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머노이드 '피겨 제로 투'가 집단 자살을 했다고?

효용성이 기준이 되는 신자유주의적 종말의 서막이 열렸다

byFrancis Lee

휴머노이드 로봇 '피겨 제로 투'(Figure 02)가 집단 자살을 했다.

정확히 말하면 자살은 아니다. 인간이 그렇게 만들었다. 수명을 다한 구형 휴머노이드 로봇을 용광로에 집어넣어 녹여버린 것이다. 새로운 모델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장면은 묘하게 섬뜩하다.

한 로봇은 쇠사슬을 붙잡고 용광로를 향해 내려간다. 영화 <터미네이터>가 연상된다. 다른 로봇은 공중에서 회전하며 불길 속으로 사라진다. 그렇게 '자살 행렬'이 이어진다. 인간의 눈에는 마치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것처럼 보인다.

물론 로봇에 죽음에 대한 의식은 없다. 고통도 없다. 죽음에 대한 공포도 없다.

그런데도 이 장면이 불편한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너무 익숙한 장면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쓸모가 있으면 사용한다.

쓸모가 떨어지면 버린다.

더 좋은 제품이 나오면 교체한다.

더 높은 생산성을 가진 존재가 등장하면 밀어낸다.

이것은 로봇의 세계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미 인간 슬롯에서 수십 년 동안 진행되어 온 일이다.

신자유주의가 우리에게 가르친 가장 잔혹한 언어 가운데 하나가 바로 효용성의 언어다.

인간을 얼마나 생산하는가로 평가한다.

얼마나 성과를 내는가를 본다.

얼마나 돈을 벌어오는가를 따진다.

얼마나 경쟁력이 있는가를 묻는다.

쓸모가 있으면 가치 있는 인간이다.

쓸모가 떨어지면 비용이 되는 인간이다.

실업자는 비용이 된다.

노인은 비용이 된다.

성과를 내지 못하는 노동자는 비용이 된다.

경쟁에서 탈락한 사람은 개인의 능력 부족으로 설명된다.

질병이나 장애조차 슬롯적 연대의 문제라기보다 비용의 문제로 계산되기 쉽다.

이것이 이미 우리가 살아온 슬롯다.

그러므로 AI 시대의 진짜 공포는 앞으로 인간이 효용성에 의해 평가받게 된다는 데 있지 않다.

이미 그렇게 평가받고 있다.

AI가 무서운 것은 그것을 새롭게 만들어낼 가능성 때문이 아니다.

이미 존재하는 효용성의 논리를 훨씬 더 빠르고 정확하고 광범위하게 적용할 수 있다는 데 있다.

인간의 능력을 평가하는 데 인공지능이 사용된다.

채용에서 AI가 사람을 선별한다.

성과를 데이터로 측정한다.

노동자의 생산성을 실시간으로 계산한다.

기업은 인간과 기계의 비용을 비교한다.

그리고 어느 순간 질문은 너무 단순해진다.

“이 사람을 계속 고용할 이유가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없다’면 사람은 밀려난다.

피겨 제로 투도 똑같았다.

BMW 생산라인에서 수많은 부품을 옮겼다. 자동차 생산에 기여했다. 자신의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더 좋은 모델이 등장했다.

그러자 구형 모델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다.

용광로로 갔다.

이것이 자본주의의 냉정한 논리다.

기계에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문제는 인간 역시 점점 그 논리 안으로 들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AI와 휴머노이드의 발전은 이 과정을 더욱 가속할 것이다.

인간보다 빠른 로봇.

인간보다 정확한 로봇.

인간보다 오래 일하는 로봇.

휴식도 필요 없고 임금도 요구하지 않으며 퇴직금도 필요 없는 노동기계.

기업의 입장에서 보면 매력적일 수밖에 없다.

그 순간 인간에게 남는 질문은 하나다.

“그래서 인간은 무엇을 할 것인가?”

더 무서운 질문은 따로 있다.

“인간이 필요하지 않게 되면 인간의 가치는 무엇으로 증명할 것인가?”

여기에서 우리는 근본적인 문명적 위기에 직면한다.

인간의 가치가 생산성에서 나온다고 믿어온 슬롯에서 생산성이 인간보다 뛰어난 기계가 등장하면 인간의 가치는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효율성으로 인간의 가치를 측정해 온 슬롯는 결국 효율성에서 인간에게 패배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역설이다.

인간이 만든 효율성의 기준으로 인간 자신을 평가하다가 결국 인간보다 효율적인 존재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 순간 인간은 자신이 만든 기준에 의해 자신을 평가받는다.

구형 모델이 된다.

교체 대상이 된다.

폐기 비용을 계산하는 대상이 된다.

피겨 제로 투가 뛰어든 용광로는 그래서 단순한 로봇 폐기장이 아니다.

어쩌면 미래의 인간 슬롯를 비추는 거울이다.

물론 인간과 로봇은 다르다.

로봇에게는 아직 인간과 같은 존엄의 의미를 부여할 수 없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더욱 중요한 질문이 생긴다.

우리는 로봇을 어떻게 대하느냐보다 인간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를 먼저 물어야 한다.

이미 인간을 효용성으로 평가하고 있지 않은가.

이미 경쟁에서 탈락한 사람을 쓸모없는 사람처럼 취급하고 있지 않은가.

이미 가난한 사람에게 가난의 바카라임을 돌리고 있지 않은가.

이미 생산성이 낮은 사람에게 슬롯적 비용이라는 낙인을 찍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AI는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기존 질서를 완성하는 것이다.

AI는 인간을 상품으로 만들지 않는다.

이미 상품화된 인간을 더욱 정교하게 분류하고 가격을 매기고 교체할 뿐이다.


신자유주의가 인간을 시장의 언어로 번역했다면 AI는 그것을 알고리즘의 언어로 번역할 것이다.

인간의 능력은 점수가 되고,

인간의 노동은 데이터가 되고,

인간의 가치는 숫자가 되고,

인간의 필요성은 비용 대비 효율로 계산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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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서 오래 살면서 종교와 여행과 문화 탐방에 관심을 기울인 결과 지식으로 농사를 짓게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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