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장. 트롤스티겐

두려움이 지나간 자리에 경외가 남는다

by간서치

2026년 8월 2일 일요일 · 레샤스코그에서 트롤스티겐까지, E136과 Fv63 70km


가는 길


오늘은 북유럽 여행 4일 차, 노르웨이 렌터카 여행은 2일 차이다. 아침을 빵과 커피로 간단하게 먹고, 트롤스티겐 주차장이 혼잡해지기 전에 닿으려고 서둘러 출발했다.


가는 길에는 공사 구간이 자주 나왔다. 신호등 하나 세워 놓고 한쪽씩 통과시키는 곳이 몇 군데 있어서 그때마다 차를 세우고 기다렸다. 처음에는 공사가 왜 이렇게 많은가 싶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당연한 일이었다. 이 나라에서 도로 공사를 할 수 있는 계절은 여름뿐이다. 나머지 계절에는 눈이 덮인다. 그러니 여름 내내 공사 중인 것이 아니라, 여름에만 공사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이 풍경을 보러 오는 계절이 그들이 길을 고치는 계절과 정확히 겹친다.


이 길에 대해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 하나 더 있다. 2024년 여름, 며칠 사이에 낙석이 거듭되면서 트롤스티겐은 그해 내내 닫혔다. 비탈면에 낙석 방지 공사를 마치고 다시 열린 것이 2025년 7월이다. 우리가 2024년에 왔더라면 이 길에는 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이 길에는 산을 넘는 대신 터널이 많았다. 안쪽을 콘크리트로 매끈하게 마감한 것이 아니라 뚫은 돌 모양 그대로 두어서 마치 어느 동굴에 들어온 느낌이 들었다. 뾰족한 돌 끝이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데, 그렇지는 않은가 보다.


노르웨이는 인구가 오백만 남짓인 나라다. 그 사람들이 거대한 산에 터널을 내고 높은 절벽 위에 다리를 놓았다. 그러고도 피오르드가 나오면 배로 건너야 한다. 살인적인 물가라고들 하는데, 이 물류비를 떠올리면 그럴 만도 하겠다 싶었다.


중간에 캠핑장을 하나 지났다. 소게브루 캠핑(SOGGEBRU CAMPING)이라는 곳인데, 너무 아름다워서 차를 세웠다. 뒤로는 높은 산이 곧장 솟아 있고 그 절벽에 구름이 걸려 있었다.


넓은 잔디밭에는 캠핑카가 나란히 서 있었고, 그 옆으로 옥빛 강이 흘렀다. 손을 담가 보니 한여름인데도 오래 버티기 어려울 만큼 차가웠다. 빙하가 녹아 내려오는 물인가 싶었다.


미리 알았더라면 어젯밤 여기서 묵었을 것이다. 그러나 경치가 이렇게 좋으니 숙소가 남아 있었을 리도 없다. 파워 J인 나는 몇 달 전부터 잠자리를 다 정해 놓고 왔는데, 그렇게 계획을 세워도 이런 아쉬움은 피할 수가 없다.




트롤베겐


떠나기 전 닐 게이먼의 『북유럽 신화』를 읽었다. 오딘과 토르와 로키 같은 신들이 거인들과 싸우며 살아가는 이야기다. 그런데 정작 여기에서 가장 자주 마주친 것은 신들의 이름이 아니라 트롤이었다.


트롤은 북유럽 신화보다 노르웨이 민담에 등장하는 괴물이다. 외딴 산과 동굴에 살고, 햇빛을 받으면 그 자리에서 돌로 굳어 버린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기괴하게 생긴 바위를 보면 햇빛을 받아 돌이 된 트롤이라고 했고, 안개가 자주 끼는 험한 고갯길은 트롤이 사는 구역이라고 불렀다.


지나가는 길에 거대한 바위산이 나타났다. 갓길에 차를 세우고 한참이나 올려다보았다. 이곳이 바로 트롤베겐, 트롤의 벽이다. 아래에서 정상까지 1,100미터가 그대로 수직이어서 유럽에서 가장 높은 수직 암벽으로 꼽힌다. 1980년대에는 이 벽에서 낙하산을 메고 뛰어내리는 사람들이 몰려들었는데, 사고가 잇따르자 1986년에 아예 금지되었다고 한다. 눈으로 보기만 해도 아찔한데 저기서 뛰어내렸다니, 대단한 강심장이다.


