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초킨 크리스티나의 베일.

제거할 수 없다면, 피해 가면 되지.

by백경화

작년부터였나? 집안에 새끼손톱만 한 풍뎅이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재작년까지는 못 본 것 같은 딱정벌레도 같고, 풍뎅이도 같은 것들이 정원 곳곳에서 발견이 됐다. 단지에 이사 오는 사람들이 늘어나기도 했고, 옆집은 텃밭 농사를 많이 지으니까 그 영향인가 싶기도 했고 여하튼 정원 어디에는 이놈의 풍뎅이들이 눈에 보였다. 벌레가 귀찮긴 하지만 모기가 아닌 이상 우리 집은 워낙 관목류도 초화류도 많으니까 건강한 생태계의 움직임이겠거니 하고 생각했다. 벌레쯤이야, 뭐.

그러고 보니 풍뎅이뿐만 아니라 딱 고만한 애들도 몰렸더랬다. 처음에는 무당벌레인 줄 알았다. 우리 집엔 장미가 많으니까 무당벌레가 있다는 건 좋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그러려니 했단 말이다. 그래도 어디서 주워들은 건 있어가지고 무당벌레는 장미를 재배하는 농장에서는 돈을 주고 사서 풀어놓기도 한다는데 스스로 날아와 주니 '개꿀'이네 했다. 작약도 봉오리에서 꽃을 피우기 직전 끈적거리고 달큰한 즙이 나오면 개미들이 몰려들어서 단 즙을 빨아먹고, 개미들의 활동으로 수월하게 꽃을 피운다고 하니 무당벌레라고 확신했던 것들의 역할로 비실비실한 우리 집 장미들은 엄청 건강할 거란 기대도 됐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장미로 가야 할 무당벌레가 아스파라거스에 모여있었다. 그리고 걔들이 앉았던 곳의 아스파라거스는 상해 있었다. 무당벌레는 육식성 아닌가? 가만 보니 무당벌레보다 작은 것 같고, 몸통도 동그랗기보다 좀 길쭉한 것이 무당벌레 아기인가? 아기들은 식물의 즙을 빨고 자라서 성충이 되면 육식을 하나? 벌레에 대해 뭐 아는 게 없으니 주워들은 썰을 이리저리 굴리다가 성충이 되면 기특한 일을 할 애들이니까 아스파라거스 정도는 나눠 먹어도 되지. 이런 순진하고 낭만적인 나의 생각은 이것들의 적당히가 없는 탐욕스러운 먹성에 항복을 했고, 마침내 이것들의 정체가 아스파라거스 벌레라는 해충이라는 것을 알게 된 후 농약 살포로 끝을 맺었다. 한 번으로도 모자라 두 번 살포했다. 그리고 매해 봄이 오고 아스파라거스가 커갈 무렵, 한 마리라도 눈에 보이게 되면 바로 약을 살포한다. 벌레는 적당히가 없다.

드디어 비실거리면서 빈약한 꽃만 한 두 송이 보여주면서 해만 보내던 헤르초킨 크리스티나가 꽤 기대되는 봉오리를 물었다. 그때 그 손톱만 한 풍뎅이, 그전에는 보지 못했지만 갑자기 나타나기 시작한 그 풍뎅이가 몇 년을 비실비실하다가 겨우 제대로 생긴 봉오리 하나를 문 헤르초킨 크리스티나를 주변을 맴맴 거렸다.

자연이란 자고로 서로 공생하는 개미와 작약 같은 사이, 무당벌레와 장미 같은 사이로, 엄지손톱만큼 작은 청개구리가 꽃잎에서 잠깐 쉬어가기도 하는 그런 것이 건강한 생태계가 나의 정원이라고 생각하니 뿌듯했다. 호박벌은 펑퍼짐한 궁둥이에 꽃가루를 잔뜩 묻히고 꿀을 빨다 포만감에 지치면 꽃잎 속에서 자고 간다고도 하는데 풍뎅이도(호박벌만큼 귀엽게 생기진 않았지만) 헤르초킨 크리스티나의 향기와 부드러운 꽃잎에 안락함을 느끼며 잠시 쉬어갈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아스파라거스 벌레의 교훈 따위는 이미 휘발되어 버린 그냥 낭만적인 무지렁이만 있을 뿐이었다.

