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라와 페르 귄트를 만나다
2026년 8월 5일 수요일 · 오슬로
오슬로 숙소는 컴포트 호텔 칼 요한(Comfort Hotel Karl Johan)이다. 이름 그대로 칼 요한스 거리에 있는데, 우리나라로 치면 명동 한복판이다. 헨리크 입센과 에드바르 뭉크가 거닐던 거리를 걸어 보고 싶어서 일부러 이곳에 잡았다.
오후에는 아이들에게 자유 시간을 주었다. 각자 가고 싶은 곳을 다니다가 저녁에 뭉크 미술관 앞에서 만나 야간 개장에 함께 들어가기로 했다. 나는 그동안 입센 박물관과 국립미술관을 보기로 했다.
호텔에 짐을 풀고 밖으로 나오니 하늘은 잔뜩 흐리고 도로는 비에 젖어 있었다. 그런데도 거리는 쇼핑하는 사람과 관광객들로 붐볐다. 며칠 동안 폭포와 고원만 보다가 사람들 사이에 서니 분위기가 전혀 달랐다. 그래도 명동만큼 복잡하지는 않았다.
칼 요한스 거리를 따라 입센 박물관으로 걸었다. 길 끝 언덕 위로 왕궁이 보일 즈음 왼쪽에 국회의사당이 눈에 들어왔고, 나는 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거기서 무엇을 놓쳤는지는 나중에야 알았다. 조금만 더 곧장 걸었다면 그랜드 호텔이, 오른쪽으로 꺾었다면 뭉크의 화실이 있던 건물이 나왔을 것이다.
그랜드 호텔 1층에는 그랜드 카페가 있다. 입센과 뭉크가 드나들던 카페다. 먼저 이곳을 찾은 사람은 뭉크다. 1882년, 열여덟 살에 이 근처에 화실을 얻어 화가 크리스티안 크로그에게 그림을 배웠고, 스승과 제자는 이 카페의 단골이었다고 한다.
그때 입센은 외국에 살고 있었다. 그가 노르웨이로 돌아온 것은 1891년이다. 입센은 예순셋, 서른다섯 살 아래인 뭉크는 스물여덟이었다. 입센은 그 뒤 아홉 해 동안 날마다 이곳에 왔다고 한다. 베를린과 파리에서 지내던 뭉크도 여름이면 고향에 돌아왔으니, 그때마다 여기서 입센을 보았을 것이다.
그 장면을 그려 본다. 긴 외투에 모자를 쓰고 우산을 든 노인이 문을 열고 들어온다. '입센 박사 전용'이라고 적힌 팔걸이의자에 앉아 빵과 맥주로 점심을 먹는다. 건너편 자리에서 젊은 뭉크가 그 모습을 바라본다.
두 사람은 서로 모르는 사이가 아니었다. 뭉크의 그림이 고향에서 혹평을 받을 때, 전시장에 찾아와 그를 격려해 준 사람이 입센이었다고 한다. 입센은 1906년에 세상을 떠났고, 서너 해 뒤 뭉크는 「그랜드 카페의 헨리크 입센」을 그렸다. 입센이 그리웠을 것이다.
그날 나는 이런 것을 전혀 모르고, 그랜드 카페와 반대쪽으로 걸어갔던 것이다. 미리 알았더라면 그 문을 열고 들어가 입센과 뭉크가 앉았던 자리를 떠올리며 커피 한잔 마시고 왔을 텐데 아쉽다.
국회의사당을 지나 조금 더 걸으니 국립극장이 나왔다. 정문 앞 높은 받침돌 위에서 낯익은 얼굴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입센이다.
입센의 동상을 본 것은 이번이 두 번째다. 처음은 이틀 전 베르겐에서였다. 그곳 국립극장 앞 잔디밭에도 망토를 두른 커다란 입센이 서 있었다. 베르겐은 스물세 살의 입센이 극장에 처음 일자리를 얻은 곳이다.
