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선에 지쳤다는 2030의 논리를 따라가면, 86세대 청년과 만난다
물살이 바뀌는 곳에서
다이빙을 가르칠 때 나는 초보자들에게 늘 같은 말을 한다. 물 위에서 보는 것과 물 아래서 느끼는 것은 다르다고. 수면은 잔잔해 보여도 그 아래 서너 미터쯤에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흐르는 조류가 있다. 초보 다이버는 자기가 헤엄치고 있다고 믿지만, 사실은 보이지 않는 물살이 그를 데리고 가는 것이다. 그리고 정말 무서운 건, 그 사실을 아는 다이버조차도 자기 자신이 지금 어느 물살에 실려 있는지는 좀처럼 느끼지 못한다는 점이다. 요즘 한국 정치를 보면서 자꾸 그 물속 감각을 떠올린다.
광장의 절반
2024년 겨울, 국회 앞을 채운 응원봉 빛을 기억한다. 12월의 밤, '계엄'이라는 말을 살아서 다시 듣게 될 줄 몰랐던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1년 6개월 뒤, 6월의 지방선거 출구조사를 받아 들었을 때 우리 슬롯는 적잖이 당황했다. 20대 이하 남성의 절반이 넘는 수가 국민의힘 후보를 찍었고, 20대 이상 여성의 삼분의 이는 여전히 민주당 쪽에 남아 있었다. 같은 세대, 같은 광장에 있었을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1년 6개월 만에 정반대의 표를 던진 것이다.
그 사이 숫자는 거의 곤두박질에 가까웠다. 3월 셋째 주만 해도 리얼미터 조사에서 20대는 민주당 45.1퍼센트, 국민의힘 32.8퍼센트였다. 그런데 6월 둘째 주가 되자 민주당 21.3퍼센트, 국민의힘 59.1퍼센트로 완전히 뒤집혔다. 한국갤럽 기준으로도 양당 격차는 4월 초 30퍼센트포인트에서 6월 둘째 주 12퍼센트포인트까지 좁혀졌고, 그 주 국민의힘 지지율 29퍼센트는 이재명 정권 출범 이후 최고치였다. 한 세대의 마음이 석 달 만에 이렇게 요동친다는 건, 그 마음이 애초에 어느 진영에도 단단히 뿌리내리고 있지 않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누군가는 이걸 청년층의 보수화라 부르고, 누군가는 배신이라 부른다. 나는 둘 다 아니라고 본다. 이건 하나의 세대가 아니라 두 개의 세대가 우연히 같은 나이대에 겹쳐 있는 것에 가깝다. 겨울 광장의 핵심 세력이었던 2030 여성들에게는 지금도 내란이라는 사건이 정치를 가르는 결정적인 기준이다. 그런데 같은 나이의 남성들에게는 애초에 그 기준이 정치 선택의 중심에 있었던 적이 없다. 이들에게 정치는 공정과 취업과 젠더라는 다른 좌표 위에서 움직인다. 같은 물속에 있어도 완전히 다른 조류를 타고 있다.
무당층이라는 침묵
그런데 이 반전의 그림에서 빠뜨리기 쉬운 얼굴이 하나 있다. 아예 물 밖으로 나가버린 사람들이다. 올해 4월 한국갤럽 조사에서 지지 정당이 없다고 답한 20대는 41퍼센트, 30대는 36퍼센트였다. 40대의 23퍼센트, 50대의 16퍼센트와 비교하면 압도적으로 높은 수치다. 국민의힘으로 옮겨간 이들만큼이나 아예 정치 자체에서 발을 뺀 이들도 많다는 뜻이다.
앨버트 허시먼은 조직이나 국가가 실망을 안겼을 때 인간이 택할 수 있는 세 가지 길을 이야기했다. 이탈, 목소리, 그리고 충성이다. 무당층으로 남는 건 이탈에 가깝다. 이 정치가 나를 대변하지 못한다고 판단해 아예 참여 자체를 접는 것이다. 반면 국민의힘으로 표를 옮긴 이들은 목소리를 택한 쪽이다. 조직에 대한 충성은 접었지만, 표라도 던져서 응징하겠다는 의지는 남아 있다.
정한울 한국사람연구원장은 2030에 무당층이 많다는 통념이 사실은 일반론일 뿐이라며, 한국에서는 두 차례의 탄핵을 거치며 청년들이 정치적 효능감을 느끼게 됐고 그것이 오히려 투표 참여로 이어졌다고 짚었다. 같은 세대 안에서 효능감을 느낀 이들은 목소리를, 무기력을 느낀 이들은 이탈을 택한 셈이다. 두 반응 모두 출발점은 같은 불신이다.
순수했던 자들의 함정
에릭 호퍼는 《진정한 신봉자: 대중 운동의 본질에 대한 생각》에서 대중운동에 투신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파고들었다. 독재 권력을 추종하는 이와 혁명을 위해 자신을 던지는 이는, 신봉하는 대상은 정반대여도 자기 존재를 대의에 완전히 종속시키려는 욕구만큼은 놀랍도록 닮아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이 통찰이 불편하면서도 정확하다고 생각한다. 박정희와 전두환에 맞서 싸운 이들과 그들이 무너뜨리려 한 독재 권력이 심리적으로는 같은 뿌리에서 자라 나왔을 수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심리적 뿌리가 같다는 것과 도덕적 무게가 같다는 것은 다른 이야기다. 국가권력을 사유화해 시민을 학살한 것과, 이미 존재하는 폭력에 맞서 저항한 것은 발생의 방향 자체가 다르다. 가해와 피해를 등치시키는 순간, 광주의 무게는 조용히 지워진다. 나는 이 구분을 놓치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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