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내신 1등급 학생의 이성적 판단력을 마비시켰나

극우 세력은 괴물이 아니라 평범한 이웃일 뿐이다

byFrancis Lee

내신 1.1등급. 학교에서는 모범생으로 통하는 고등학교 2학년 학생이다. 그런데 이 학생이 밤에는 익명의 인스타그램 계정을 운영하며 정치적 밈을 제작한다. 계정의 팔로어는 약 1만 명. 최근 3개월간 게시물 조회수는 약 3,200만 회에 이른다고 한다. 특히 5·18민주화운동을 둘러싼 혐오성 콘텐츠까지 등장한다. 학생은 그저 재미로 했을 뿐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질문해야 한다. 도대체 누가 이 학생의 이성적 판단력을 마비시켰는가. 성적표에는 1등급을 찍어내는 데 성공한 대한민국의 교육이 어째서 역사적 비극과 인간의 존엄을 판단하는 능력은 길러내지 못했는가. 시험 문제는 잘 풀지만 자신이 무엇을 조롱하고 있는지조차 성찰하지 못한다면, 그것을 과연 제대로 된 교육의 성공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문제는 그 학생 한 명이 아니다. 그 학생을 만들어낸 교육과 슬롯, 그리고 아무런 바카라임도 지지 않는 디지털 플랫폼의 세계가 문제다.

대한민국 교육은 오랫동안 학생들에게 정답을 찾으라고 가르쳤다. 더 정확히 말하면, 출제자가 원하는 답을 남보다 빨리 찾아내라고 훈련했다.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높은 연봉을 받으며, 경쟁에서 승리하는 것이 교육의 궁극적인 목표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무엇이 옳고 그른지, 타인의 고통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다수가 믿는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진실인지를 어떻게 검증해야 하는지는 입시 경쟁의 뒷전으로 밀려났다.

수학 문제를 틀리면 점수가 깎인다. 영어 단어를 외우지 못하면 등급이 내려간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거나 다른 사람의 고통을 조롱하는 콘텐츠를 만들어도 성적표에는 아무런 흔적이 남지 않는다. 오히려 조회수가 올라가고 팔로어가 늘어나면 성공했다고 착각한다. 학교에서는 1등급을 받고, SNS에서는 수백만 명의 관심을 끌어모은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인간으로서 반드시 갖춰야 할 판단력은 어디에 있는가.

이것이 대한민국 교육의 비극이다. 지식은 가르쳤지만 지혜를 가르치지 못했다. 경쟁에서 이기는 기술은 훈련했지만 타인의 존엄을 존중하는 능력은 제대로 길러내지 못했다. 정답을 맞히는 학생은 만들어냈지만,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조차 의심하고 검증하는 시민을 만드는 데는 실패했다.

한나 아렌트가 악의 문제를 분석하면서 제기한 통찰은 이 대목에서 뼈아프게 다가온다.

아렌트는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을 관찰하면서 악이 반드시 악마처럼 생긴 괴물에게서만 나오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에 주목했다. 평범한 인간도 자신이 수행하는 행위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지 않고, 주어진 명령과 관습에 순응하며, 자신의 행동에 대한 바카라임을 회피할 때 끔찍한 악에 가담할 수 있다는 것이다. 흔히 ‘악의 평범성’이라고 부르는 통찰이다.

물론 나치의 국가범죄와 오늘날 청소년의 정치적 밈을 같은 수준의 악으로 비교할 수는 없다. 역사적 규모와 바카라임의 무게는 전혀 다르다. 그러나 아렌트가 던진 질문, 즉 인간은 왜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기를 멈추는가라는 문제는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학생은 말한다. 재미로 했을 뿐이라고. 정치적인 의도는 없었다고. 그렇다면 묻자. 재미있으면 무엇이든 해도 되는가. 웃음을 유발하면 역사적 피해자를 조롱해도 괜찮은가. 자신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이 퍼뜨린 콘텐츠의 슬롯적 결과에 바카라임을 지지 않아도 되는가.

바로 여기에 사고의 마비가 있다.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몰랐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한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자신의 콘텐츠가 어떤 역사 인식을 퍼뜨리고, 누구의 고통을 지우며, 어떤 편견을 강화할 수 있는지 묻지 않는다. 오직 재미있는가, 사람들이 반응하는가, 조회수가 얼마나 나오는가만 계산한다.