오슬로의 입센은 단추를 끝까지 채운 긴 외투를 입고 뒷짐을 진, 나이 든 신사의 모습이었다. 국립극장이 문을 연 1899년에 세웠다고 한다. 입센이 마지막 희곡을 낸 해이니, 그는 살아서 자기 동상을 본 셈이다. 날마다 그랜드 카페로 걸어가던 길에 이 앞을 지났다고 한다.
국립극장에서 왕궁 쪽으로 조금 더 걸으니 'IBSEN MUSEUM & TEATER'라는 간판이 보였다. 입센 박물관이다. 박물관이면서 극장이기도 한 곳이다.
건물 벽에는 파란 명판이 붙어 있었다. 입센이 1895년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 건물에서 살았다고 적혀 있다. 그가 마지막 열한 해를 보낸 집 앞에 내가 서 있는 것이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표 파는 곳 옆에 기념품 가게가 있었다. 입센의 얼굴을 그려 넣은 파란 가방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나는 박물관에 가면 기념품을 꼭 하나씩 산다. 그런데 이날은 마그넷 하나 사지 않고 나왔다. 지금 생각하면 왜 그랬나 싶다.
전시실에 들어서니 입센이 또 서 있었다. 베르겐과 국립극장 앞에 이어 세 번째로 만난 동상이다. 이번에는 높은 모자를 쓰고 우산을 짚고 있었다.
우산을 보니 이곳에도 비가 참 많이 오나 보다 싶었다. 내가 간 날에도 비가 왔다. 동쪽의 오슬로는 서쪽의 베르겐보다 비가 덜 온다고 들었는데, 이날만 보면 그렇지도 않은 것 같았다.
벽에 붙은 패널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Ibsen's iconic hat and coat are symbols of both the playwright's style and the era in which he lived. Imagine him walking through the streets of Kristiania, deeply immersed in thoughts of his upcoming masterpieces.
입센 하면 떠오르는 모자와 외투는 이 극작가의 차림과 그가 살던 시대를 함께 보여 준다. 다음 작품을 궁리하며 크리스티아니아 거리를 걷는 그를 떠올려 보라.
크리스티아니아는 오슬로의 옛 이름이다. 조금 전 내가 걸어온 칼 요한스 거리를 그도 이 차림으로 걸었을 것이다.
진열장에는 그가 받은 훈장들이 놓여 있었다. 입센은 이것들을 무척 아껴서 가슴에 달고 거리를 걸었다고 한다. 조금은 우스꽝스러웠을 그 모습을 상상해 본다.
이곳을 찾기 전에 그의 일생과 작품을 정리해 보았다.
헨리크 입센(Henrik Ibsen)은 1828년 노르웨이의 작은 항구 도시 시엔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아버지가 파산해 집안이 기울었고, 열다섯 살부터 약국 일을 배우며 희곡을 쓰기 시작했다. 스물세 살에 베르겐의 극장에 자리를 얻은 이야기는 앞에서 적었다.
그 뒤 크리스티아니아로 옮겼지만 작품은 인정받지 못했고 살림도 어려웠다. 1864년, 서른여섯의 입센은 노르웨이를 떠나 스물일곱 해 동안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살았다. 1891년에야 돌아와 이 도시에 자리를 잡았고, 1906년에 세상을 떠났다.
전시실 다른 벽에는 입센이 평생 쓴 작품을 연도순으로 적은 표가 붙어 있었다. 1850년 『카틸리나』부터 1899년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까지 모두 스물여섯 편이다. 베르겐 극장 시절의 작품이 1853년부터 1857년까지 거의 해마다 이어지고, 마지막 두 편이 이 집에서 쓴 작품이다.
『인형의 집』도 『페르 귄트』도 그 가운데쯤에 적혀 있었다. 둘 다 노르웨이 밖에서 쓴 작품이다. 이번 문학 기행에서 내가 따라가 보려는 것이 이 두 작품이다.
