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불쾌해도 웃고, 잘못해도 웃었다
온라인 게임 생활을 하다 보면 종종 ‘좋은 사람’과 ‘편리한 사람’의 경계를 착각하는 순간이 온다.
타인과 껄끄러운 갈등을 빚기 싫어서, 혹은 무리에 섞여 무던하고 협조적인 동료로 남고 싶어서 우리는 속마음과 다르게 입꼬리를 올린다. 문제는 그 순간에는 배려처럼 보였던 선택이 시간이 지나면 고스란히 내 몫의 대가가 되어 돌아온다는 것이다.
과거 기자로 일하던 시절 나는 내 발로 그 ‘편리한 사람’의 길로 걸어 들어간 적이 있다.
당시 우리 회사에는 주말 당직 시스템이 공식적으로 존재하지 않았다. 원칙대로라면 온라인 뉴스팀을 따로 꾸려 주말 기사를 처리하는 것이 맞았지만, 회사는 당연히 인건비를 아끼고 싶어 했다. 사장은 주말에도 기사가 올라오지 않는다며 수시로 불만을 터뜨렸고 중간에 낀 상사는 사장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슬그머니 주말 근무를 제안했다.
기자라는 직업 특성상 대형 사건·사고나 긴급한 속보가 터졌을 때 노트북을 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별다른 이슈가 없는 평범한 주말과 휴일마다 평소처럼 기사를 처리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돌아가면서 주말에도 기사 좀 챙겨보는 거 어때?”
말끝을 흐리는 상사의 제안은 애매한 말투와 달리 무슨 뜻인지 너무나 분명했다. 계약서에 없는 노동이었고 당직비나 대체 휴무 같은 정당한 보상이 주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사실 나는 그 자리에서 처음 문제를 제기한 것도 아니었다. 주말마다 돌아가며 기사를 처리하는 방식이 부당하다는 이야기를 여러 번 했고 “그건 온라인팀을 따로 꾸려서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도 말했다.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상사는 사장의 눈치를 보고 있었고 사장은 주말에도 기사가 올라오기를 원했다. 결국 내 말을 아무리 해봐야 달라질 것이 없다는 걸 나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나는 이미 직감하고 있었다.
‘결국 해야겠구나.’
그런데도 막상 상사가 다시 말을 꺼내자 나는 하기 싫다면서도 또 웃었다.
“하……. 일단 할게요.”
주말 근무가 좋아서가 아니었다. 회사에 충성하고 싶어서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내가 부당하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도 아니다.
그저 더 따지고 싸워봐야 답이 나오지 않을 것 같았다. 이미 몇 번이나 이야기했지만 바뀌지 않았고 그때마다 계속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으로 남는 것도 피곤했다.
‘어차피 해야 할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억지로 끌어올린 미소가 마치 체념의 도장처럼 내 선택 위에 찍혔다.
돌이켜보면 그때의 웃음은 ‘협조하겠습니다’라는 뜻이라기보다 ‘더 이상 싸우지 않겠습니다’에 가까웠다.
결국 그 한마디로 주말 근무는 업무가 되었다.
그런데도 나는 쉬는 날이면 습관처럼 노트북을 열었다. 주말에도 기사를 확인하고 송고하면서 속으로는 수백 번씩 회사와 상사를 욕했다. 가끔은 휴가에 가서도 노트북을 들고 기사를 쓰거나 쉬는 날 버스를 타고 이동하면서도 스마트폰으로 기사를 올렸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싫다고 한마디 말하는 건 그렇게 어려웠는데 싫은 일을 주말마다 반복하는 건 어떻게든 해냈다.
더 뼈아픈 건 그다음이었다. 조직은 호의를 오래 기억하지 않는다. 사람의 희생도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고마운 일’이었던 것이 몇 번 반복되고 나면 어느새 ‘원래 하던 일’이 되어버린다.
내가 피곤함을 무릅쓰고 주말을 갈아 넣어도 아무도 특별히 고마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가끔은 쉬고 싶어서 기사를 쓰지 않거나 주말 기사 송고를 놓치면 “왜 안 올라오냐”는 질바카라이 날아왔다.
그제야 알았다. 내가 좋은 사람으로 남기 위해 내어 준 호의가 어느 순간부터는 상대에게 당연한 권리가 되어 있었다.
나는 회사를 위해 희생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미움받지 않기 위해 내 시간을 내어준 것이었다. 그리고 그 대가는 생각보다 훨씬 컸다. 쉬어야 할 주말을 잃었고 회사에 대한 불만은 쌓였고, 정작 그 불만을 만든 사람에게는 한마디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렇게 참고 또 참으면서도 나는 여전히 ‘나는 협조적인 사람이니까’라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하면 조금 우습다. 나는 좋은 동료가 되고 싶었던 게 아니라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었던 것이다.
시간이 흘러 나는 회사를 그만뒀다. 회사는 당연히 크게 아쉬워하지 않았다. 내가 빠진 자리는 금세 다른 사람으로 채워졌다. 그제야 더 선명하게 보였다. 내가 그토록 지키려고 했던 ‘좋은 사람’이라는 이미지는 회사에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내가 바쳤던 주말과 웃음은 나를 특별한 사람으로 만들어주지도 않았다.
부당한 상황 앞에서 짓는 미소가 언제나 친절이나 배려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때로 그 미소는 그저 거절하지 못한다는 신호가 된다.
‘이 사람은 부탁해도 거절하지 않는 사람.’
‘조금 더 부탁해도 괜찮은 사람.’
‘불편한 일을 맡겨도 결국 웃으며 해내는 사람.’
나는 무던하고 좋은 동료가 된 것이 아니었다. 그저 거절하지 않는 사람, 그래서 점점 더 편리한 사람이 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