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 어울리는 마음들 #07
소개하고 싶은 시가 있으신가요?
시가 유명해진다는 일은 정말 놀라운 일이다. 짧은 몇 줄이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건드려서 누군가의 입에서는 노래가 되고 누군가의 공바카라에서는 울면서 뒹굴고 누군가의 SNS에서는 속내의 고요한 울부짖음이 된다. 영어 표현 중에 touching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가닿아 건드린다'라는 한글 뜻이 곧 마음을 건드리는, 감동적이라는 본래 뜻의 은유처럼 느껴져서 좋다. 시에는 마법 같은 언어의 힘이 있어서 문장이 어딘가로 날아가 누군가의 마음을 건드리는 것 같다. 공감, 첫째로는 미래 독자들에 대한 시인의 공감. 어떻게 다른 사람들도 공감할 것이라는 것을 미리 알고 시를 지을까? 아마도 삶 속에서 다른 사람들의 비슷한 감정들을 포착했기 때문이리라. 시인은 이미 공감을 통해 알게 된 그것을 전해야만 했고 그래서 시를 낳았다. 둘째로는 독자들의 공감. 무언가를 읽고 거기에 온 마음을 줘버리는 일은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의 말에 촉촉해지는 것은 독자 또한 마음을 열고 시를 읽는다는, 삶에 그다지 필요 없어 보이는 일을 나서서 해 주었기 때문이다. 많은 훌륭한 소설도 문장보다는 이야기가 남는다. 툭, 하고 마음을 건드리는 힘은 시에게 주어진 특권 같다.
몇 가지 순간들의 나열과 청춘의 개념에 대한 마지막 읊조림 몇 단어가 유명한 시가 되었다. 그리고 어딘가 sns를 떠돌다 내게 와서 닿았다. 임차인 권리 보호 활동에 힘쓰는 슬롯학자인 심보선의 이름은 건축 공부를 하면서 익히 알고 있었으나 그의 많은 활동들보다도 내게는 이 시가 더 와닿았다. 다소 고상하다고 여겨 시 읽는 취미가 없었기에 교과서에 나오는 시들 정도나 몇 개 알고 살았었다. 요즘 시는 현대미술처럼 이해도 어렵고 오래 살아남지 않았으니 검증되지 않은 것으로 여겼다. 그러니 청춘에 관한 처연할 정도로 현실감 넘치지만 읽기 쉬우면서도 젊고 세련된 이 시는 정말 touching 그 자체였다.
이 시에 나열된 청춘의 순간들은 전부 내가 해 보았고, 해 보지 않았던 일들이다. 다시 말하면 시어 그대로 행하지는 않았지만 비유를 찾자면 얼마든지 유사한 경험들을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예컨대 아버지의 멱살을 잡지는 않았지만 대들었다가 아빠에게 두려움을 느끼기도 하고, 아빠의 나이 들어감에 두려움을 느끼기도 하고, 나의 다 자라버렸음에 두려움을 느끼기도 해 본 것이다. 수많은 나열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시에 공감한 것은 나뿐만이 아닌 듯하니 각각의 시어들이 그 함축성을 내포하기 위해 얼마나 가다듬어진 것인지 알 수 있다. 물론 마지막 '그때, 꽃 피는 푸르른 봄이라는, 일생에 단 한 번뿐이라는, 청춘이라는' 쉼표 없이도 4개의 절로 끊어 읽히는 이 아득한 문장들도 너무 완벽하지만, 내가 가장 공감했던 구절은 '솔직히 말하자면 아프지 않고 멀쩡한 생을 남몰래 흠모했을 때'였다. 아프니까 청춘이라고들 하지만, 아프지 않아도 되는데도 내 청춘은 계속 아파했다. 아프고 싶지 않은 데도 계속 아파했고, 멀쩡하기를 바라는 것은 심지어 '남몰래' 해야 했다. 그 '남몰래'는 내가 남들은 멀쩡하다고 생각하고 나의 아픔을 부끄럽게 여겼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내 아픔을 인정하지 않고 의식적으로 회피하느라 멀쩡한 생을 흠모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 한 걸까? 왜 그랬는지도, 내가 청춘의 어디쯤에 서있는지 이미 끝났는지도 알 수 없지만 이 시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청춘의 아픈 부분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는 것만큼은 이제 믿을 수 있다.
