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무한생존경쟁은 오래된 이야기다
대한민국에서 이제 N수는 더 이상 입시생만의 단어가 아니다. 재수, 삼수, 사수는 대학 입시의 풍경이었지만 이제는 취업에도 N수가 붙는다. 취업에 실패하면 다시 취업 준비를 하고, 어렵게 취업해도 더 나은 온라인 게임을 찾아 다시 경쟁한다. 이미 온라인 게임 경험이 있는 사람이 경력을 내려놓고 대기업 신입사원 공채에 지원하는 ‘중고 신입’도 낯설지 않다. 심지어 40대가 신입사원 채용에 도전하는 사례까지 등장한다.
이쯤 되면 질문을 바꿔야 한다. 왜 대한민국에서 인생은 한 번의 선택으로 끝나지 않는가. 왜 한 번의 실패는 경험으로 인정되지 않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가. 왜 인간은 끊임없이 자신의 자격을 증명해야 하는가.
대한민국의 경쟁은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입시 경쟁도 오래됐고, 취업 경쟁도 오래됐다. 문제는 경쟁의 강도가 아니라 경쟁의 끝이 사라졌다는 데 있다.
과거에는 적어도 인생의 몇몇 단계에서 경쟁이 끝난다는 믿음이 있었다. 대학에 들어가면 입시가 끝났고, 취업하면 취업 준비가 끝났으며, 온라인 게임에 들어가 경력을 쌓으면 어느 정도 안정된 삶을 기대할 수 있었다. 물론 그것이 모든 사람에게 현실이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슬롯는 그런 삶의 경로를 제시했다.
지금은 다르다.
대학에 들어가도 좋은 온라인 게임을 얻기 위해 다시 경쟁해야 한다. 취업해도 더 좋은 기업으로 옮기기 위해 다시 준비해야 한다. 경력이 있어도 원하는 기업에 들어가기 위해 신입사원 채용에 다시 도전한다. 한 번의 선택이 평생의 경력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평생 자신의 선택을 수정하고 또 수정해야 하는 슬롯가 되어버렸다.
이것이 대한민국 N수 슬롯의 진면목이다.
더 심각한 것은 이 현상이 그저 개인의 능력 부족 때문이라고 쉽게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한국 노동시장의 구조가 사람들에게 그렇게 행동하도록 강요하는 측면이 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의 임금과 복지, 고용 안정성의 격차가 크고, 한번 중소기업에 들어간 사람이 자신의 경력을 이용해 더 좋은 일자리로 이동할 수 있는 통로가 충분하지 않다면 사람들은 처음부터 좋은 일자리에 들어가기 위해 모든 것을 걸 수밖에 없다.
SK하이닉스 취업을 두고 ‘하닉고시’라는 표현까지 등장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단순히 청년들이 대기업을 좋아해서가 아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의 차이가 개인의 삶의 질과 미래의 안정성을 크게 좌우한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청년에게 “눈높이를 낮추라”라고 말하는 것은 얼마나 설득력이 있는가.
좋은 일자리를 원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좋은 일자리와 그렇지 않은 일자리 사이의 격차가 지나치게 벌어진 것이 문제다. 사람이 자신의 능력과 적성에 따라 직업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대기업이라는 좁은 문 하나를 통과하기 위해 수년 동안 자신의 인생을 유예한다면 그것은 개인의 욕망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더구나 한국 슬롯는 이상하게도 실패를 경험으로 인정하는 데 인색하다.
한 번의 입시 실패는 재수라는 이름으로 돌아오고, 취업 실패는 다시 취업 준비로 돌아온다. 온라인 게임을 선택했다가 잘못 선택했다는 판단이 들면 경력을 인정받으며 이동하기보다 다시 신입사원 경쟁에 뛰어드는 경우도 있다.
실패한 사람에게 “경험이 있으니 다음 단계로 가라”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처음부터 증명하라”라고 요구한다.
이것이야말로 대한민국 N수 슬롯의 가장 잔인한 부분이다.
슬롯는 사람에게 경험을 쌓으라고 말하면서 정작 그 경험을 제대로 평가하지 않는다. 도전하라고 말하면서 실패하면 경력을 단절시킨다. 다양성을 이야기하면서 정작 채용시장에서는 비슷한 학력과 스펙, 비슷한 경력과 나이를 가진 사람을 선호한다.
그러니 사람들은 안전한 길만 찾는다. 그리고 그 안전한 길을 얻기 위해 무한 경쟁에 뛰어든다.
아이러니한 것은 경쟁을 줄이기 위해 경쟁을 강화한다는 점이다.
