는 광주에 피해자다움을 요구해온 게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한국 슬롯는 피해자에게 늘 대본을 쥐여준다. 분노하지 말 것, 큰 소리 내지 말 것, 상대를 걱정할 것. 그 대본을 정확히 따를 때에야 비로소 언론과 여론은 그 피해자에게 품격이라는 훈장을 달아준다. 만약 광주일고 선수들이 배재고 선수들에게 그 자리에서 똑같이 맞받아쳤다면 어땠을까. 지금과 같은 지지와 동정이 그대로 모였을까. 오히려 똑같이 유치하게 굴었다는 비아냥이 따라붙었을 가능성이 크다.
'피해자다움'이라는 말은 원래 성범죄 피해자를 향한 2차 가해의 언어로 더 익숙하다. 눈물을 흘리지 않으면 진짜가 아니라고 의심받고, 너무 침착하면 꾸며낸 것 아니냐고 의심받는 이중구속이다. 이번 사건에서 광주에게 요구된 대본은 그것과 결이 조금 다르다. 여기서는 분노가 곧 자격 상실이다. 오직 절제와 관용만이 도덕적 우위를 지켜준다는 암묵의 계약. 이건 자기 감정을 표현할 권리를 통째로 저당 잡히는 일이다.
상처를 회복하는 첫걸음은 언제 슬퍼하고 언제 화낼지, 그 시간표를 스스로 쥐는 데서 시작한다. 하지만 이번 사건에서 그 시간표마저 광주의 것이 아니었다. 배재고는 사과 방문 계획을 광주일고와 사전 협의 없이 먼저 언론에 흘렸다. 심지어 일부 매체는 그날 오전, "배재고가 광주일고를 방문해 사과할 예정"이라고 기정사실처럼 보도했다. 정작 광주일고는 그 기사를 보고서야 무슨 일인지 확인하려 배재고에 연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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