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도에 대하여.
도대체 엄마를 이해할 수 없었다. '외할머니'의 무덤에 핀 '할미꽃'이 제일 예쁘더라는 얘기가 순수하게 들리지 않았다는 뜻이다. 할미꽃이면 할미꽃이지 왜 굳이 '외할머니 무덤에 핀 할미꽃'이냐는 거다. 뭔가 되게 신파적인 냄새가 나기도 하고, 엄마말을 죽어라 안 듣는 딸의 입장에서라면 이 말은 '너도 나 살아있을 때 잘해라'라는 무언의 압박이자 이후 나올 잔소리의 계획적인 빌드업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엄마 말에 의하면 사춘기만 10년을 '앓았던', 누가 보지만 않는다면 몰래 '내다 버리고 싶은' 딸은 엄마의 말이 그렇게 들렸다. 그리고 30대 초반의 에너지가 넘치는 젊은 여자에게 할미꽃은 예쁜 꽃이라고 보기는 좀 어렵지 않은가? 너무 처량하잖아. 꽃이 꽃대는 얇다래가지고 큰 얼굴을 주체하지도 못해서 땅을 보고 피어 있는 모양새 자체가 너무 처량 맞을 뿐만 아니라 그...... 팥죽색. 중년 아줌마들 입술에서나 볼 것 같은 그 색깔도 마음에 안 들었단 말이다. 게다가 다시 한번 말하지만 왜 '외할머니의 무덤에 있는 할미꽃'이냐고? 엄마의 억지 신파와, 계획적인 잔소리 빌드업과 처량 맞은 모양새와 뭔가 아득바득 쿨하지 못해 보이는 중년 아줌마스러운 색깔까지 더해진 할미꽃이 도대체 뭐가 예쁘다는 건지 당최 이해할 수가 없었다고는 했지만 인정하지 싫었다는 게 맞을 거다. 시간이 지나서 보니. 그리고 이후에도 꽤 오랫동안 할미꽃은 내가 '의식적으로' 별로인 꽃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정말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정원을 갖게 되면서 가장 첫 해에 심은 꽃이 할미꽃 한 포트였다. 지금도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때 내가 왜 할미꽃을 심었는지 이유를 알 수가 없다. 왜지? 왜 심었지? 우연히 뉴스로 접했던 동강 할미꽃에 대한 얘기 때문에 그랬을까 싶기도 하지만 내가 왜 엄마에 대한 열띤 반항의 증거였던 할미꽃을 내가 직접 내 정원에 심었는지 심지어 위치도 서재의 내 바카라상에 앉으면 바로 보이는 그 위치에 심었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게다가 동네의 여기저기 드문드문 피어있는 걸 보면 이거 우리 집 애인데 왜 여기에 혼자 와 있어? 하면서 애잔한 마음이 들기도 하고(엄마를 잃은 미아 같은 그런 마음이 든다) 정말 놀라운 것은 누군가에 무덤에는 우리 집 할미꽃(이라고 나는 강력하게 믿고 있다)이 떼로 피어있더라. 그걸 보고는 아! 우리 집 애들인데 왜 여기서 떼로 아까워. 데려갈까? 싶은 애틋한 마음마저 든다는 것이다. 더 이해가 안 되는 점은 다음 해 할미꽃 동강과 유령을 더 들였고 얼마나 애지중지하면서 꽃이 피기를 바랐는지 애들이 자리 잡은 주변으로 잡풀하나 나지 않게 했고, 땅이 마를세라, 잡풀이 자랄세라 얼마나 멀칭에 신경을 썼는지 모른다. 씨앗이 바람에 날릴 때면 너무나도 안타까운 마음이 되어 제발 멀리 가지 말라고, 바람을 타고 날다가 결국 떨어지는 곳은 내 울타리 안이어야 한다며 바라고 바랐다. 안 돼, 아가 멀리 가면 안 돼. 집을 떠나가버리면 미아가 된다고! 아무리 애가 타게 애원을 해도 아가는 바람을 타고, 안녕을 고하며 나풀거리며 날아가기 바빴다. 매정한 것. 정원에 토목 공사를 꽤 크게 해야 했을 때는 왜 하필이면 공사 장소가 할미꽃 무리가 피어 있는 주변을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었는지 내 꽃, 내 소중한 할미꽃을 제발 지켜달라며 공사를 진행하던 기사님들의 행동 하나하나를 째려보기도 했다.
도대체 왜? 왜 그렇게 되어버렸는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다. 나도 모르겠다.
20대에는 꽃선물을 좋아하지 않았다. 일단은 꽃이 예쁘다는 생각도 없었을뿐더러 그게 받을 때는 기분이 좋을 수도 있겠으나 그것이 갖고 있는 행복의 기대 가치는 이틀 정도? 또한 그것이 시들어버리는 모습. 그리고 가차 없이 쓰레기통에 처박힐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운명의 과정을 생각하면 꽃선물은 너무 잔인하다고 생각이 됐다. 이러한 생각이 드는 순간부터 어버이날 카네이션조차 선물하지 않았다. 아마도 10대 시절 즉, 엄마가 말하던 10년을 앓았던 사춘기 시절도 포함이 되어 있었을 거다.
