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불쾌해도 웃고, 잘못해도 웃었다
미소가 가장 비겁하고 교묘한 무기로 쓰이는 순간은 역설적이게도 ‘내가 명백한 잘못을 저질렀을 때’다.
타인의 무례함을 방어하기 위해 억지로 웃었던 날들도 억울하지만 내 실수와 바카라임을 회피하기 위해 슬그머니 입꼬리를 올렸던 순간을 떠올리면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을 만큼 지독한 수치심이 밀려온다.
사람은 혼이 나거나 궁지에 몰릴 때 의외로 아주 이상한 반사신경을 작동시킨다. 민망해서, 당황해서, 혹은 자신을 짓누르는 그 무겁고 싸늘한 공기를 어떻게든 가볍게 만들어보고 싶어서 기어코 입꼬리를 끌어올리는 것이다. 나 역시 그렇게 웃음 뒤에 숨는 사람이었다.
대학 시절, 나는 그 부끄러운 방어기제의 민낯을 아주 차갑게 마주한 적이 있다. 전공 과제 제출일이었는데 나는 마감 시간을 넘겨 지각 제출을 한 데다 심지어 교수님이 요구한 문서 양식조차 제대로 맞추지 못한 최악의 상태였다. 조교는 내 과제를 한 장 한 장 넘겨보더니 미간을 찌푸리며 조용히 말했다.
“제출 시간도 지났고, 양식도 다 틀렸네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변명의 여지없이 “죄송합니다”라며 진중하게 고개를 숙여야 했다. 그런데 내 입은 뇌의 통제를 벗어나 또 멋대로 움직였다.
“아, 네… 하하. 죄송합니다.”
나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멋쩍은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기괴한 노릇이다.
명백하게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도대체 왜 웃고 있었을까. 상대가 교수님도 아니고, 내가 사람 좋게 헤헤 웃으며 애교 섞인 사과를 건네면 상대방도 ‘학생이니까 그럴 수 있지’라며 적당히 둥글게 넘어가 줄 거라는 오만한 착각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조교는 내 어설픈 미소에 결코 동조해주지 않았다. 오히려 내 웃음기를 단번에 얼어붙게 만드는 서늘한 일침을 날렸다.
“웃으면서 넘길 일이 아니에요. 잘못을 했으면 웃지 말고 사과를 해야죠.”
순간 얼굴에 뜨거운 불길이 확 번지는 것 같았다. 정곡을 찔렸기 때문이다. 상대방은 내게 행동에 대한 바카라임을 묻고 있었는데 정작 나는 그 무거운 바카라임을 짊어지는 대신 웃음으로 분위기부터 수습하려 들었던 것이다.
조교의 그 한마디는 오래도록 남았다. 잘못을 했으면 그냥 잘못했다고 말하면 되는 일이었다. 굳이 웃으면서 분위기까지 풀어보려고 애쓸 필요는 없었다. 오히려 그 웃음 때문에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보다 이 상황을 어떻게 빨리 모면할지만 신경 쓰고 있었다는 사실이 더 선명하게 드러났다.
돌이켜보면 우리는 일상에서도 이런 식으로 웃음을 사용한다.
약속 시간에 늦어놓고 헐레벌떡 뛰어와서는 “아하하, 차가 얼마나 밀리던지...”라며 넉살 좋은 웃음으로 퉁치려 하거나, 회의에서 준비 부족이 탄로 났을 때 진중하게 인정하는 대신 “그 부분은 미처 확인을 못 했네요, 죄송합니다”하고 억지웃음을 흘리기도 한다.
정색하고 사과하면 내 흠집이 너무 무겁게 공식화될까 봐 두려워서 가벼운 웃음으로 내 잘못의 무게마저 덜어내려는 것이다. 잘못을 인정하는 것보다 잘못한 사람으로 보이는 순간이 더 불편해서다.
하지만 웃는다고 잘못의 무게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어색해도 괜찮고, 민망해도 괜찮고, 잠깐 무거운 공기가 흘러도 괜찮았다. 그 순간 필요한 것은 분위기를 풀어주는 웃음이 아니라 내가 한 일을 그대로 인정하는 태도였다.
생각해 보면 나는 그동안 웃음으로 참 많은 것을 덮으려고 했다. 상대가 무례했을 때도 웃었고, 불편한 상황에서도 웃었고, 심지어 내가 잘못했을 때조차 웃었다.
그러고 보니 내게 웃음은 즐거움의 표현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어쩌면 나는 웃는 것으로 그 모든 불편한 감정들을 피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