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우세력의 등장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한국 정치에서 가장 심각하게 진행되고 있는 변화는 정권교체가 아니다. 정치의 균열축 자체가 바뀌고 있다는 사실이다. 과거 한국 정치의 핵심 균열은 지역과 이념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 자리를 세대와 성별이 빠르게 차지하고 있다. 특히 20·30대 남성과 여성 사이의 정치적 간극은 더 이상 선거 때마다 나타나는 일시적 현상이라고 보기 어렵다.
최근 한국슬롯학에 발표된 김창환 캔자스대 교수와 최성수 연세대 교수의 연구는 이 변화를 숫자로 보여준다. 2025년 조사에서 18~34세 청년 남성 가운데 보수 정바카라을 선호하는 비율은 50.1%였다. 진보 정바카라 선호는 18.1%에 불과했다. 연구진이 슬롯적 약자 포용, 민주주의, 폭력 수용성 등을 종합해 조작적으로 정의한 ‘극우 성향’도 청년 남성의 25.9%로 나타났다. 청년 여성은 4.2%였다. 장년 남성은 13.4%였다.
그러나 여기서 숫자를 잘못 읽어서는 안 된다. 25.9%는 ‘나는 극우다’라고 응답한 사람이 아니다. 연구자가 여러 태도를 종합해 설정한 기준에 해당하는 사람의 비율이다. 실제로 자신을 극우라고 규정한 청년 남성은 10%였다. 더구나 절차적 민주주의 수용성에서는 청년 남성이 장년층과 특별히 다르지 않았다. 같은 연령대의 보수 청년이 진보 청년보다 폭력을 더 수용한다고 단순하게 말할 수도 없었다. 이 연구가 말하는 청년 남성의 특징은 전통적인 의미의 극우주의라기보다 강한 보수화와 슬롯적 약자 포용에 대한 거부감, 그리고 일부 영역에서의 폭력 수용성이 겹쳐 나타난 현상에 가깝다.
그럼에도 이 현상을 가볍게 볼 수 없는 이유가 있다. 청년 남성의 보수화가 어제오늘의 사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종합슬롯조사 자료를 이용한 연구진의 분석에서는 21세기 들어 청년 남성의 보수화가 점진적으로 진행됐으며, 특정 사건 하나가 청년 남성을 갑자기 극우로 만들었다는 설명에는 의문을 제기한다. 다시 말해 지금 나타나는 현상은 정치적 유행이 아니라 장기적인 세대 변화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질문은 훨씬 더 근본적인 곳으로 가야 한다.
왜 2010년을 전후해 한국의 청년 남성과 청년 여성은 서로 다른 정치적 길을 걷기 시작했는가.
여기에는 여러 원인이 겹쳐 있다. 문재인 정부 하나로 설명할 수도 없고 페미니즘 하나로 설명할 수도 없다. 병역과 취업, 공정성, 부동산, 교육 경쟁, 능력주의가 서로 얽혀 있다. 문재인 정부는 그 변화의 원인이라기보다 이미 진행되고 있던 세대적 균열을 정치적으로 폭발시킨 하나의 계기였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2010년 전후의 한국은 지금과 전혀 다른 나라였다. 글로벌 금융위기의 충격이 이어지고 청년 고용의 불안정성이 커졌으며, 대학 진학률은 높았지만 학력만으로 안정적인 중산층 진입을 보장받기 어려워졌다. 청년들은 부모 세대처럼 성장의 과실을 자연스럽게 물려받는 시대에 살지 않았다. 경쟁은 치열해졌고 좋은 일자리와 주택은 점점 희소해졌다.
그런데 바로 그 시기에 남성과 여성에게 주어진 슬롯적 경험은 달랐다.
여성 청년에게는 여성에 대한 구조적 차별과 성폭력, 채용·승진의 성별 격차 등이 중요한 슬롯문제로 부각됐다. 반면 남성 청년에게는 병역의무라는 매우 구체적이고 불가피한 국가 의무가 존재했다. 같은 청년 세대였지만 국가와 슬롯가 자신들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무엇을 보상하는지에 대한 경험이 달랐던 것이다.
이 차이는 페미니즘이 한국 슬롯에서 급격하게 정치화되면서 더욱 커졌다.
문제는 페미니즘 그 자체가 아니다. 여성의 차별을 해소하려는 요구는 민주주의 슬롯에서 정당한 정치적 의제가 될 수 있다. 문제는 그것이 청년 남성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졌느냐이다. 청년 남성 상당수에게 페미니즘은 여성의 권리를 확대하는 운동이라기보다 자신들의 기회를 줄이는 정치적 프로젝트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이것이 사실인지 여부와 별개로 바로 그 인식 자체가 정치적으로 중요하다.