낭만을 버린 현실 속에서 이 망할 놈의 풍뎅이 놈들이 얼마나 파렴치하냐면 일단 이놈들은 봉오리 시절부터 꽃잎에 구멍을 뚫어 놓고 무단 점거를 시작한다. 그리고 이놈들의 주둥이와 발이 닿는 곳은 여지없이 누렇게 상해 들어가기 시작한다. 풍뎅이들이 유독 헤르초킨 크리스티나에게만 무자비 한 건지 다른 장미들은 꽃잎이 뜯어 먹혀도 누렇게 색이 변한 채 제 수명을 다하고 떨어지는 것 같던데 헤르초킨 크리스티나는 봉오리 시절부터 풍뎅이에게 유린당한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처참하게 죽어나갔다. 마치 극악한 일진에게 속수무바카라으로 당하는 힘없는 아이를 보는 것 같달까? 보기가 괴로웠다. 이 불쌍한 애를 구해주려 약을 쳐도 소용이 없었다. 약을 치는 하루 정도 피신해 있다가 약발이 떨어진다 싶으면 다시 몰려들어 그 사이에 열린 꽃잎 사이사이에 파고 들어가 또다시 숙식을 시작하며 꽃을 탈탈 털어 먹었다. 풍뎅이의 숙식을 위해 헤르초킨 크리스티나를 키우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그것들은 파렴치하고 무자비한 계획범들이었다. 꽃이 죽어야 끝이 난다. 아니, 안락한 생활을 하게 해 줬으면 살려는 줘야 되는 거 아닌가? 파렴치하기 짝이 없는 놈들이 아닐 수 없다. 더 약이 오르는 건 같은 장미일지라도 꽃잎이 두껍고, 홑꽃으로 피는 애들한테는 살짝 발만 담그고 온다는 점이다. 만만한 애들한테만 기생해서 달라붙어 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장미꽃의 수액과 꽃술을 파 먹고사는 놈이라면 어느 정도 상처를 입어도 끄떡없는 센 놈들한테 가라고. 왜 꼭 약한 녀석한테 들러붙어서 끝장을 보려는 거냐고 너무 야비한 거 아니냐고!

약을 쳐도 안 되고, 상대가 약하다는 걸 알고 덤비는 것 같은 교활한 풍뎅이들의 출입을 금지시킬 수는 없으니 방법은 약한 놈을 방출시키자는 쪽으로 생각이 굳어져 갔다. 아무래도 헤르초킨 크리스티나가 풍뎅이들을 끌어들이는 것 같고, 풍뎅이들이 일단 발을 들인 이상 다른 애들도 상처를 입고 어쩌면 저 교활한 놈이 장미 전염병을 옮길 수도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확장되어 갔다.

'헤르초킨 크리스티나를 파 버려야겠어.'

가슴 아프지만 정원의 장미 전체를 건강하게 살리려면 결단을 내려야 했다. 그러던 중 말에게 씌우는 플라이 마스크가 생각이 났다. 통풍은 되고, 가벼운데 풍뎅이의 침입을 막는 망이 있다면 그걸로 꽃을 보호할 수 있겠다. 벌이랑 나비들이야 꼭 얘가 아니어도 되고, 얘 역시 열매를 맺을 필요가 없으니 나는 오로지 피해자를 보호하는 데에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 피해자가 더 큰 피해를 입지 않고 가해자로부터 격리되는 순간이 된 것이다.

가장 쉬운 결정을 내버릴 뻔했어. 미안해, 헤르초킨 크리스티나.

헤르초킨 크리스티나의 플라이 마스크는 육수망으로 당첨이 됐다. 다행히도 꽃을 안 피우는 몇 해 동안 줄기를 단단히 키워서 육수망의 무게 정도는 당당히 이겨낼 수 있었다. 육수망을 쓴 모습은 아기 유령 캐스퍼 같기도 했지만 겉모습은 좀 괴상할지라도 풍뎅이의 공격에는 철벽이었다. 상황을 아직 인지 못한 풍뎅이가 만만하고 안락한 공간을 찾아 돌격했지만 달콤한 향만 솔솔 풍길뿐 원하는 걸 가질 수 없으니 아마 약이 바짝 올랐을 거다. 너도 한 번 당해봐라. 이제까지는 당했지만 이제부터는 참교육 들어간다, 너의 좋은 시절은 이제 전설이 될 거다. 우리는 방법을 찾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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