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영의 '첫열매들'이 이단이라고?

정통과 이단의 구분은 종이장 한 장 차이이다

byFrancis Lee

박진영이 이끄는 ‘첫열매들’을 둘러싼 이단 논쟁이 다시 시작됐다. 박진영은 최근 공개된 영상에서 자신들의 교리와 신학적 계보를 직접 설명하며 특정 이단이나 사이비 종교와의 연관성을 부인했다. 그는 천주교·장로교·침례교 등 여러 배경의 사람들이 함께할 수 있으며, 공동체의 정체성을 판단하는 기준은 결국 무엇을 믿고 가르치는가, 특히 영생에 관한 교리라고 주장했다.

이 지점에서 질문을 조금 바꿔볼 필요가 있다.

“박진영은 이단인가?”가 아니라 “무엇이 정통이고 무엇이 이단인가?”

이 질문을 먼저 하지 않으면 박진영을 이단이라고 단정하는 것도, 반대로 그가 성경을 말한다는 이유만으로 정통이라고 인정하는 것도 모두 성급해진다.

기독교 역사에서 정통과 이단의 경계는 처음부터 완성된 선이 아니었다. 초기 교회는 영지주의·마르키온주의·아리우스주의 등과 논쟁하면서 성경 해석과 신조, 사도적 전승, 교회의 권위를 통해 신앙의 경계를 형성했다. 니케아 이후에도 아리우스 논쟁이 수십 년간 계속됐다는 사실은 정통의 형성이 단순한 한 번의 결정으로 끝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그렇다고 이를 단순히 “승자가 정통이 되고 패자가 이단이 됐다”라고 설명하는 것도 조금 부족하다. 정통은 권력의 산물만도 아니었고, 순수한 진리가 역사적으로 자동 승리한 결과만도 아니었다. 성경 해석, 사도적 전승, 예배와 신앙고백, 교회의 권위가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따라서 정통과 이단의 문제는 진리와 권력, 해석과 공동체의 경계가 만나는 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바로 이 관점에서 박진영과 첫열매들은 상당히 흥미로운 현상이다.

첫열매들의 교리를 단순화하면 몇 가지 핵심 명제가 보인다.

첫째, 회개한 사람에게 하나님이 믿음을 선물하신다.

둘째, 그 믿음은 단순한 인간의 결단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 즉 의심 없이 완전하게 믿어지는 믿음이라는 것이다.

셋째, 그 믿음으로 거듭난 사람은 영생을 잃지 않는다.

넷째, 바울에게 맡겨진 ‘무할례자들의 복음’과 베드로에게 맡겨진 ‘할례자들의 복음’을 구별하며, 이것을 단순한 선교 대상의 차이가 아니라 시대적·구원론적 차이로 해석한다.

다섯째, 구원의 핵심을 그리스도와의 연합, 곧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사는 것으로 설명한다.

이 다섯 가지를 놓고 보면 첫열매들의 신학은 단순한 감리교도, 단순한 침례교도, 단순한 개혁주의도 아니다.

오히려 여러 전통에서 요소를 가져와 하나의 독자적인 구원론으로 재구성한 모습에 가깝다.

첫열매들이 웨슬리안 전통과 가까운 부분은 분명히 있다.

특히 회개와 믿음의 관계다.

인간이 자신의 능력으로 하나님께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먼저 작용하고, 인간이 회개와 믿음으로 응답한다는 구조는 웨슬리안 신학과 상당한 친화성을 갖는다.

그러나 영생을 한 번 얻으면 결코 잃을 수 없다는 주장에서는 결정적으로 달라진다.

웨슬리안 전통은 일반적으로 신자가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고 구원에서 떨어질 가능성을 인정한다.

반면 첫열매들은 현재의 이방인의 시대에 참으로 거듭난 사람은 영생을 잃을 수 없다고 본다.

이 점에서는 오히려 개혁주의의 성도의 견인과 결과적으로 가까워진다.

그러나 여기서도 중요한 차이가 있다.

개혁주의는 성도의 견인을 하나님의 선택과 효과적인 부르심, 성령의 역사라는 교리적 구조 속에서 설명한다.

첫열매들은 그것을 주로 바울에게 맡겨진 이방인의 복음과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세대주의적 틀 안에서 설명한다.

