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키네시아에 대한 변명
어릴 때? 젊을 때? 는 누구나 그렇겠지만 나는 특히 더 심했던 것 같다. 자기 확신이 아주 강했다. 경험치도 부족하고, 얼마나 세상이 크고 다양한지에 대한 인지도 부족했을 유치한 때니까 그랬을 거라고 생각한다. 뭐, 살면서 배우는 거지. yes or no가 분명하고, 나의 생각은 오해의 여지없이 분명하고, 명확하게 말하는 것이 상대에 대한 예의라고 확신했다. 싸가지 없다는 얘기도 참 많이 들었지만 '싸가지 없다는 말은 젊은 사람이 맞는 말을 했을 때 대꾸할 수 없는 나이 든 양반들이 하는 말'로 치부해 버렸다. 얼마나 자기 확신이 강한 인간인가 말이다. 나이라는 걸 먹으면 그 확신이라는 게 크림 브륄레의 설탕 코팅 깨지듯이 아주 가볍게 바사삭 깨지는 걸 수시로 경험하게 되는데 그런 경험이 쌓일수록 항상 하는 말이 생겨버렸다. "일단, 지금은 그래."
에키네시아 촌스럽고 안 예쁜데, 특히 핑크색 너무 촌스러운 데다가 가운데 꽃술이 너무 공격적이지 않아? 그리고 정원 가꾸는 사람들 다들 심는 것 같은데 너무 지루해서 별로라고 했는데 아랫 단지 어느 집에서 빽빽하게 심은 백일홍이 만개한 모습을 보게 되었는데 와.... 저거 너무 요란스럽지 않아? 저것보다는 에키네시아가 나을 것 같다는 생각만 했을 뿐인데 갑자기 무슨 의식의 흐름인지 에키네시아를 심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심었다, 쪼끔만. 심었을 때는 분명히 흰색 꽃도 있고, 촌스럽다고 한 분홍색만 있는 건 아니었는데 다음 해에 보니 온통 분홍색만 가득했다. 어찌나 실망을 했는지 분홍색이 다른 색을 다 먹어버렸다고 촌스러운 게 독하기까지 하다고 징징댔는데 그나마 다행인 것은 수세가 별로 좋지 않았다는 점이다. 역시 내 정원이랑은 안 맞는다고 생각하고 무리해서 파내진 않겠지만 스스로 퇴장하기를 기다리긴 했었다. 그리고 또 한 해를 지나고, 올해.
우리 집 정원의 컨디션이 많이 바뀌었다. 가장 빛이 좋던 남쪽 정원으로 이웃이 집을 바짝 붙여 지으면서 광량이 줄었고, 이어 빛 경쟁을 하는 나무들이 쑥쑥 자라나기 시작하면서 공중 공간이 울창해져 버린 것이다. 해를 많이 봐야 하는 애들을 몰아 심은 공간이었는데 아이들을 이주시켜야 하는 상황까지 되어버린 것이다. 그런데 그 공간에 잡초는 아닌 새싹들이 봄부터 우글우글했다. 꼴을 보아하니 에키네시아. 한 2년 수세가 저조했던 에키네시아가 그동안 땅속에서 재기를 꿈을 꾸고 있었는지 올봄에는 흙을 밀고 올라오는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그랬더니 세상에나 키 큰 나무들 사이로 에키네시아가 군단을 이룰 줄이야. 다른 색은 하나도 없이 오로지 분홍색으로 색을 맞춰서 강한 줄기를 쭉쭉 뻗어내며 애기 손바닥만 한 얼굴을 들이밀 줄 누가 알았느냐 말이다. 문제는 그 위치가 너무나 적절해. 게다가 금속성의 푸른빛을 내는 에린지움과 같이 있으니까 되게 빈티지스러운 분위기까지 나는 것 같고 온통 진한 초록으로 덮인 어두운 공간에 생기가 도는 것 같은 느낌까지. 한 마디로 공간이 예뻐졌다. 그 촌스럽고 거친 술을 가진 분홍색 에키네시아 덕분에 말이다.
