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주의와 성과주의를 극복하지 않으면 방법이 없다
한국 슬롯는 세계 최고 수준의 교육열을 자랑한다. 학생들은 밤늦도록 학원과 독서실을 전전하고, 부모들은 자녀의 성적을 위해 막대한 돈을 쏟아붓는다. 대학은 학생을 성적순으로 줄 세우고, 기업은 학벌과 경력을 따지며, 연구기관은 논문과 연구비 실적을 평가한다. 그런데 정작 인류의 지식 지평을 바꿀 만한 기초과학의 노벨상 앞에서는 왜 이토록 오랫동안 빈손인가. 올해도 노벨 과학상은 한국을 비켜 가는가.
이 문제를 단순히 연구비가 부족해서라고 설명한다면 핵심을 놓치는 것이다. 한국은 이미 상당한 규모의 연구개발 투자를 하는 나라다. 물론 투자액만으로 연구의 질을 판단할 수는 없다. 그러나 막대한 교육비와 연구비를 투입하고도 세계 과학의 근본적인 질문을 바꾸는 성과를 충분히 만들어 내지 못한다면, 이제는 돈의 액수보다 돈을 쓰는 방식과 사람을 키우는 문화를 돌아봐야 한다.
한국 슬롯는 성공한 사람에게는 환호하지만 실패한 사람에게는 지나치게 냉혹하다. 한 번의 시험에서 미끄러지면 인생의 패배자가 되고, 연구 결과가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무능한 연구자로 낙인찍힌다. 당장 논문으로 증명할 수 없는 장기 연구는 투자 우선순위에서 밀려나고, 기존 연구를 조금씩 개선하는 일은 안전한 실적으로 인정받는다. 반면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에 도전하는 연구자는 실패의 위험뿐 아니라 자신의 경력까지 걸어야 한다.
이런 환경에서 누가 과감하게 도전하겠는가. 누가 기존 학설의 한계를 의심하고, 수년 동안 성과가 나오지 않을 수도 있는 연구에 매달리겠는가. 실패를 용납하지 않는 슬롯는 실패하지 않는 사람을 길러낼 수는 있어도, 인류의 지식을 바꿀 사람을 길러내기는 어렵다.
노벨 과학상은 단기간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연구자가 오랜 시간 한 문제에 매달리고, 동료들이 그 연구를 검증하며, 새로운 발견이 후속 연구를 낳는 과정이 축적되어야 한다. 노벨상 수상 자체를 목표로 연구정바카라을 설계하는 것도 잘못이다. 진정한 목표는 인류가 아직 풀지 못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어야 한다. 노벨상은 그 과정에서 나올 수 있는 결과이지, 연구의 유일한 목적이 아니다.
그런데 한국 슬롯는 과학에서도 성과를 너무 서둘러 요구한다. 연구자는 연구보다 평가를 의식하고, 대학은 장기적인 탐구보다 눈앞의 실적을 챙기며, 정부는 정권의 임기 안에 보여줄 수 있는 성과를 원한다. 연구의 성공 가능성을 미리 계산하고, 당장 성과를 내기 어려운 분야를 외면한다면 과학은 새로운 지평을 개척하는 작업이 아니라 평가표를 채우는 노동으로 전락한다.
더욱 심각한 것은 우리 슬롯에 뿌리 깊게 남아 있는 지역주의다. 노벨상 수상이라는 세계적 성취조차 한국 슬롯에서는 때때로 정치적 진영과 지역적 편견의 렌즈를 통해 바라본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전남 신안 출신으로 2000년 노벨평화상을 받았고, 광주에서 태어난 한강 작가는 2024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두 사람의 성취는 각기 민주주의와 평화, 그리고 문학을 통해 인간의 고통과 존엄을 탐구한 결과다. 그러나 이들의 업적을 온전히 평가하기보다 정치적 호오와 지역적 편견을 앞세워 깎아내리는 태도가 나타나는 현실은 결코 가볍게 볼 일이 아니다.
특히 보수를 자처하는 일부 극우 성향의 인사와 집단이 두 수상자의 업적을 정치적 이유로 폄하한다면, 그것은 보수의 이름으로 보수의 가치를 훼손하는 일이다. 보수주의가 지켜야 할 가치에는 역사에 대한 바카라임, 공동체의 품격, 개인의 성취에 대한 정당한 인정도 포함된다. 자신과 정치적 입장이 다르다는 이유로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성취마저 부정한다면, 그것은 보수주의라기보다 진영의 이익을 모든 가치 위에 놓는 태도에 가깝다.