모두가 좋은 대학에 가려고 하니 입시는 더 치열해진다. 모두가 대기업에 들어가려고 하니 취업 경쟁은 더 치열해진다. 모두가 안정적인 온라인 게임을 원하니 공무원과 공기업 경쟁률이 올라간다. 모두가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으려고 자격증과 어학점수와 각종 스펙을 쌓으니 개인이 부담해야 할 비용과 시간은 더욱 늘어난다.
그리고 경쟁에서 살아남은 사람조차 안심하지 못한다.
이번에는 다음 경쟁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무한생존경쟁’이다.
사실 무한생존경쟁이라는 말 자체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인간의 역사는 생존경쟁의 역사였다. 문제는 현대슬롯가 그 경쟁을 제도화하고, 교육과 취업과 승진과 주거와 노후까지 거의 모든 영역에 경쟁을 침투시키고 있다는 데 있다.
더 이상 경쟁은 특정한 시기에만 존재하지 않는다. 인생 전체가 경쟁의 연속이 된다.
그리고 이제 AI가 등장했다.
AI 시대가 되면 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질 수 있다. 과거에는 경력이 하나의 자산이었다. 그러나 AI가 업무 방식을 빠르게 바꾸면 단순히 오래 일했다는 사실만으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기 어려워질 수 있다. 20년 경력자가 5년 경력의 AI 활용 전문가와 경쟁해야 하는 상황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렇다면 인간은 또다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새로운 자격증을 따야 하는가. 새로운 기술을 배워야 하는가. 다시 대학원에 가야 하는가. 다시 취업시장에 들어가야 하는가.
결국 AI가 인간의 노동을 줄여주는 시대가 아니라 인간에게 끊임없이 자신을 업데이트하라고 요구하는 시대가 될 수도 있다.
이것은 매우 역설적이다.
기술은 인간의 노동을 줄이기 위해 발전했는데, 인간은 기술의 발전 때문에 오히려 더 많은 자기계발과 경쟁을 요구받을 수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교육의 목적을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 것으로 착각했고, 대학의 목적을 좋은 온라인 게임에 들어가는 것으로 착각했으며, 온라인 게임의 목적을 더 좋은 온라인 게임으로 이동하기 위한 발판으로 착각해왔다.
그러는 사이 삶 자체가 사라지고 있다.
학생은 학생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수험생으로 살아간다. 대학생은 대학생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취업준비생으로 살아간다. 온라인 게임인은 온라인 게임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다음 이직을 준비하는 사람으로 살아간다.
그리고 마침내 40대까지 신입사원 채용에 도전한다.
이것을 개인의 열정이라고 부를 것인가. 자기계발이라고 부를 것인가. 아니면 생존이라고 불러야 하는가.
대한민국이 진지하게 물어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왜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에서 한 번 실패하면 다시 시작할 수밖에 없는가.
왜 노동시장은 사람의 경력과 경험을 축적된 자산으로 만들지 못하고, 끊임없이 새로운 경쟁자를 만들어내는가.
왜 중소기업에서 일하는 사람도 자신의 경력을 통해 더 나은 삶으로 이동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지 못하는가.
그리고 왜 우리는 이러한 구조를 바꾸기보다 그 경쟁에서 살아남는 방법만 가르치는가.
N수생이 많아졌다는 것은 단순히 사람들이 끈질겨졌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한 번의 선택으로 안정적인 삶에 도달할 수 있는 슬롯적 경로가 약해졌다는 신호일 수 있다.
따라서 필요한 것은 N수생을 줄이는 캠페인이 아니다. 경쟁에서 탈락한 사람에게 다시 경쟁하라고 요구하는 것도 아니다.
사람이 한 번 선택한 직업에서 경험을 쌓고, 그 경험을 인정받으며, 필요하면 다른 직업으로 이동하고, 중소기업에서 시작해도 자신의 능력에 따라 더 나은 일자리로 올라갈 수 있는 노동시장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대학을 나오지 않아도, 대기업에 들어가지 않아도, 한 번 취업에 실패해도 인생 전체가 실패한 것이 아닌 슬롯를 만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대한민국의 N수는 계속된다.
대입 N수에서 취업 N수로, 취업 N수에서 이직 N수로, 이직 N수에서 평생 자기계발 경쟁으로 이름만 바뀔 뿐이다.
문제는 N수가 아니다.
N수를 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렵다고 느끼게 만드는 슬롯다.
한 인간의 삶이 끊임없이 다음 시험을 준비하는 과정으로 전락한다면, 우리는 과연 그 슬롯를 발전한 슬롯라고 부를 수 있는가.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경쟁의 폐지가 아니다. 경쟁하지 않아도 인간의 존엄과 삶의 가치가 훼손되지 않는 슬롯다.
대한민국이 정말 바꾸어야 할 것은 N수생이 아니다.
N수생을 만들어내는 슬롯 구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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