"나는 있지, 에키네시아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어, 몇. 년. 전. 에. 는. 그런데 말이야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에키네시아를 싫어하지는 않게 됐어. 뭐, 꼭 좋아한다는 아니지만 정원에 한 귀퉁이에 무리 지어 있으면 예쁘더라고." 일단 한 발자국은 물러 났다. 그리고 에키네시아에 대한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강한 햇빛을 좋아하고, 건조에도 강함. 생명력이 강하며 노지 월동에 탁월함이 내가 공부한 결과. 그런데 여기서 하나를 더해 본다면 에키네시아는 적응력도 매우 뛰어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본성은 저러할진대 불행하게도 저 아이가 자리 잡은 저 구역은 갑자기 광량이 줄어든 환경의 변화가 생겼단 말이다. 그래서 싹 다 사라질 줄 알았는데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사부작거리면서 생의 2막을 준비하고 있었단 말이다. 여기에서 감동 한 번 해 주시고 나는 한 발을 더 물러서게 된다. "북쪽으로 있는 정원이 좀 휑하고 잡풀만 계속 올라오는데 확실히 손이 덜 간단 말이야. 그러니까 에키네시아를 심자." 에키네시아를 예뻐하는 걸 넘어서서 신뢰하게 됐다. 너라면 할 수 있을 거야. 이번에는 열정을 담은 요란한 색깔의 에키네시아로 심어보자. 부디 잡풀이 창궐한 이곳을 나를 도와, 우리 함께 강렬한 에키네시아 군대를 만들어 보자고.
에키네시아도 종류가 다양했다. 분홍색의 복고 느낌 나는 꽃 말고 패럿이라는 이름의 에키네시아를 심었다. 그리고 이 아이들이 몇 년에 걸쳐 덩치를 키워줄 것을 기대한다. 너는 잡풀 천지인 노잼 공간을 요란한 힙한 공간으로 만들 임무를 충실히 실행하길 바란다. 모든 지원은 아끼지 않으마. 부디 너만 믿는다.
그리고 또 한 번의 뒷걸음질. 에키네시아 팔리다 모종을 열 포트 샀다. 사실 어디에 얘들의 집을 만들어 줄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무한 신뢰와 승리를 위한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각오로 데려 왔다. 이번 아이들의 임무는 정원 전체의 리듬감 만들기. 덩어리가 커진 초화들이 정원의 분위기를 무겁게 하고 있다는 판단이 들었다. 그렇다고 들어낼 수도 없고 덩어리들과 덩어리들 사이를 가볍게 연결시켜 줄 무언가가 필요했는데 그 역할을 팔리다에게 맡기기로 했다. 여린 줄기와 가늘게 갈라져 아래로 쳐져 내린 듯한 꽃잎이 덩어리들 사이에서 찰랑거리는 모습을 상상해 보는데 참으로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험 삼아 덩치가 커진 아스틸베 사이사이에 끼워 심어 놓고 내년을 두고 볼 생각이다. 예상대로라면 아스틸베의 꽃이 지고 잎의 덩이만 남았을 때 팔리다가 필 것 같다. 그리고 이 실험이 성공한다면 팔리다 옆에 훌라댄서를 같이 심어서 컬러의 리듬감도 만들어 내야지.
참, 촌스럽고 강한 분홍색 에키네시아가 9월 말 올해의 마지막일 것 같은 꽃을 한 송이 피웠다. 그것도 반음지라고도 할 수 있는 반양지 구역의 경계면에서 말이다. 발견한 순간 "독한 것. 그래서 기특한 것." 하면서 눈을 흘겨줬다.
그런데 에키네시아를 엄청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강한 생명력과 성실한 미션 수행 능력을 높이 평가할 뿐이다. 한동안은 그럴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