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자주 독립군으로 이끈 그들의 말

서른 너머 부모로부터 독립한 까닭

by김만끽

나를 자주 독립군으로 이끈 그들의 말


- 너는 사무실에서 어떻게 하기에 남자애들이 다 너를 무서워하니?

- 남자랑 가는데, 못 가게 할까 봐 혼자 간다고 하는 거야?

- 딸년이라고 하나 있는 게 살갑기를 하나, 평생 가도 곁을 주지도 않고.


2015년 5월부터 1년여 동안 나는 아빠와 같은 집에서 한 부동산투자회사에 다녔다. 부동산경매로 낙찰받은 물건을 부동산 시장에 내놓아 매매 수익을 얻는 구조의 회사였다. 부동산 경매에 대한 혜안이 있는 아빠는 회사의 명목상 회장이자 고문이었고, 사장과 전무는 아빠의 부동산 경매교육 제자로 설립을 함께 했다. 나는 총무팀장을 맡게 되었다. 아빠와 함께 일한다는 것은 자연스럽게 그의 여러 제자와도 어쩔 수 없이 관계를 맺게 된다는 뜻이기도 했다.


주변 사람들은 남의 속도 모르고 말했다. “너는 아빠랑 같이 일하면 편하겠다.”, “로열패밀리네.” 참 쉽게도 말한다. 엄마마저도 “아빠 인연으로 그 회사에서 일할 수 있는 거니까 감사하게 생각해.”라며 감사를 강요하곤 했다.


내가 당시 일한 부동산투자회사 사장은 아빠의 오랜 제자였다. 우리는 그 사장이 어떤 욕망을 가진 사람인지도 모른 채, 그의 사탕발림 가득한 말로 그와 일을 같이 하게 되었다. 나는 설립 초기부터 사장이 믿음직스럽지 못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 느낌을 엄마에게 전했으나 엄마는 이제 백수에서 벗어나 돈을 벌 수 있으니 그저 감사하라는 것이었다.


얼핏 들으면 맞는 말 같았지만, 결국 난 거대한 욕망과 거짓이 넘치는 사무실을 매일매일 마주하다 보니 감사보다는 짜증이 돋았다. 백수에서 벗어나고 돈을 버는 기쁨은 사장의 그칠 줄 모르는 욕망과 사탕발림, 시도 때도 없이 나오는 거짓말로 잠식되었다. 적어도 나는 아빠가 꼭 내 편이 되어주길 바란다기보다, 최소한 조용히 지지해 주는 사람이기를 순진하게 기대하고 있었다. 그 기대는 곧 깨졌다.


유년기를 지나면서 아빠와의 관계가 아주 좋았던 편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늘 나쁜 편은 아니었다. 영유아기 때만 해도 나를 품에 안고 남포동을 거닐던 시절을 자랑삼아 이야기하던 사람, 내 돌잔치를 이틀 동안 했다며 자신을 스스로 대단한 아빠라고 여겼던 사람.


객관적으로 그 정도면, 그 시대 기준으로는 보통보다 조금 나은 아빠였을 수도 있다. 내 기준에선 다를 수도 있겠지만. 어쨌거나 사업을 일으키고 잘될 때는 자녀들에게 물주가 되었지만, 일에 쫓기기도 하면서 가정보다는 바깥일에 몰두하느라 초등학생 이후 정서적 교류는 거의 없었다.


그러던 어느 겨울, 아빠와 나 사이의 신뢰가 무너지는 일이 생겼다. 사무실에서 사장의 거듭된 불성실함 때문에 업무가 마비되는 일이 잦아져 내가 아무 이유 없이 전무에게 혼이 났다.


억울한 나는 불성실한 사장에게 ‘이렇게 하시면 업무가 진행되지 않아 여러 사람이 곤란해진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사장은 불성실하기만 한 게 아니라 언경하기까지 했다. 본인에게 한 말을, 쪼르르 부동산경매 선생이자 회장인 내 아빠한테 가서 이른 것이다. 내가 아빠라면 묵묵히 듣고 내게 상황 파악을 하거나 사장에게 직접 해결하라고 했을 것 같다. 그런데 아빠는 촉새 같은 사장의 말을 말리기보다 그의 말에 가볍게 보태서 나에게 이렇게 전했다.


