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워서 찢어버렸던 기록들을 이제는 남겨두기로 했다.
생각해 보면 고등학교 때부터
기록하는 걸 좋아했던 것 같다.
친구랑 싸운 이야기,
학교에서 있었던 일.
그리고 가끔 관심이 가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도 적었다.
나는 원래 외모를 꽤 많이 보는 편이었다.
학교에서 괜찮은 사람이 있으면
'저 사람 좀 괜찮은 것 같은데?'
하고 혼자 관심을 갖곤 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건 좋아하는 게 아니라
그저 단순한 호기심에 가까웠다.
저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
친해지면 어떨까 하며
그저 조금 궁금했던 것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관심은 역시 오래가지 않았다.
며칠 지나면 또 다른 것에 관심이 생겼고,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
그 사람은 내 관심 밖으로 사라졌다.
문제는 한참 뒤에 일기를 다시 펼쳤을 때였다.
'이게 뭐야... 왜 이렇게 썼어!'
지금보다 더 감성적이었던 나는 일기에
그 사람을 정말 좋아했던 것처럼 써놓은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렇게 좋아한 게 아닌데...'
그때는 그냥 괜찮아 보여서 관심을 가졌던 게,
일기 속에서는 세상 진지한 사람처럼 보였다.
나는 그게 너무 싫었다.
그 기록이 너무 꼴 보기 싫어서 찢어 버렸다.
그냥 그 기록을 없애고 싶었다.
그렇게 버리면 그 말도 안 되는 기록의 과거가
사라지는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조금 웃긴 것 같다.
그때의 나는 기록을 남기는 것보다 기록을 지우는 데 더 열심이었던 것 같다.
마음에 들지 않는 과거는
버려 없애버리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나중에 일을 하면서
다시 다이어리를 쓰기 시작했다.
이번엔 쓰는 이유가 달랐다.
무언가를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썼으니까.
오늘은 내가 뭘 했는지, 어떤 일을 했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적어두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다이어리를 다시 펼쳐봤는데,
예전과는 전혀 다른 생각이 들었다.
'나 열심히 살았네..'
내가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지 다른 사람들은 잘 모른다.
내가 얼마나 많은 일을 하고, 얼마나 고민했는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일을 얼마나 붙잡고 있었는지.
그런 것들은 내가 제일 잘 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기록이 없으면 나조차도 잊어버린다.
'그래서 네가 뭘 그렇게 열심히 했는데?'
누군가 물으면 막상 내놓을 게 없다.
기억은 생각보다 쉽게 흐려지고,
말은 지어낼 수 있는 거니까.
그때부터 기록이 조금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잘한 것만 남기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있었던 일을 남겨 두는 것.
오늘의 내가 별것 아니라고 생각하는 일도 적어두는 것이 필요하다고.
나중에 보면 우습게 느껴질 수도 있고,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일단 남겨두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나니 고등학생 때 찢어버렸던 일기도 조금 아쉬웠다.
그 시절 쓴 것들을 다시 생각해 보면,
그냥 또래 애들처럼 누군갈 좋아해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던 것 같다.
나도 누군가를 좋아하는 평범한 10대 아이처럼 지내고 싶었고,
그런 모습으로 그 무리에 잘 섞이고 싶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도
그때의 내가 나를 지키는 방법이었을지 모르겠다.
지금의 내가 그걸 보고
'뭐라는 거야..'라고 생각할 순 있어도
그때의 나까지 틀렸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 시절 나는 그때의 내가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사람들 사이에 섞여,
나를 지키고 있었을 테니까.
그런 모습까지 다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나니
더 이상 나는 내 기록을 버리지 않는다.
창피한 기록도 그냥 둔다.
내가 그때 어떤 생각을 했고, 누가 곁에 있었으며,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지
나중의 내가 지금의 나를 이해할 수 있도록 말이다.
기록을 하다 보면 내가 나를 조금씩 알게 된다.
나는 무엇에 오래 마음을 쓰는 사람인지,
무엇에 금방 질리는 사람인지,
어떤 말에 감동하는지,
어떤 순간에 힘이 나는지.
그리고 내가 생각보다 열심히 살아왔다는 것도 알게 된다.
기억만으로는 알 수 없었던 나를 기록이 알려준다.
그래서 요즘은 다이어리를 쓰면서 과거의 나를 지우는 대신 조금 더 오래 바라본다.
가끔은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
'그때 왜 그랬지?'라는 생각이 들면
그냥 뭐 이땐 이랬구나 하고 웃고 넘긴다.
나중의 내가 지금의 나를 보며
'이 글도 참 웃기네 ㅎㅎ' 싶을 수 있겠지만,
이번에는 지우지 않고 그냥 잘 남겨두려고 한다.
그때의 나도 나였고,
지금의 나도 나니까.
그리고 지금의 내가 언젠가 또 과거의 내가 될 테니까.
나중에 이 글을 다시 읽게 될 미래의 나도
'이때는 또 이랬네 ㅋㅋ'하고
웃어넘길 수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