전시실에는 작품마다 커다란 패널을 하나씩 세워 설명해 두었다. 나는 먼저 『인형의 집』 앞에 서서 바카라의 내용을 떠올려 보았다.
이 작품은 입센의 대표작으로, 1879년에 쓴 희곡이다. 그는 여자도 아내이고 어머니이기 전에 한 사람이라는 말을 하려고 했다.
주인공 노라는 병든 남편을 요양 보내려고 아버지의 서명을 몰래 써넣고 돈을 빌린다. 그 비밀이 드러나자 남편 헬메르는 자기 체면만 걱정하며 노라를 몰아세운다. 노라는 그제야 자기가 아버지와 남편의 인형으로 살아왔다는 것을 알고 집을 나간다. 희곡은 문 닫히는 소리로 끝난다.
150년 가까이 지난 지금 읽어도 놀라운 결말이다. 나는 헬메르가 노라를 몰아세우는 대목에서 정말 화가 났다. 그러다 문득 나에게도 그런 태도가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게 되었다.
패널을 보니 그때 사람들은 더 놀랐던 모양이다. 독일에서 처음 공연할 때 노라 역을 맡은 배우가 남편과 아이를 두고 떠나는 역은 못 하겠다고 하자, 입센은 다른 결말을 써 주었다. 그러나 관객이 좋아하지 않아 몇 번 만에 원래 결말로 돌아갔다고 한다.
그 글은 물음 하나로 끝났다.
But what is the most wonderful Nora wanted should happen?
노라가 일어나기를 바란 가장 놀라운 일은 무엇이었을까?
이어서 『페르 귄트』 패널 앞에 섰다.
이 작품은 『인형의 집』보다 열두 해 앞선 1867년, 입센이 이탈리아에 머물 때 쓴 희곡이다. 노르웨이 옛이야기 속 인물과 트롤을 데려와 썼다.
그때 노르웨이는 스웨덴과 연합 왕국을 이루고 있어서 '우리 것'을 찾으려는 분위기가 한창이었다. 입센은 나라 밖에서 그런 고국을 은근히 꼬집었다. 작품 속 트롤들의 좌우명이 "너 자신으로 만족하라"인데, 좁은 울타리 안에 갇혀 사는 고국 사람들을 빗댄 것이라고 한다.
허풍쟁이 페르는 고향에서 쫓겨나 온 세상을 떠돌며 온갖 사람이 되어 보지만, 늙어서 돌아와 자신을 들여다보니 양파처럼 껍질만 있고 알맹이가 없다. 그런 그를 평생 기다려 준 사람이 솔베이지다.
패널 아래쪽에는 이 작품의 핵심이라 할 물음이 적혀 있었다.
Am I myself enough? Who am I? Who do I want to be? Will I find a kernel?
나는 나 자신으로 충분한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가 되고 싶은가? 나는 알맹이를 찾을 수 있을까?
『페르 귄트』는 사실 희곡보다 노르웨이의 작곡가 에드바르 그리그의 음악으로 더 유명한 것 같다. 패널 옆에도 그 음악을 들을 수 있는 버튼이 있었다. 우리가 잘 아는 「아침의 기분」, 「산왕의 궁전에서」, 「솔베이지의 노래」가 모두 이 연극에 붙인 음악이다.
입센의 삶과 작품을 따라가다 보니 노르웨이를 대표하는 두 사람, 그리그와 뭉크까지 만나게 되었다. 입센과 그리그는 1870년대에 연극과 음악으로 이어졌고, 입센과 뭉크는 1890년대에 지금의 오슬로에서 그림으로 이어졌다.
그리그의 집은 어제 베르겐에서 늦잠을 자는 바람에 가지 못했다. 그러나 뭉크는 오늘 만날 수 있다. 이제 국립미술관과 뭉크 미술관으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