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은 어디에 있는가
춥지도 덥지도 않은 가을날이다.
나지막이 흐르는 음악을 들으며 드립커피 한 잔을 앞에 둔다. 코로 먼저 향을 음미하고 한 모금 마시니 커피가 입안으로 천천히 퍼진다. 창밖으로는 푸른 하늘이 보인다.
이런 날에는 굳이 커피의 맛을 하나하나 분석하지 않아도 좋다. 산미가 어떻고 단맛이 어떻고 하는 이야기도 잠시 접어두고 그냥 커피 한 잔이면 충분하다.
커피 맛을 잘 모를 때는 커피란 맛있거나 맛없거나, 쓰거나 부드럽거나 했다.
조금씩 커피를 알아가면서 원두는 볶는 정도에 따라 맛이 달라진다는 것을 알았다. 덜 볶으면 산미와 향이 살아나고, 더 볶으면 쌉싸름하고 묵직해진다.
같은 원두인데 불을 얼마나 만났느냐에 따라 다른 얼굴이 된다.
맛은 원두에 있는 걸까.
불에 있는 걸까.
마시는 내 혀에 있는 걸까.
‘맛.’
혀로 느끼는 감각이라는 뜻 옆에 사물이나 현상에서 느끼는 기분이라는 뜻이 있다.
우리는 음식이 아니어도 사는 맛이 난다고 하고, 글 쓰는 맛을 알겠다고도 한다.
맛이라는 단어 안에 혀와 마음이 같이 산다.
원두를 갈 때 올라오는 향, 뜨거운 물을 부을 때 피어나는 향, 한 모금 삼킨 뒤 코끝에 남는 향까지 모두 커피의 맛이 된다.
드립커피를 내릴 때 나는 마시는 순간만큼 그 앞의 시간을 좋아한다.
원두를 갈고,
필터에 담고,
천천히 물을 붓는다.
부풀어 오른 원두 사이로 향이 피어오르면 나도 모르게 코를 가까이 가져간다.
커피 한 잔에서 나는 생각보다 많은 것을 느낀다.
맛에는 기억도 들어 있지 않을까.
뉴질랜드에 사는 막내딸이 한국에 다녀갔다.
2주 남짓 머무는 딸에게 내가 좋아하는 커피를 맛보이고 싶었다. 아프리카에서 가져온 원두와 드립 도구를 챙겨 딸이 머무는 곳까지 가져다주었다.
가볍지도 않은 것들을 들고 끙끙거리며 계단을 올라갔다.
딸은 아침마다 그 원두를 갈아 커피를 내려 마셨다.
딸이 뉴질랜드로 돌아가고 나서야 내 마음을 알았다.
내가 챙겨준 것은 원두와 드립 도구만이 아니었다.
어쩌면 기억 하나를 만들어주고 싶었던 것이다.
뉴질랜드의 어느 카페에서든, 자신의 집에서든 딸이 드립커피를 만났을 때 떠오르는 맛과 얼굴이 있었으면 한다.
원두 가는 소리를 듣고,
천천히 물을 붓고,
향이 피어오르는 순간,
엄마를 떠올리면 좋겠다.
그 향을 따라 함께 보낸 시간이 잠깐 돌아왔다 가도 좋다.
언젠가 드립커피 한 잔이
딸에게 엄마를 데려다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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