“너는 사무실에서 어떻게 하기에 남자애들이 다 너를 무서워하니?”


속된 말로 이게 말인지 방귀인지 구분도 안 되는 데다가, 그 말이 농담이었는지 진심이었는지 와는 상관없이, 내 귀에는 그 말이 ‘직원’으로서도, ‘딸’로서도 실패했다는 뉘앙스의 말로 가슴을 후볐다. 그 말은, 이곳 어디에서도 온전히 내 편이 되어 줄 아빠라는 존재는 없다고 들리기도 했고, 시간이 지나도 나를 위하는 일이 없는 아빠의 태도에 큰 배신감을 느끼게 되었다.


숨 막히게도 그때 우리는 매일 출퇴근까지 같이했는데 출퇴근하는 차 안에서조차 우리에게 평화는 없었다. 아빠는 걸핏하면 빨간불이 바뀌는 걸 보면서도 차를 멈추지 않고 속도를 냈고, 나는 그런 아빠의 운전 습관이 탐탁지 않아 입을 댈 때면 아빠는 자기는 파란불에 건넜다고 입에 침을 바른 채 말을 하곤 했다.


신호등 앞에서의 대화는 종종 다른 논쟁으로 불거졌다. 신호등으로 시작된 언쟁은 불성실한 사장의 부주의함으로 기울어져 가는 회사에 대한 설전으로 번졌다. 아빠에 대한 불신과 서로 다른 생각들이, 물리적으로는 좁디좁았던 운전석과 조수석 사이를 바다보다 멀게 느껴지게 했다.


출근하는 순간부터 긴장감에 시달리다 집에 돌아온 나는 집에서조차 좀처럼 쉴 자리를 찾기 힘들었다. 저녁을 먹고 나면 운동을 한답시고 동백섬까지 걷고 오거나 차를 타고 나갔다 오곤 했다. 그 시간이 길어질수록,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라는 생각이 머리를 지배했다.


결국 2016년 5월 초, 퇴직금을 받고 사표를 던졌다. 한 달여간의 인수인계 기간 나는 모함과 욕망과 권모술수가 가득한 곳을 떠나 어떻게 안식할지 꿈꿨다. 내가 택한 안식의 방법은 뉴질랜드 남섬에서 즐기는 멍한 고독이었다. 쉽게 말하자면 퀸스타운 강가에서 그냥 멍 때리고 밤에는 빛공해가 없는 곳에서 별무리를 사진에 담아 오고 싶었다.


결심이 서자 부모님께 나의 뉴질랜드 여행 계획을 통보했더니 엄마는 혼자 가는 거면 따라가겠다고 했다. 나는 엄마에게 혼자 가고 싶으니 따라올 생각일랑 하지 말라고 단칼에 동행을 거절했다. 엄마는 나의 거절을 기분 나쁜 말 한마디로 거절했다.


“남자랑 가는데, 못 가게 할까 봐 혼자 간다고 하는 거야?”


엄마 말이 내 귀에 박히자마자 기분이 확 상했다. 혼자 가고 싶다는 내 마음을 이런 식으로 왜곡한다고? 도대체 왜 그런 식으로, 내 결정을 의심부터 하는 거지? 그리고 서른다섯에 남자랑 간다고 한들 뭐가 대수라고?


나는 엄마와의 여행이 마뜩잖았지만 자꾸 같이 가겠다고 졸라대는 것이 귀찮아 결국 ‘여행 기간 내 각자의 시간을 가지면서, 내 여행 일정에 맞추어 따라오겠다면 같이 가든지.’라는 약속을 받아내고 홀로 감정의 38선을 그은 채 여행 준비를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엄마와의 여행은 잘한 일이기도 하고, 또 그런 식으로 내 결정을 뭉개게 만든 것은 아쉬운 일이지만.


우리 여행은 준비 과정부터 크고 작게 삐걱빼각 해댔다. 그 삐걱거림은 마치 편두통의 전조증상 같았다. 여행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도 전에 도진 전조증상은 관문지 오클랜드로 날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한 번 쿵 하고 뇌리를 때렸다. 오클랜드의 숙소에 도착한 우리 모녀는 울고불고 싸우다 ‘내일은 각자 갈 길을 가자’는 엄마 말을 뒤로 한 채, 잠이 들었다.


