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치다 보니 42.195km를 뛰었어요

"잘 뛰어 놓고 왜 울어!"

byGiagraphy
4부. 근데 거길 왜 나왔어?


크리스마스 캐럴이 거리를 가득 채우는 연말이었다. 러닝크루에서 한 해를 돌아보며 1년 후의 나에게 편지를 쓰는 행사가 열렸다. 올해의 마지막 러닝을 함께 뛰고, 각자 펜을 들었다.


무슨 말을 쓸까.


슥슥 적어 내려가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내 손은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머릿속에 지난 1년이 스쳐 지나갔다. 떠오른 건 타들어 간 내 마음과, 일밖에 몰랐던 지난날뿐이었다.


첫 글자를 적기도 전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지만, 겨우 참았다.


한 명씩 앞에 나가 올해의 소감을 이야기하는 시간이었다. 내 차례가 되어 마이크를 잡고 모두 앞에 섰다. 지난날을 떠올리며 입을 떼는데, 결국 '뿌엥' 하고 눈물이 터지고 말았다.


지인의 권유로 별생각 없이 들어간 크루였다. 처음엔 3km도 겨우 뛰었고, 큰 재미도 느끼지 못했다. 가끔 모임에 나가다 보니 친해지는 사람들이 생겼고, 한 달에 두세 번 나가던 내가 어느새 일주일에 두 번은 뛰고 있었다. 그러다 사람들의 부추김에 덜컥 넘어가 10km 대회를 신청했다. '런스라이팅'이었다. 선수로 대회를 나가기도 전에, 크루 사람들을 응원하러 서울마라톤에 가기도 했다. 피니시 라인 앞에서 크루 깃발을 들고 사람들의 마지막 195m를 응원하며, 마라톤에 대한 벅찬 감정이 차올랐다.


그렇게 빠져드는 사이 회사는 점점 버거워졌고, 러닝은 어느새 그곳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 되어 있었다. 나는 점점 더 러닝에 집착할 수밖에 없었다.


봄의 10km 대회를 시작으로 가을에는 하프에 도전했고, 다음 봄에는 첫 풀코스를 앞두고 있었다.


그런 내 러닝 인생을 함께해 온 사람들 앞이라, 더 그랬다.




첫 풀코스를 위한 훈련이 한창 막바지이던 무렵, 나는 사직서를 냈다.


퇴사를 일주일 앞두고, 광화문 앞 수많은 러너들 사이에서 출발선에 섰다.


사실 내가 첫 풀코스를 준비한다는 걸 알고, 알고 지내던 한 사람이 페이스메이커를 해주겠다고 했다. 쉽지 않은 제안이었을 텐데, 고마웠지만 거절했다.


"저 혼자 뛰어내야, 그게 제 기록인 것 같아요."


곧 다가올 생일을 미리 자축하는 의미로 생일띠를 두르고 왕관을 썼다. 내 첫 풀코스를 기억하겠다고 액션캠도 챙겼다. 긴장한 탓인지, 생리도 일주일이나 밀렸다. 설렘과 긴장이 뒤섞인 아침이었다.


초반 어느 정도 구간은 응원 물결에 휩쓸려 도파민이 최고치에 달했다. 몸 상태는 살펴볼 겨를도 없이, 그저 신나게 손을 흔들며 달렸다. 응원단이 점점 줄어드는 청계천에 들어서자, 그제야 아침에 살짝 내린 비에 신발이 젖어 엄지발가락 옆이 쓸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예상치 못한 추위에 손가락이 얼어, 에너지젤도 잘 뜯어지지 않았다.


30km 지점, 생리 탓인지 난생처음 겪는 골반 통증이 극에 달했다. 겨우겨우 참으며 야트막한 오르막을 올랐다. 그리고 코스를 따라 꺾어 내려가는 순간, 우리 크루의 깃발이 보였다. 깃발을 든 응원단이 거기 서 있었다.

울컥했다. 그동안 함께 뛰어온 동생들이 목이 터져라 내 이름을 불러준 덕분에, 다시 힘을 내 뛸 수 있었다.


결승선이 가까워질수록, 추운 날씨가 무색할 만큼 거리는 응원 열기로 뜨거워졌다. 인상을 찌푸리거나 걷기라도 하면 너도나도 앞다투어 레몬을 쥐여주고 파스를 뿌려줬다. 쏟아지는 카메라 세례에 억지로라도 웃어 보였다.


결승선을 지나고서도 내가 정말 완주를 한 건가, 실감이 나지 않았다.


4시간 16분. 그게 내 기록이었다.


겨울 내내 함께 훈련을 도와준 언니가 내 목에 메달을 걸어주었을 때, 눈물부터 쏟아졌다.


"잘 뛰어 놓고 왜 울어!"


언니의 말에 나는 모르겠다고, 그냥 눈물이 난다고만 했다.




며칠 뒤, 마지막으로 출근한 날. 나는 사내 메신저로 팀에 작별 인사를 남겼다. 함께 올린 건 영화 〈포레스트 검프〉의 한 장면이었다. 괴롭히는 아이들을 피해 달리던 어린 포레스트의 다리에서, 교정기가 부서져 날아가는 장면. 풀코스 완주 이야기를 슬쩍 자랑 삼아 곁들이며, 유머러스하게 인사를 마무리했다.


회사 사람들에게 어떻게 읽혔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사실, 그 장면은 '나를 괴롭게 하고, 나를 가로막던 이곳을 벗어난다'는 뜻이었다.


그 뒤로 두 달 가까이, 그동안 너무 바빠 못 만났던 사람들을 만났다. 그리고 실컷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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