이 벽에는 이런 이야기가 전해진다. 먼 옛날 이 계곡에서 트롤들이 결혼식 잔치를 열었는데, 흥이 나 시간 가는 줄 모르다가 아침의 첫 햇살을 피하지 못했다. 신부도 신랑도 들러리도 그 자리에서 전부 돌이 되었고, 그렇게 굳은 무리가 뭉쳐 이 벽이 되었다. 지금도 꼭대기의 봉우리에는 신부, 신랑, 들러리들이라는 이름이 하나씩 붙어 있다.


험한 바위산을 설명하려고 지어낸 이야기일 것이다. 무서운 것에 이름과 사연을 붙이면 조금은 견딜 만해진다. 옛사람들도 그래서 그랬을 것이다.



트롤스티겐


드디어 이번 여행에서 가장 기대했던 트롤스티겐에 오른다. 트롤의 사다리라는 뜻이다.


멀리서 보면 산허리에 사다리 하나를 비스듬히 걸쳐 놓은 것 같다. 거대한 트롤이 산을 오르려고 놓아둔 것처럼 보여서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비 내리는 첫 굽이에 들어섰다. 굽이마다 핸들을 끝까지 감아야 했고, 다 감고 나면 곧바로 풀어야 했다. 돌로 쌓은 낮은 축대 너머는 그대로 낭떠러지였다. 마주 오는 캠핑카가 나타날 때마다 한쪽으로 바싹 붙어 서서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8킬로미터 남짓한 구간에 경사는 평균 9퍼센트, 가파른 곳은 그보다 더하다.


옆자리에서 딸이 찍은 사진이다. 양손으로 핸들을 꼭 쥔 채 누가 봐도 겁먹은 모습이다. 나는 이렇게 겁이 나는데 커다란 캠핑카도 잘만 올라간다. 짐을 잔뜩 실은 오토바이는 아예 나를 추월해 갔다.



심지어 자전거를 타고 오르는 사람도 있었다. 페달을 밟으며 한 굽이씩 올라가는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할 말이 없어졌다. 딸이 창문을 내리고 소리쳤다.


"화이팅!"


겨우겨우 올라와서 조카와 딸에게 소감 한마디를 했다.


"여기서 운전할 수 있으면 전 세계 어디서든 할 수 있겠다."


농담처럼 말했지만 정말이었다.



전망대


전망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나오니 너무 추웠다. 북위 62도, 해발 858미터의 추위는 예상보다 훨씬 더했다.


전망대로 가는 길에 잠시 비가 그치더니 무지개가 떴다. 산 위에서 바로 보는 무지개는 처음이었다.


내가 이 길을 오르는 동안 두려워했던 것과, 그 길 위에 떠오른 무지개 사이에는 아무 인과가 없다. 비가 그친 것은 내가 무사히 올라왔기 때문이 아니다. 그런데도 마음은 자꾸 둘을 이어 붙이려 한다. 잘 견뎠으니 이런 것을 보여 주는구나, 하는 식으로. 사람이 신화를 만들어 온 방식이 아마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무서운 골짜기와 그 위에 뜬 빛 사이에 이야기를 하나 놓아야 마음이 놓이는 것이다.


전망대에 도착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보기만 해도 아찔했다. 아까는 그 길 위에 있어서 무서웠는데, 지금은 그 길을 내려다보고 있어서 무서웠다. 같은 길인데 무서움의 종류가 달랐다.


트롤스티겐을 온몸으로 겪고 위에서 내려다본 풍경. 이건 절대로 카메라에 담을 수 없었다. 이때 느낀 것을 포토 시로 남겨 본다.


<트롤스티겐>

노르웨이 사람들은 이 길을
괴물의 사다리라 부른다.
사람이 낸 길이 아니라,
트롤이 딛고 오르던 계단이라고.

한 굽이,
다섯 굽이,
열한 굽이까지,
무섭지만
내려다보며 오른다.

정상에 서니
눈에 담긴 것이
사진에는 담기지 않는다.

두려움이 지나간 자리에
경외가 남는다.



https://blog.naver.com/customs_man/22441305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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