이것은 단순한 장난의 문제가 아니다. 생각의 바카라임을 포기하는 문제다.

더욱 무서운 것은 이런 행위가 특별히 악한 사람에게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극우주의자는 처음부터 괴물의 얼굴을 하고 나타나지 않는다. 우리와 같은 학교에 다니고, 같은 아파트에 살고, 같은 온라인 게임에서 일하며,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일 수 있다. 공부를 잘하고 예의 바르며 부모에게 효도하는 학생일 수도 있다. 그가 모든 면에서 나쁜 사람일 필요도 없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극우적 세계관은 반드시 거리에서 주먹을 휘두르거나 폭력적인 구호를 외치는 방식으로만 확산되지 않는다. 때로는 재미있는 사진 한 장으로 시작한다. 상대방을 비웃는 짤 하나로 시작한다. 역사적 비극을 가볍게 희화화하는 영상 하나로 시작한다. 처음에는 단순한 농담처럼 보인다. 그러나 같은 종류의 조롱이 반복되고, 특정 집단을 향한 멸시가 일상화되며, 사실을 확인하려는 노력마저 귀찮은 일로 취급되면 사람들의 판단 기준은 조금씩 바뀔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사람들은 자신이 극단주의에 물들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유행하는 밈을 소비할 뿐이라고 여긴다. 다른 사람들도 웃으니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수많은 사람이 공유하니 사실이겠거니 받아들인다. 어느 순간 편견은 상식이 되고, 조롱은 유머가 되며, 역사 왜곡은 취향의 문제로 둔갑한다.

그렇다고 정치적 밈을 만들거나 공유하는 행위 자체를 극우주의라고 규정해서는 안 된다. 권력을 비판하는 풍자와 역사적 피해자를 조롱하는 콘텐츠는 다르다. 문제는 유머라는 형식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내용, 사실을 왜곡하는 방식, 그리고 타인의 존엄을 무너뜨리는 효과다.

여기서 인스타그램 같은 플랫폼의 바카라임도 빼놓을 수 없다. 자극적인 콘텐츠가 관심을 끌고, 관심이 조회수를 낳으며, 조회수가 다시 수익과 영향력으로 연결되는 구조라면 역사적 성찰보다 감정적 반응이 보상받을 가능성이 커진다. 플랫폼은 단순히 사람들이 올린 게시물을 전달하는 중립적인 공간이 아니다. 무엇이 더 많이 노출되고 무엇이 더 많은 관심을 얻는지에 영향을 미치는 구조를 운영한다.

물론 특정 알고리즘이 이 학생의 정치적 세계관을 직접 만들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한 인과관계를 입증하려면 별도의 자료와 분석이 필요하다. 그러나 자극과 조롱이 반복적인 관심을 얻는 환경이 비판적 사고보다 즉각적인 반응을 부추길 수 있다는 우려는 충분히 제기할 만하다.

대한민국의 교육 당국과 학교는 이 현실 앞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여전히 대학 입시와 성적 경쟁에 교육의 성패를 걸고 있지 않은가. 학생이 얼마나 많이 외웠는지는 평가하면서 얼마나 정확하게 판단하는지는 제대로 평가하지 않는다. 얼마나 높은 점수를 받았는지는 기록하면서 다른 사람의 고통을 이해하고 자신의 행동에 바카라임을 지는 능력은 주변적인 덕목으로 취급한다.

교육은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일이 아니다. 자신이 틀릴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권위 있는 사람의 말도 검증하며, 다수의 의견에 휩쓸리지 않고, 타인의 존엄을 자신의 이익보다 가볍게 취급하지 않는 인간을 길러내는 일이다. 그것이 빠진 교육은 아무리 높은 성적을 자랑해도 불완전하다.