결과는 비슷하지만 신학적 논리는 다르다.

첫열매들의 신학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부분은 역시 ‘두 복음’이다.

박진영은 갈라디아서 2장의 ‘할례자들에게 복음’과 ‘무할례자들에게 복음’을 단순히 유대인과 이방인이라는 선교 대상의 차이로 보지 않는다.

그는 이것을 서로 다른 시대에 적용되는 복음의 구별로 이해한다.

현재는 이방인의 시대이므로 바울에게 맡겨진 무할례자들의 복음이 적용되고, 이후에는 다시 다른 시대적 질서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여기서 첫열매들의 신학은 일반적인 개신교 신학과 상당히 멀어진다.

전통적인 개신교는 바울이 특별히 이방인의 사도였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바울의 복음과 베드로의 복음을 서로 다른 구원 체계로 분리하지 않는다.

갈라디아서의 핵심도 오히려 유대인과 이방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동일한 복음에 참여한다는 데 있다고 본다.

따라서 첫열매들의 주장에서 가장 중요한 신학적 질문은 이것이다.

갈라디아서 2장의 ‘할례자와 무할례자’는 정말 서로 다른 구원론을 의미하는가?

아니면 하나의 복음을 서로 다른 선교 대상에게 전하는 사도적 사역의 구분인가?

이 문제는 단순한 교파적 취향의 차이가 아니다.

신약성서의 복음론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의 문제다.

또 하나 주목해야 할 것은 첫열매들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구원의 중심에 놓는다는 점이다.

바울에게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산다는 표현은 분명히 중요하다. 따라서 첫열매들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강조한다는 사실 자체가 비정통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발전시키느냐이다.

전통적인 대속론은 기본적으로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대신하여 죽으셨다는 구조를 갖는다.

첫열매들은 여기에 더해 그리스도와 내가 한 몸이 되어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해석을 구원의 핵심 메커니즘으로 강조한다.

이것이 기존의 대속론을 보완하는 설명인지, 아니면 기존 대속론을 대체하는 독자적인 구원론인지가 검증되어야 한다.

바로 여기서 신학적 논쟁이 시작된다.

현재 공개된 자료만 가지고 “첫열매들은 이단이다”라고 단정하는 것은 신학적으로 성급하다.

그러나 반대로 “성경을 믿으니 정통이다”라고 말하는 것도 충분하지 않다.

왜냐하면 기독교 역사에서 이단 논쟁의 핵심은 대부분 성경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리우스도 성경을 인용했다.

영지주의자들도 성경을 사용했다.

마르키온도 자신이 성경을 올바르게 이해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문제는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고, 어떤 본문을 중심에 놓으며, 서로 다른 본문을 어떤 신학적 구조로 연결하느냐였다.

첫열매들도 마찬가지다.

문제는 그들이 성경을 인용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성경의 구조를 어떻게 재구성하느냐에 있다.

그래서 ‘정통 교회와 이단 교회의 구분은 종이장 한 장 차이’라는 말은 상대주의를 뜻하지 않는다.

그 한 장에는 교리적 경계선이 적혀 있다.

그리고 그 경계선은 때로 매우 얇다.

삼위일체와 삼신론의 차이도 그랬고,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설명하는 방식도 그랬으며, 은혜와 자유의지, 예정과 선택, 칭의와 성화의 관계도 그랬다.

하지만 얇다고 해서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작은 개념 하나가 신학 전체의 구조를 바꿀 수 있다.

첫열매들의 경우도 그렇다.

‘무할례자들의 복음’이 단순한 선교적 구분인지, 독립적인 구원론인지.

‘완전한 믿음’이 일반적인 구원의 믿음을 특별한 체험적 확신으로 설명한 것인지, 구원의 필수 조건으로 새롭게 규정한 것인지.

‘영생을 잃을 수 없다’는 주장이 성도의 견인과 같은 것인지, 전혀 다른 세대주의적 구원론인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전통적인 대속론의 확장인지, 독자적인 대속론인지.

이 네 가지를 검증하면 첫열매들의 신학적 위치가 상당 부분 드러난다.

그래서 나는 박진영 현상을 단순한 ‘연예인 종교 논란’으로 보는 것에 반대한다.

