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해주고도 서운했던 마음

잘해주는 마음을 잃지 않되, 나도 소중히 여겨주는 사람 곁에 남기로 했다

by고수하

나는 친구나 가족이 힘들 때 언제든 달려갈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무슨 일이 생기면 내 일처럼 마음이 쓰였고,

당장 해결해 줄 수 있는 게 없어도 일단 만나러 갔다.

내가 대단한 도움을 줄 수는 없어도 옆에 있어 줄 수는 있으니까.


나는 연인보다 친구가 우선이었던 때도 많았다.

연인들이 친구를 더 챙기는 나를 질투하기도 했지만, 내게 친구는 그만큼 소중한 존재였다.

연인보다 먼저 알고 지낸 시간이 길기도 했고, 함께 쌓아온 추억도 많았다.

그래서 친구와 약속을 잡고, 고민을 들어주고, 무슨 일이 생기면 시간을 내어 달려가는 일이 자연스러웠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힘들 때만큼은 혼자 두고 싶지 않았다.

나중에 돌아봤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게 있었는데도 하지 못했다는 후회는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친구들에게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


그런데 가끔은 서운했다.

나는 이렇게까지 마음을 쓰는데, 왜 나만 애쓰는 것 같을까.

내가 먼저 손을 내밀지 않으면 이 관계는 어떻게 되는 걸까.

연인 사이에도 해본 적 없는 고민을 나는 우정 사이에서 하고 있었다.


물론 모든 친구가 그랬던 건 아니다.

내가 힘들 때 먼저 찾아와 준 친구도 있었고, 내 이야기를 진심으로 들어주고 응원해 주는 친구들도 있었다.


지금도 내가 힘든 일을 겪을 때마다 잘할 수 있다고,

너는 혼자서도 잘 해낼 사람이라고 말해주는 친구들이 있다.

그런 마음을 받을 때면 나 역시 누군가에게 소중한 사람이라는 걸 느낀다.


다만 일부 관계에서는 내가 먼저 사과하고, 먼저 연락하고, 관계를 풀기 위해 애쓰는 일이 반복됐다.


나는 관계가 어색해지는 걸 싫어해 오해가 생기면 풀고 싶었고,

다투더라도 불편한 채로 지내기보다는 먼저 사과하는 편이었다.


내가 잘못한 부분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걸 먼저 인정하고,

그렇게라도 관계가 괜찮아지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면 서운해질 때가 있었다.

내가 먼저 사과하는 게 어느 순간 당연한 일이 된 것 같았다.

내가 관계를 풀려고 노력하는 동안 상대는 가만히 있어도 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내가 바랐던 건 모든 친구가 나와 똑같은 방식으로 마음을 표현하는 것도,

내가 해준 만큼 정확히 돌려받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서로의 관계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지내다가 결국 연을 끊은 친구들도 있었다.

친구와의 관계를 끝내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상대방의 잘못이 분명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음이 바로 정리되지는 않았다.

한때는 가까웠던 사이였고, 함께 보낸 시간도 있었으니까.


한 번은 친구와 절교하면서 마지막 선물을 준 적도 있다.

나는 이미 이 선물을 마지막으로 더는 만나지 않을 거고, 연락도 하지 않을 거라고 마음먹은 상태였다.

다시 잘 지내고 싶어서 준 선물은 아니었다.

내 나름대로는 마지막 호의였고,

여기까지가 내가 너에게 해줄 수 있는 마지막 마음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하면 조금 웃긴 것 같다.

더는 보지 않기로 한 사람에게 마지막까지 선물을 주었다니.


그때는 그렇게 끝내고 싶었던 것 같다.

관계는 여기서 끝내더라도,

내가 그 사람을 소중하게 생각했던 마음까지 없었던 일로 만들고 싶지는 않았던 것 같다.

적어도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인사는 쿨하고 멋지게 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그런데 관계를 끝낸다고 해서 마음까지 바로 정리되는 건 아니었다.

연을 끊은 친구들이 꿈에 나오기도 했다.

상대방의 잘못으로 끝난 관계였는데도 며칠씩 꿈에 나와 나를 괴롭혔다.

현실에서는 더는 연락하지 않기로 했는데, 꿈속에서는 여전히 그 사람과 마주하고 있었다.


꿈에서 깨고 나면 이미 지나간 일인데도 다시 그때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이제 그만 생각하고 싶은데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그러다 일주일, 보름, 시간이 조금 지나면 괜찮아졌다.

어느 순간 그 친구가 더는 꿈에 나오지 않았고, 문득 생각나더라도 예전처럼 마음이 쓰이지 않았다.

다시 만나고 싶다거나 그립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관계를 이어가는 동안에는 내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

먼저 손을 내밀기도 했고, 마음을 쓰기도 했고, 끝내기로 했을 때는 마지막 호의까지 건넸다.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모든 걸 했으니 더 이상의 아쉬움이나 미련이 남지 않았다.


물론 모든 관계가 그렇게 깔끔하게 정리되지는 않는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고 나면 더는 그 관계를 붙들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때의 나는 그 사람을 소중하게 생각했고, 그 마음에 진심이었다.

그 사실까지 부정할 필요는 없으니까.


‘사람의 밑바닥을 보고 싶으면 그 사람에게 잘해줘 보라’는 말이 있다.


나는 이 말을 들으면 조금 다른 생각을 한다.

누군가에게 잘해주는 건 그 사람의 본모습을 시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그렇게 하고 싶은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다만 내가 건넨 마음을 상대방이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는 알 수 있다.

내 호의를 당연하게 여기는 사람인지, 고마워할 줄 아는 사람인지.

나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배려해 주는 사람인지.


나는 이제 내 마음을 고맙게 받아주고,

나 역시 소중하게 대해주는 사람들에게만 더 이렇게 마음 써보기로 했다.


그렇다고 앞으로는 누구에게도 서운하지 않을 거라는 뜻은 아니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여전히 마음을 쓰게 될 테고,

때로는 내가 준 마음만큼 돌아오지 않아 서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람을 좋아하는 마음이 늘 깔끔하고 계산적일 수는 없으니까.


다만 이제는 서운한 마음이 들 때마다 내가 조금 더 참으면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고,

관계를 지키는 일이 언제나 내 몫인 것처럼 행동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친구나 가족이 힘들 때 언제든 달려갈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잘해주는 일이 내게도 기쁜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도 누군가에게 편하게 기댈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내가 먼저 손을 내밀지 않아도 내 손을 잡아주고, 나 역시 소중하게 여겨주는 사람들 곁에 있고 싶다.


앞으로도 나는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잘해주고 싶다.

사소한 마음을 기억하고, 힘든 일이 생기면 먼저 손을 내밀고, 받은 마음에는 고맙다고 말하면서.


모든 관계를 끝까지 지켜내지는 못하더라도, 내가 진심이었다는 사실까지 후회하고 싶지는 않다.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마음을 다했다면, 그다음은 놓아주어도 괜찮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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