소설은 쓰기만 하는데 시는 집 짓 듯이 짓는다. 어쩌면 시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마음을 건드린 그 시 속에 들어가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 여름의 끝
5년 전의 나는 심보선의 시를 읽으며 '솔직히 말하자면 아프지 않고 멀쩡한 생을 남몰래 흠모했다'는 부분에 공감했다. 돌이켜보면 그때의 내가 지금의 나보다 훨씬 치열했다. 충분히 아파하고 바닥을 뒹굴어준 과거의 나에게 안쓰러움보다는 고마운 마음이 든다. 그 숱한 아픔 덕분에 지금의 나는 고통을 그저 고통으로 놔두지 않고, 이 요란한 삶 위에서 어떻게든 작두를 탈 수 있게 되었으니. 이제는 더이상 멀쩡한 생을 흠모하지 않는다. 애초에 상처 하나 없이 미끈하고 '멀쩡한 생'이란 존재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됐다.
최근 뇌과학과 심리학 바카라들을 들춰보며 알게 된 사실, 우리는 의식적으로 노력하지 않으면 필연적으로 자신이 가장 싫어하는 모습을 닮아가게 되어있다고 한다. 그렇게 자기파괴적으로 설계되어 있는 것이 인간이니 멀쩡하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나는 언제나 적어도 사고의 관점에서만큼은 최대한 열려 있는 사람이고 싶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는 척, 예민한 척은 다 하는데도 어떨 때는 무심코 내 안의 보수성이 머릿속 아니, 가슴속에서 훅 튀어나올 때가 있다. 대상에 대한 무심한 무관심, 즉 혐오의 감정이 불쑥 고개를 드는 서늘한 순간들. 그렇기에 생각하기를 멈출 수가 없다. 무감각해지는 것, 생각하지 않는 것은 결코 멀쩡한 상태가 아니다. 차라리 스스로 질문하고 고통을 부여하며 뾰족하게 깨어 있는 편이 훨씬 멀쩡함에 가깝다. 그러니까 멀쩡함을 흠모하는 것은 이제 그만하기로 한다.
여러 차례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고 기어코 붉은 꽃을 매다는 백일홍. 이성복 시인에게 '꽃을 매다는 일'은 아마도 시를 쓰는 일이었을 테다. 그렇다면 폭풍의 한가운데서 내가 매달고 있는 꽃은 무엇일까. 지금 내가 같이 만들어가고 있는 모임들과 회고에 관한 단상들, 타인과 마주 앉아 각자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시간들이 세상에 없어서는 안 될 대단히 필수적인 것은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그 어떤 쓸모없음, 그것은 시의 본질이기도 하다. 생존과 직결되지 않은 그 무용하고 쓸모없는 것에 우리는 얼마나 속수무바카라으로 감동하고 흔들리는가.
내가 하는 일도 어쩐지 시를 닮았다. 쓸모없지만 너무나 소중한 것의 가치를 알리는 일. 억센 꽃들이 마당을 피로 덮을 때 장난처럼 절망이 끝날 것이라 믿기에, 나는 오늘도 꽃을 매다는 마음으로 사람들을 모으고 안부를 묻는다. 정의롭지 못한 세상이 두려워 웅크려 분노와 질투를 속으로 삭히던 시절을 지나, 버티는 시간을 기어코 이겨내는 시간으로 바꾸어내는 중이다. 멀쩡한 생 대신, 피를 좀 보더라도 폭풍을 통과하는 자의 붉고 억센 꽃을 매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