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을 불러줘

넷플릭스 영화 '레이디스 퍼스트: 거꾸로 가는 남자'

by조하나


(스포일러 있습니다)



한 번도 의심해본 적 없는 것들



영화 속 평행 세계에는 '버거킹' 대신 '버거퀸'이 있다. '빅토리아 시크릿'이 아니라 '빅터스 시크릿'이 있고, '돈키호테'가 아니라 '도나 키호테'가 있다. '해리 포터'는 '해리엇 포터'가 되고, 교황은 베아트리체라는 이름의 여성이다. 기도가 끝날 때 사람들은 '아멘(A-men)'이 아니라 '아우먼(A-women)'이라고 말한다. '맨스플레인'은 '우먼스플레인'이 되고, '페미니즘'이 자리하던 곳에는 '매니즘'이 들어선다. 남성들은 피켓을 들고 거리에서 '나의 몸! 나의 정자!'를 외치며 시위한다.



이 젠더 권력이 완벽하게 전복된 장면들 앞에서 느껴지는 건 분명 짜릿함이다. 그런데 그 짜릿함의 정체를 들여다보면 묘한 것이 있다. 우리는 태어나서 한 번도 '버거킹'이라는 이름을 의심해본 적이 없다. '돈키호테'가 남자라는 사실도, 교황이 늘 남자였다는 사실도 그냥 자연스러웠다.



언어는 세계를 담는 그릇이다. 인간은 언어로 사유한다. '아멘'이 '아우먼'으로 바뀌는 순간, 우리가 오래도록 신성하게 여기던 것조차 한쪽 성별을 중심으로 짜여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맨스플레인'이나 '매니즘'이라는 단어가 왜 만들어졌는지 묻는다면, 그 단어가 필요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답이다.



그러니까 그 전복이 낯섦이 아니라 짜릿함으로 다가온다는 것은, 반대 방향의 현실이 그만큼 오래, 그만큼 깊이 당연한 것으로 우리 안에 새겨져 있었다는 증거다. 카타르시스, 즉 짜릿하다는 감각은 사실 우리가 무엇에 길들어 있었는지를 거꾸로 비춰주는 거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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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에서 시작해 코미디로 끝난 이야기



「레이디스 퍼스트: 거꾸로 가는 남자」는 2026년 5월 22일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영국과 미국 합작 영화다. 테아 셰록이 연출하고 사샤 바론 코헨과 로저먼드 파이크가 주연을 맡았다. 오만한 바람둥이 광고 회사 임원 데이미언(사샤 바론 코헨)이 어느 날 머리를 부딪치고 깨어나 보니 여성이 모든 권력을 쥔 평행 세계에 와 있다는 이야기다.



이 영화의 뿌리는 흥미롭다. 2018년 프랑스 영화 「나는 쉬운 남자가 아니다」가 원작으로, 그 영화 또한 같은 감독 엘레오노르 푸리아가 2010년에 만든 단편 「억압받는 다수」에서 출발했다. 그런데 그 단편은 로맨틱 코미디가 아니었다. 여성혐오와 성폭력의 경험을 정면으로 보여주는 공포물에 가까웠다. 카타르시스도 없고, 로맨스도 없고, 남자의 성장도 없이, 그저 이것이 현실이라고 직면시키는 작품이었다. 사실 여성이 매일 겪는 현실은 공포 영화보다 더 공포스러운 실체라는 의미였다.



세 단계를 거치며 이야기는 점점 부드러워졌다. 공포는 풍자가 되었고, 풍자는 다시 로맨틱 코미디가 되었다. 넷플릭스라는 거대한 글로벌 플랫폼의 규모로 올라오면서 가장 날카로웠던 날이 뽑혀나간 것이다. 그 대가로 영화는 92개국에서 화제에 올랐고 52개국에서 가장 많이 본 영화 1위를 기록했다. 동시에 비평가들에게는 20퍼센트 안팎의 낮은 점수를 받았고, 관객 점수는 그보다 한참 높은 68퍼센트였다. 이 점수의 격차가 이 영화의 운명을 가장 정직하게 요약한다.