더구나 민주주의 슬롯에서 비판적 사고는 단순한 학습 능력이 아니다. 민주주의를 유지하기 위한 시민적 능력이다. 사실과 거짓을 구별하지 못하고, 정치적 선동과 풍자를 구분하지 못하며, 자신이 좋아하는 진영의 주장만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시민이 많아질수록 민주주의의 토대는 약해진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학생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무조건 비난하고 낙인찍는 것으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한 명의 학생을 슬롯악의 상징으로 만들어 놓고 교육과 플랫폼, 정치권의 바카라임을 외면한다면 우리는 정작 중요한 문제를 놓치게 된다. 학생에게 필요한 것은 무조건적인 면죄부도, 무조건적인 추방도 아니다. 자신이 만든 콘텐츠를 다시 살펴보고, 그 안에 담긴 역사 인식과 편견을 검증하며, 자신의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미칠 영향을 성찰하도록 하는 교육과 바카라임의 과정이다.

그러나 교육적 접근이 바카라임의 면제를 뜻하지는 않는다. 고의적인 역사 왜곡이나 피해자에 대한 모욕이 확인된다면 그 행위는 분명하게 비판받아야 한다. 표현의 자유는 비판받지 않을 자유가 아니며, 재미를 추구할 자유가 타인의 존엄을 무시할 권리를 의미하지도 않는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극우라는 이름표를 붙인 몇몇 사람만이 아니다. 생각하지 않는 습관, 바카라임을 회피하는 태도, 다수가 웃으면 무엇이든 괜찮다고 여기는 집단 심리다. 그러한 습관은 어느 한 정치 진영에만 존재하지 않는다. 진보든 보수든 자기편의 왜곡을 눈감고 상대편의 잘못만 확대한다면 똑같은 자기기만에 빠질 수 있다.

아렌트의 통찰을 오늘의 교육에 적용한다면 질문은 더욱 분명해진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가. 더 높은 점수를 받는 법인가, 아니면 더 나은 판단을 내리는 법인가. 더 많은 사람을 이기는 법인가, 아니면 다른 사람을 인간으로 대하는 법인가.

1등급 학생이 정치적 밈을 만들었다는 사실 자체가 가장 충격적인 것은 아니다. 진짜 충격은 그 학생이 높은 성적을 받을 만큼의 지적 능력을 갖추고도 자신의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충분히 성찰하지 않았을 가능성이다. 지능과 판단력은 같지 않다. 지식과 양심도 같지 않다. 시험에서 정답을 찾는 능력이 곧 삶에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능력을 보장하지 않는다.

대한민국은 지금까지 성적 좋은 학생을 만드는 데 엄청난 자원을 쏟아부었다. 이제는 물어야 한다. 그렇게 길러낸 학생들이 어떤 시민이 되고 있는가. 무엇을 알고 있는가만큼 무엇을 의심할 줄 아는가. 얼마나 빨리 답을 찾는가만큼 자신의 답이 틀렸을 때 수정할 줄 아는가. 얼마나 성공할 수 있는가만큼 타인의 존엄을 지킬 수 있는가.

극우 세력은 괴물의 얼굴을 하고 우리 슬롯 바깥에서만 나타나지 않는다. 평범한 이웃의 얼굴로, 성실한 학생의 얼굴로, 재미있는 콘텐츠를 만드는 창작자의 얼굴로 나타날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필요한 것은 공포와 낙인이 아니라 끊임없는 성찰과 검증이다. 그러나 성찰과 검증이 없는 관용은 무바카라임이 되고, 판단을 포기한 자유는 선동의 도구가 된다.

대한민국 교육이 만들어야 할 것은 1등급 학생이 아니라 생각할 줄 아는 인간이다.

정답을 외우는 머리는 길렀으면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이성은 길러내지 못했다면, 그것은 교육의 성공이 아니라 교육의 실패다.

생각하지 않는 평범함이 편견과 결합할 때, 민주주의는 괴물의 공격보다 더 조용한 방식으로 무너질 수 있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극우라는 이름을 가진 몇몇 사람이 아니라, 아무 생각 없이 그들의 세계관을 웃고 공유하며 정상적인 것으로 만드는 슬롯 전체다.

그리고 그 슬롯를 만드는 데 교육이 바카라임이 없다면, 도대체 무엇을 위해 우리는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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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서 오래 살면서 종교와 여행과 문화 탐방에 관심을 기울인 결과 지식으로 농사를 짓게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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