박진영은 이제 자신이 무엇을 믿는지 공개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그 설명에는 상당한 성경 지식과 교리적 체계가 있다.

동시에 기존 교파의 교리를 그대로 받아들이지도 않는다.

웨슬리안에서 회개와 믿음의 구조를 가져오고, 개혁주의와 유사한 영생의 불가역성을 주장하며, 세대주의적 성경해석을 수용하고, 바울의 특별한 위치를 강조하면서, 결국 ‘무할례자들의 복음’이라는 독자적인 구원론을 구성한다.

이것은 단순한 성경공부 모임의 언어를 넘어선다.

하나의 신학 체계가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학계가 해야 할 일도 분명하다.

박진영의 유명세를 가지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

그의 과거 종교 논란을 현재의 교리적 증거로 사용할 수도 없다.

신천지 출신 신자가 있다는 사실 역시 첫열매들의 교리를 판정하는 직접적인 증거가 아니다.

교리를 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 교리를 다시 성경 본문과 교회사와 조직신학의 전체 구조 속에 놓아야 한다.

나는 현재의 자료만으로 첫열매들을 이단이라고 규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정통 개신교의 여러 전통 가운데 하나라고 쉽게 인정할 수도 없다.

현재까지 공개된 교리만 놓고 보면 첫열매들은 기존의 여러 신학적 요소를 결합하여 독자적인 구원론과 성경해석을 구성하고 있는 공동체라고 보는 것이 가장 정확하다.

따라서 앞으로 검증해야 할 핵심은 명확하다.

첫째, 갈라디아서 2장의 두 복음 해석이 정당한가.

둘째, 바울의 복음을 현재 이방인 시대의 독자적인 구원 체계로 구분할 수 있는가.

셋째, ‘완전한 믿음’이라는 개념이 성경적 구원론 안에서 어떤 위치를 갖는가.

넷째,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대속의 핵심 메커니즘으로 재구성하는 것이 정당한가.

다섯째, 영생의 불가역성을 세대주의적 구원론과 연결하는 것이 신약성서 전체와 조화를 이루는가.

이 질문에 답하지 않고 ‘이단’이라는 단어부터 던지는 것은 신학적 검증이 아니다.

그러나 이 질문들을 끝까지 검토한 뒤에도 기존의 사도적 신앙과 양립하기 어려운 지점이 발견된다면, 그때는 그 차이를 정확한 교리적 언어로 지적해야 한다.

정통은 인기투표가 아니다.
이단은 낙인찍기도 아니다.

정통과 이단의 구분에는 역사적 권력관계가 작용했지만, 그렇다고 모든 정통이 단순히 권력의 산물인 것도 아니다. 결국 교회는 오랜 시간 동안 성경과 사도적 전승, 신조와 예배, 신학적 논쟁을 통해 무엇을 기독교 신앙의 중심으로 받아들일 것인지 결정해왔다.

따라서 박진영의 첫열매들을 바라볼 때도 두 극단을 피해야 한다.

“유명 연예인이 만든 종교이니 이단이다.”

이것도 아니고,

“성경을 많이 인용하니 정통이다.”

이것도 아니다.

그 사이에서 해야 할 일이 있다.

텍스트를 읽고, 논리를 검증하고, 교리를 비교하는 일이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첫열매들은 상당히 흥미로운 신학적 사례가 된다.

그들의 문제가 단순히 박진영이라는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우리에게 오래된 질문을 다시 던진다.

누가 정통을 결정하는가?

그리고 그보다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무엇이 기독교를 기독교이게 하는가?

결국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가지고 있지 않은 채 누군가에게 ‘이단’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은, 정작 자신이 지키고 있다고 주장하는 정통의 내용조차 설명하지 못하는 일이 될 수 있다.

정통과 이단 사이의 종이 한 장은 얇다.

그러나 그 한 장을 넘기기 위해서는 오히려 더 많은 성경과 더 깊은 교회사와 더 엄밀한 신학이 필요하다.

박진영의 첫열매들을 판단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낙인보다 검증이 먼저다.
정죄보다 논증이 먼저다.
그리고 유명세보다 교리가 먼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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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서 오래 살면서 종교와 여행과 문화 탐방에 관심을 기울인 결과 지식으로 농사를 짓게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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