거울을 보여주되, 거울만 보여준 영화



이 영화의 전략은 '거울치료'다. '네가 한번 여자의 입장이 되어보라'는 것이다. 그래서 평행 세계의 디테일은 촘촘하다. 여성 건설 노동자들이 길을 지나가는 데이미언에게 휘파람을 불며 희롱(캣콜링)한다. 패스트푸드 가게에서는 벗은 남자 모델이 햄버거를 판다. 남자 속옷에는 양쪽 고환을 받쳐주는 장치가 달려 있고, 성기 사이즈를 부풀리는 필러 시술도 유행이다. 남자 주인공 데이미언은 자식 없이 고양이나 키우는 남자로 보일까 봐 두려워한다. 사우디아라비아가 이제야 남자에게 운전을 허락했다는 소식을, 여성 임원은 커피를 마시며 가벼운 동정의 어조로 화제 삼는다. 남성 중심의 권력 세상에서 접수원이던 여성이 평행 세계에서는 회사의 최고 경영자가 되어 있고, 청소 일을 하던 여성이 임원 자리에 앉아 있다. 권력의 피라미드가 통째로 뒤집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촘촘한 전복이 모여 도달하는 종착지는 결국 하나다. 평행 세계에서 데이미언은 배운다. 그러나 알렉스는 배울 것이 없다. 알렉스는 이미 그런 세상을 충분히 경험했기 때문이다. 여성으로 살아오며 그 구조를 몸으로 겪어왔으니, 데이미언이 머리를 부딪치고 나서야 겨우 도달한 그 깨달음의 자리에 알렉스는 태어날 때부터 서 있었다.



영화의 마지막, 데이미언은 다시 남성이 권력을 쥔 원래의 현실 세계로 돌아온다. 깨달음을 얻은 그는 회사를 박차고 나간 알렉스의 집을 찾아가 자신의 잘못을 사과하고, 회사로 돌아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자리를 맡아달라고 제안한다.



깨달음을 얻은 데이미언이 정말 달라졌다면, 그는 이제 자신이 살던 남성 중심의 세계로 돌아와 페미니스트가 되어 싸워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길이 갈라지는 질문이 하나 있다. 그는 자기 자신을 위해 '싸우는가', 아니면 알렉스를 대신해 '싸워준다'고 여기는가. 비슷해 보이지만 전혀 다른 두 갈래다.



'알렉스를 위해' 세상과 싸운다는 마음을 유지하는 한, 데이미언은 여전히 자신을 그 시스템의 바깥에, 그리고 알렉스보다 한 단계 위에 놓는다. 구조가 바뀌어도 자기가 '베푸는 사람'이라는 위치는 그대로 남는다. 흔히 말하는 '남성 구원자 서사'의 함정이 여기에 있다. 약자를 구해주는 선한 강자라는 자리는, 결국 강자가 강자로 남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영화의 제목이 사실은 함정이었다는 것이 드러난다. '레이디스 퍼스트'는 여성을 먼저 배려하는 말처럼 들린다. 그러나 문을 열어주며 먼저 가시라고 말하는 사람은 여전히 그 문을 여닫을 권한을 쥔 사람이다.



반대로 데이미언이 나 역시 이 시스템의 공범이었고 그래서 내가 바꿔야 한다고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알렉스를 위한 싸움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윤리적 바카라임으로서의 싸움이 된다. 그것이 진짜 변화일 텐데, 영화는 데이미언이 어느 쪽인지 끝까지 분명히 보여주지 않는다.



그래서 영화의 마지막 구도를 다시 보면 불편함이 남는다. 회사의 결정권을 쥔 데이미언이 알렉스를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기용하는 그림은, 현실에서 '깨어있는' 남성 리더가 결국 능력 있는 여성에게 기회를 준다는 이야기와 정확히 겹친다. 알렉스의 광고 캠페인으로 부와 명성을 얻는 것은 맞다. 그러나 그 길은 여전히 데이미언을 통과한다. 알렉스가 스스로 쟁취한 것이 아니라, 데이미언이 평행 세계에서의 거울 치료로 인해 변했기 때문에 비로소 열린 길이다. 알렉스의 능력과 존재는 데이미언이 각성하는 데 쓰인 촉매였고, 그 결과조차 데이미언의 결정을 거쳐 주어진다.



진짜 평등은 알렉스가 데이미언의 선택 없이도 그 자리에 있을 수 있는 구조에서 온다. 그러나 영화는 그 구조를 아예 건드리지 않는다. 능력 있고 멋진, 게다가 깨어있는 남자가 여자를 위해 좋은 결정을 내려주는 자리에서 멈춘다. 시스템은 그대로이고, 데이미언이라는 한 사람이 달라졌을 뿐이다. 그가 선한 의지로 자리를 내어주는 것을 우리는 '평등'이라 부르지 않는다. '온정'이라 부른다.



이 한계가 더 아프게 다가오는 이유는 영화가 놓인 시점에 있다. 2026년 지금, 세계 곳곳에서 여성의 권리는 나아가기는커녕 뒤로 밀리고 있다. 그런 때에 나온 영화가 그 무게를 감당하는 대신 끝내 한 남자의 성장담으로 작아졌다. 시스템의 문제를 이야기하다가 개인의 이야기로 수렴해버린 것이다. 남자는 거울 치료를 통해 배우고 경험하고 협상하지만, 결국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세상으로 돌아온다. 오히려 그 경험을 훈장 삼아 '깨어있는 남자'가 되어 더 큰 매력을 발산하며. 데이미언이 배우는 이야기인데, 그 배움의 가장 큰 수혜자가 데이미언 자신이 되는 결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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