그 밤 우리가 싸운 이유는 엄마가 나를 가만 놔두지 않는다는 것. 숙소에 도착한 엄마는 저녁 식사 후 설거지하자마자 얼른 씻으라고 나를 다그쳤다. 하지만 평생 거북이처럼 살아온 나는 충분한 쉼이 필요했다. 게다가 내 여행 테마는 멍한 고독을 즐기는 것 아니었는가. 결국 엄마는 먼저 씻고 오더니 나에게도 얼른 씻고 오라고 다시 잔소리를 퍼부었다.


수차례의 거절과 종용의 실랑이는 ‘이래서 혼자 오고 싶었는데...’라는 후회를 키웠다. 왜 다 자란 날 엄마 마음대로 하려 하냐는 반발의 목소리와 함께 곤두섰고, 우리 전쟁은 그렇게 신호탄을 울렸다.


내 불만은 이랬다. 마치 엄마는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다 아는 듯이 군다는 것. 엄마는 내가 엄마와 전혀 다른 존재임을 모르는 모양이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기내식을 먹을 때, 이건 먹어라 이건 맛없으니 먹지 마라, 씻으라 마라 등등. 엄마 입에 맞는 것이 내 입에 반드시 맞을 거라는 보장도 없고, 엄마 입에 쓴 것이 내 입에 달수도 있는 것 아닌가?


엄마의 시간과 내 시간은 다른데 왜 엄마 스케줄에 나를 맞추려고 하는가. 서른이 넘은 과년한 딸년은 딸이라는 이유로 여전히 자기 주도적 선택 기회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이 싫었다.


돌아오는 엄마의 한탄은 이랬다. 엄마가 돼서 그 정도 말도 못 하니, 엄마 죽고 나서 후회하지 말고 있을 때 잘해라, 그래 혼자 여행한다는 걸 괜히 따라와서 이런 소리나 듣고, 난 내일 돌아가든 혼자 다니든 할 터이니 너 혼자 다니라는 말이었다.


엄마들의 한탄 레퍼토리는 왜 항상 이런 식일까? 나의 주장이 세모였다면 엄마는 전혀 다른 달팽이를 이야기했다. 엇박자의 이야기가 한참을 오갔다. 사실 이럴게 뻔히 보여서 같이 오기 싫었던 것 같기도 하다.


이른바 부모죽고나서후회론 ¹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나는 대꾸해야만 했다. 엄마가 뭔데 내가 후회할 거라고 단정 짓느냐 후회해도 내가 하니까 그딴 소리 하지 마라, 그리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두라는 말로 뭐 돌아간다는 말까지 하느냐. 따따부따.


어느새 엄마의 다른 논점.

“딸년이라고 하나 있는 게 살갑기를 하나, 평생 가도 곁을 주지도 않고”

따따따 부따.

다시 결론은 너는 너대로 가라, 나는 나대로 한국에 돌아가든 일주일 동안 혼자 여행하든 알아서 하겠다.


다시 신경질이 났다. 덜컥 겁도 났다. 신경질보다 겁이 더 났나 보다. 이대로 엄마가 내일 가버리면 반씩 내기로 한 여행비용이 늘어날 것에 대한 현실적인 겁, 엄마가 혼자 여행하다가 무슨 일이 생기지는 않을지에 대한 불안, 돌아간 집에서 어색해질 우리에 대한 두려움이기도 했다.


나는 얼른 방법을 바꿔 회유바카라을 쓰기로 했다. 결단의 회유바카라이 아니라 본능의 회유바카라이었다. 그렇다고 그녀는 결단코 회유바카라에 못 이기는 척 넘어오는 사람이 아니다. 특히 감정의 충돌이 생겼을 때는 더욱 물러나지 않는다. 결국 눈물은 화해의 강물이 되지 않았다. 엄마는 여러 차례 설득에도 굴하지 않고 자기 갈 길을 가겠노라며 잠이 들었다.



부모 죽고 나서 후회론¹

"부모 죽고 나서 후회하지 말라"는 말을 앞세워 효도와 죄바카라감을 동시에 요구하는, 전형적인 엄마식 레퍼토리를 뜻하는 표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