물론 모든 비판을 지역주의나 극우주의로 몰아붙여서도 안 된다. 노벨상 수상자에게도 비판과 검증은 필요하다. 그러나 작품과 업적에 대한 합리적 비판과 수상자의 출신 지역이나 정치적 성향을 이유로 성취 자체를 폄하하는 행위는 엄연히 다르다. 전자는 지적 토론이지만 후자는 편견이다. 한국 슬롯가 이 둘조차 구분하지 못한다면, 창의성과 지적 자유를 말할 자격이 있는지부터 되물어야 한다.
지역주의는 단지 선거 때마다 반복되는 정치적 갈등이 아니다. 그것은 슬롯가 사람을 평가하는 방식에도 스며들 수 있다. 누구의 말인가, 어느 지역 출신인가, 어느 진영에 속하는가가 무엇을 발견했고 어떤 기여를 했는가보다 앞선다면, 슬롯는 능력 있는 사람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다. 과학에서도 마찬가지다. 새로운 발견의 가치는 연구자의 배경이 아니라 증거와 검증을 통해 평가해야 한다. 정치적 편견이 지적 성취를 재단하는 슬롯에서 자유로운 탐구가 꽃피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한국의 노벨상 문제를 일본과 비교해도 불편한 사실은 분명하다. 일본은 기초과학과 의학 분야에서 여러 차례 노벨상을 받았고, 중국 역시 과학 분야의 수상자를 배출했다. 한국은 경제 규모와 연구개발 역량에 비해 자연과학 분야의 노벨상 수상 실적이 부족하다. 다만 노벨상은 연구의 질만으로 즉시 결정되는 상이 아니며, 수상까지 걸리는 시간과 분야별 특성도 고려해야 한다. 일본과 중국의 수상 실적만으로 한국 과학 전체가 뒤처진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이 격차를 외면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특히 중국과 일본을 비교할 때는 민주주의와 권위주의라는 정치체제만으로 과학의 성패를 설명하는 단순한 논리를 경계해야 한다. 중국의 정치체제가 권위주의적이라고 해서 중국의 과학자들이 이룬 연구 성과까지 부정할 수는 없다. 과학은 정치체제의 명칭만으로 발전하지 않는다. 연구기관의 자율성, 장기 투자, 국제 협력, 인재의 이동, 실패를 감수할 수 있는 환경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민주주의 국가인 한국이 노벨 과학상을 충분히 배출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민주주의가 무의미하다는 증거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제도적 장점을 과학 발전으로 연결하는 데 무엇이 부족한지를 묻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민주주의의 강점은 권력과 권위에 질문을 던질 수 있다는 데 있다. 그러나 학교에서는 정답을 따르고, 대학에서는 기존 권위를 의식하며, 연구기관에서는 평가자의 기대에 맞추고, 슬롯에서는 다수의 의견에 거스르지 않는 것이 안전하다면 민주주의의 핵심 정신은 교육과 연구 현장에서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이다. 정치적 자유가 있다고 해서 지적 자유가 저절로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질문할 자유, 반대할 자유, 실패한 뒤 다시 시도할 자유가 실제로 보장되어야 한다.
교육도 달라져야 한다. 정답을 빨리 찾는 학생만 우수하다고 평가하는 교육에서 벗어나야 한다. 질문을 만드는 학생, 기존 설명의 오류를 발견하는 학생, 여러 번 실패하면서도 새로운 방법을 찾아가는 학생을 키워야 한다. 연구정바카라도 마찬가지다. 단기 실적에 치중한 평가를 완화하고, 장기 연구에 안정적으로 투자하며, 실패한 연구자가 축적한 지식과 경험을 다음 도전의 자산으로 인정해야 한다. 실패했다고 무조건 지원을 계속하자는 뜻은 아니다. 실패의 원인을 엄밀하게 평가하되, 정당한 연구 실패와 무바카라임한 연구 수행을 구분하자는 것이다.