그리고 사춘기를 앓던 시절,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었던 시절 우연히 들었던 가곡의 한 대목 '목련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지 읽노라.'의 그 구절이 귀에 꽂혔던 시절 목련이 어땠지? 하는 생각이 들던 시절, 탐스러운 봉오리가 열리자마자 무참히 떨어져 밟히는 꽃잎을 보는 순간 아! 나는 정말 너무 슬펐다. 망할 놈의 꽃의 운명. 우연히 어떤 팝 칼럼니스트의 글에 목련을 보고 '창녀가 되어 버린 첫사랑'이란 표현이 기가 막히게 들어맞는다는 생각도 했다. 꽃이 그렇다. 절정의 순간을 지난 후에는 말할 수 없이 처참해진다. 풍성함에도 상스럽지 않고 우아하기만 한 작약의 끝은 어떠냐? 힘이 빠진 꽃잎들은 한순간에 후드드드 떨어져 버린다. 허무해. 그래, 허무하다. 허무가 맞다.
그러다가 서정주 시인의 '선운사 동구'를 봤다. 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이끌려서 선운사에 동백을 보러 갔다. 그리고 서러운 육자배기 가락을 마주하는 순간 꽃의 죽음에 대한 새로운 감정을 느꼈다. 처연하다. 그래서 서럽다. 동백은 꽃의 모습이 그대로 '툭' 떨어진다. '흐드드'가 아니라 꽃이 그 모습 그대로 자기가 있던 몸체 주변으로 툭 떨어진다. 그래서 작년 것의 서러움이 남았던 거였다. 그 모습이 비장하면서도 처연하고, 뭔가 다 피지 않은 것이 너무 이르게 간 것이 아닌가 싶은 마음에 서러움도 느껴지더라.
절정이 지난 것들의 끝이 다 추하고 잔인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다른 마음도 생기더라는 것을 저릿한 마음으로 봤더랬다.
왜 할미꽃을 내 정원에 심게 되었고, 어떤 이유로 애틋한 마음을 갖게 되었고, 무슨 마음이 할미꽃을 유심히 보게 되었는지는 아직도 답을 찾지 못했는데 중요한 점은 할미꽃이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 내 눈에 들어온 시점이라는 것이다. 할미꽃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꽃의 순간이 아니었다. '순간'이라는 말도 어울리지 않는다. 할미꽃은 아름다움의 '과정'이 있다. 그리고 꽃의 순간은 그 과정으로 가는 도중이라는 것이다.
할미꽃은 절정의 순간은 여리다. 자기 얼굴도 주체하지 못할 정도의 여린 꽃줄기는 한껏 구부러져 얼굴을 땅을 향한다. 꽃잎이 땅에 닿겠는데 싶을 정도로 구부러져 있지만 애써 얼굴을 떨궈내지 않으려는 그 가는 줄기가 안쓰러울 정도인데 색깔은 모순적이게 강하단 말이다. 엄마 말을 죽어라 안 듣던 시절 아득바득한 중년 아줌마의 입술 색깔을 떠올렸던 이유는 아마도 단지 색깔만이 아니라 모양새와 색깔이 이루는 모순의 순간을 느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할미꽃의 일생에 대한 관찰이 부족했던 유치한 시절의 유아적 발상이었다. 땅을 보며 꽃을 피운 할미꽃의 진짜 모습은 다음부터 나온다. 짧은 절정의 시간을 끝낸 할미꽃은 그대로 오므라져 말라 작은 조각이 되어 떨어져 흙과 섞여 꽃잎의 끝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다. 대신 무거운 얼굴을 떼고 난 이후 가늘고 여린 줄기는 고개를 들기 시작하는데 점점 길어지고, 굵어지고, 강해진 줄기가 드디어 고개를 하늘로 향하게 되면 제가 할 수 있을 만큼 가장 높은 곳까지 고개를 뻗어낸다. 그리고 최선을 다해 힘껏 뻗어 난 줄기는 꽃잎이 떨어져 나간 씨방 안에 어린 씨앗들이 자랄 수 있게 햇빛을 담뿍 먹여 키운다. 잘 성장한 씨앗들이 이제는 제 살길을 찾아가야 할 즈음에 할미꽃은 아기들에게 선물을 준다. 숨겨진 날개깃을 주고 그 안에 바람을 잔뜩 담을 수 있게 준비해 준다. 마치 이 순간을 위해 여린 잎사귀가 언 땅을 뚫고 나오는 사투를 벌이고, 청승맞다는 오명을 견뎌냈다는 듯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숭고한 끝을 준비한다.
우리 엄마는 할미꽃의 끝을 봤을까? 물어봐야지. 그런데 아마도 못 봤을지도 모르겠다. 몇 해 전부터 엄마는 "네 정원의 작약 말이야." 하며 작약을 너무 사랑하는데 내년에는 할미꽃의 숭고함을 보여야겠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