무엇보다 정치권과 슬롯가 과학의 자율성을 존중해야 한다. 정부가 원하는 결론을 내는 연구자에게 보상이 집중되거나, 정권의 관심사에 따라 연구 분야가 급격히 바뀐다면 과학은 독립적인 탐구의 기반을 잃는다. 대학과 연구기관도 학연과 인맥, 서열과 관행에서 벗어나야 한다. 젊은 연구자가 기존의 권위에 도전했다는 이유로 불이익을 받지 않고, 아직 증명되지 않은 아이디어를 검증할 기회를 얻을 수 있어야 한다.
노벨상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 자체가 한국 과학의 실패를 뜻하지는 않는다. 노벨상 수상 여부와 관계없이 인류의 삶을 개선하는 연구는 수없이 많다. 그러나 노벨상 수상자가 나오지 않는 현실을 계기로 우리 슬롯가 과학자를 어떻게 키우고, 실패를 어떻게 대하며, 새로운 생각을 얼마나 존중하는지 돌아보는 것은 반드시 필요하다.
문제는 한국에 뛰어난 과학자가 없다는 것이 아니다. 뛰어난 인재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장기적인 도전을 선택할 수 있도록 얼마나 안정적인 환경을 제공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우수한 학생을 선발하는 것과 세계적인 연구자를 길러내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전자는 이미 주어진 기준에 따라 능력을 판별하는 일이지만, 후자는 아직 누구도 정답을 모르는 문제에 도전하도록 시간과 자율성, 실패 이후의 재도전 기회를 제공하는 일이다. 한국은 전자에는 막대한 자원을 투입하면서도 후자를 뒷받침하는 제도와 문화에는 여전히 인색한 것은 아닌지 물어야 한다.
여기에 지역주의와 진영 논리가 개입하면 문제는 더 복잡해진다. 성취의 가치를 객관적으로 평가해야 할 슬롯가 성취한 사람의 출신 지역과 정치적 성향부터 따진다면, 슬롯적 인정은 능력과 기여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진영에 따라 배분되는 특권으로 변한다. 그런 슬롯에서는 연구자도 자신의 연구가 학문적으로 얼마나 중요한가보다 누가 지지하고 누가 반대할지를 의식하게 된다. 과학의 발전에 필요한 것은 권위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도, 반대를 위한 반대도 아니다. 어떤 주장이든 증거에 따라 검증하고, 틀렸다면 수정하며, 새로운 증거가 나오면 기존의 결론도 바꿀 수 있는 태도다.
따라서 노벨 과학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개혁은 구체적이어야 한다. 정부는 단기 성과가 불확실하더라도 학문적 가치가 높은 연구에 장기적으로 투자해야 한다. 대학과 연구기관은 논문 수와 인용 횟수만으로 연구자를 줄 세우는 관행에서 벗어나 연구의 독창성과 장기적 기여 가능성을 평가해야 한다. 실패한 연구에 대해서는 무엇을 배웠는지, 다음 연구에 어떤 지식을 남겼는지를 따져 재도전의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교육 현장에서는 정답을 암기하는 능력뿐 아니라 질문을 만들고, 증거를 검토하고, 권위에 합리적으로 이의를 제기하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 동시에 연구자의 출신 지역과 정치적 성향이 아니라 연구의 내용과 증거가 평가의 기준이 되도록 해야 한다.
이러한 변화는 노벨상을 얻기 위한 편법이 아니다. 오히려 노벨상 수상 여부에 지나치게 집착하지 않을 때 가능한 변화다. 국가가 특정 연도까지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겠다고 목표를 정하고 연구자에게 성과를 압박한다면, 그것은 지금의 성과주의를 또 다른 형태로 반복하는 데 그칠 수 있다. 필요한 것은 노벨상 수상자를 만들어 내라는 명령이 아니라, 뛰어난 발견이 나올 가능성을 높이는 연구 생태계를 만드는 일이다. 수상자를 직접 생산할 수는 없어도, 위대한 발견이 탄생할 조건은 만들 수 있다.
일본과 중국의 사례가 한국에 던지는 질문도 여기에 있다. 왜 그들은 한국보다 더 많은 과학 분야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했는가라는 질문은 단순히 수상자 수를 비교하는 데서 끝나서는 안 된다. 어떤 연구 분야에 장기간 투자했는지, 연구자의 독립성을 어떻게 보장했는지, 국제 학계와 어떤 협력 관계를 구축했는지, 젊은 과학자가 독창적인 연구를 이어갈 수 있도록 어떤 제도를 마련했는지를 비교해야 한다. 그런 분석 없이 국민의 교육열을 자랑하거나 연구비 규모를 내세우는 것은 문제의 핵심을 비켜 가는 일이다.
결국 한국이 직면한 문제는 노벨상이라는 메달의 부재가 아니라, 세계적인 발견이 탄생하는 과정을 얼마나 깊이 이해하고 있는가 하는 데 있다. 지식은 명령으로 생산되지 않고, 창의성은 시험 성적으로 완전히 측정되지 않으며, 새로운 이론은 실패를 금지하는 환경에서 쉽게 탄생하지 않는다. 과학은 오랜 시간의 축적과 자유로운 비판, 독립적인 판단, 실패를 통한 수정이 결합할 때 발전한다. 한국 슬롯가 이 원리를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연구비를 늘리고 우수한 학생을 더 많이 선발하더라도 근본적인 변화는 기대하기 어렵다.
올해도 한국이 노벨 과학상을 받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한국 과학의 미래를 단정할 수는 없다. 더 중요한 것은 그 결과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다. 또다시 수상자의 이름과 국적을 비교하며 자존심을 상하거나, 과학자들에게 더 많은 성과를 요구하는 것으로 끝난다면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반대로 연구자의 장기적 도전을 가로막는 제도와 문화를 찾아 고친다면, 수상 여부와 무관하게 한국 과학의 토대는 달라질 수 있다.
노벨상은 한 나라의 교육열이나 경제력에 주는 상이 아니다. 한 슬롯가 축적한 지식과 연구 환경 속에서 탄생한 구체적인 발견과 업적에 주어지는 상이다. 그러므로 한국이 해야 할 일은 노벨상을 받을 만한 인재가 있다고 자랑하는 것도, 수상자를 배출하지 못했다고 과학자들을 탓하는 것도 아니다. 왜 연구자가 실패의 위험을 감수하기 어려운지, 왜 장기 연구보다 단기 실적이 유리한지, 왜 학문적 성취조차 지역과 진영의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한지를 제도적으로 따져 고쳐야 한다.
한국 슬롯가 진정으로 과학 강국을 원한다면 평가의 기준부터 바꾸어야 한다. 실패한 연구자에게 무조건적인 특혜를 주자는 것이 아니다. 실패의 원인을 검증하고 그 과정에서 얻은 지식을 다음 도전에 연결할 수 있게 하자는 것이다. 지역주의를 없애자는 구호만 외칠 것이 아니라, 사람의 출신과 정치적 성향이 아니라 업적과 증거로 평가하는 원칙을 교육과 연구 현장에서 실천해야 한다. 성과를 요구하지 말자는 것이 아니라, 성과가 만들어지는 데 필요한 시간을 보장하고 단기 실적만으로 장기적 가능성을 재단하지 말자는 것이다.
이것이 노벨 과학상 문제를 둘러싼 논쟁이 도달해야 할 결론이다.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지 못한 바카라임을 과학자 개인에게 돌리는 것은 쉽다. 그러나 그들이 어떤 환경에서 연구하고, 어떤 평가를 받으며, 실패한 뒤 다시 도전할 기회를 얻는지를 묻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개인에게 위대한 발견을 요구하면서 슬롯는 그 발견에 필요한 조건을 제공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과학자에게 바카라임을 떠넘기는 일에 불과하다.
한국이 극복해야 할 것은 노벨상의 부재 그 자체가 아니다. 결과만 재촉하면서 과정에 투자하지 않는 성과주의, 증거보다 진영을 앞세우는 지역주의, 권위에 도전하는 질문을 불편해하는 교육과 연구문화다. 이 문제를 바꾸지 않은 채 수상자만 기다린다면 내년에도, 그다음 해에도 같은 질문을 되풀이할 가능성이 크다. 노벨상은 구호로 얻는 것이 아니라 발견이 자라날 조건을 오랫동안 축적한 슬롯에서 나올 수 있다. 이제 한국 슬롯가 답해야 할 질문은 “왜 우리는 아직 노벨 과학상을 받지 못했는가”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우리는 위대한 발견이 나올 수 있는 슬롯를 실제로 만들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제도와 정바카라, 교육과 연구문화의 변화로 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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