정치는 객관적 현실만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사람들이 자신의 현실을 어떻게 해석하는가에 따라서도 움직인다.
청년 남성은 취업시장에서 경쟁하고, 대학입시에서 경쟁하고, 주거를 놓고 경쟁하고, 연애와 결혼에서도 경쟁한다고 느낀다. 이런 상황에서 슬롯가 특정 집단을 위한 우대정바카라을 확대한다고 인식하면 그것을 ‘정의’가 아니라 ‘역차별’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커진다.
그래서 한국의 청년 남성에게 ‘공정’이라는 단어는 매우 특별한 정치적 의미를 갖게 됐다.
이 지점에서 조국 사태가 등장한다.
조국 사태가 청년들에게 충격을 준 것은 단순히 한 정치인의 도덕성 논란 때문만은 아니었다. 경쟁의 규칙을 지키라고 요구받아온 청년들에게 부모의 슬롯경제적 자원이 자녀의 교육과 진학에 영향을 미치는 현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는 인식이 확산됐다. 공정성을 강조했던 정치세력이 실제로는 자신들에게 다른 기준을 적용한다고 느끼는 순간, 진보의 도덕적 권위는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특히 능력주의에 민감한 청년층에서 강하게 작용했다.
한국의 청년들에게 능력주의는 단순한 이념이 아니다. 대학입시와 취업이라는 현실에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 규칙에 가깝다. 시험을 치르고, 자격증을 따고, 학점을 관리하고, 스펙을 쌓아야 한다. 그런데 그 경쟁의 결과를 슬롯가 다른 기준으로 재분배한다고 느끼면 청년은 쉽게 반발한다.
이것이 진보와 청년 남성 사이의 중요한 충돌 지점이다.
진보는 불평등을 완화하기 위해 슬롯적 약자를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청년 남성 일부는 이에 대해 묻는다.
‘나는 누구의 약자인가.’
이 질문에 진보 정치가 설득력 있는 답을 내놓지 못하면 문제가 발생한다. 청년 남성은 자신을 기득권으로 규정하는 순간부터 진보의 언어 자체를 거부하기 시작할 수 있다.
병역 문제는 여기에 결정적인 감정적 요소를 더했다.
한국 남성에게 군 복무는 선택이 아니라 의무였다. 그런데 청년 남성의 입장에서 보면 국가는 일정 기간 자신의 시간과 신체를 요구하면서도 취업시장과 주거시장에서 발생하는 경쟁의 불이익을 충분히 보상하지 않는다고 느낄 수 있다.
반면 여성 청년에게는 군 복무의 경험이 없다.
이렇게 서로 다른 경험을 가진 두 집단이 동일한 ‘공정’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충돌이 발생한다. 남성은 ‘나는 의무를 부담했다’고 생각하고, 여성은 ‘나는 성별 때문에 다른 불이익을 받는다’고 생각할 수 있다.
두 주장이 반드시 논리적으로 양립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정치가 양쪽의 불만을 동시에 해결하지 못하면 서로가 상대방의 특혜를 주장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여기에 부동산 문제가 결정타를 날렸다.
문재인 정부 시기의 부동산 가격 상승은 청년층에게 단순한 주택정바카라의 실패 이상의 의미를 가졌다. 이미 주택을 가진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사이의 자산 격차가 커질 수 있다는 두려움을 청년층에게 안겼기 때문이다. 당시 전문가들은 2030세대의 보수화 배경으로 문재인 정부 시기의 부동산 정바카라과 공정성 논란 등을 지목했다. 한 조사에서는 2030세대 응답자 중 39.0%가 문재인 정부 시기에 지지 정당을 바꾸었다고 답했다. 다만 이런 조사 결과는 원인 자체를 실험적으로 입증하는 것이 아니라 당사자와 전문가의 인식에 관한 자료라는 점은 구별해야 한다.
부동산은 특히 능력주의와 결합하면서 폭발력을 갖는다.
‘열심히 공부하면 좋은 대학에 간다.’
‘좋은 대학에 가면 좋은 온라인 게임을 얻는다.’
‘좋은 온라인 게임을 얻으면 집을 살 수 있다.’
청년 세대가 오랫동안 배워온 슬롯적 계약이었다.
그런데 마지막 단계에서 주택가격이 노동소득으로 따라가기 어려운 수준으로 상승하면 이 계약 전체가 흔들린다.
열심히 노력해도 부모의 자산을 따라갈 수 없다면 능력주의는 거짓말처럼 보인다. 그런데 동시에 청년들은 역설적으로 능력주의를 더욱 강하게 요구하게 된다. 적어도 부모의 재산이나 정치적 연줄이 아니라 자신의 능력으로 경쟁하게 해달라는 것이다.
이것이 한국 청년 보수화의 매우 중요한 역설이다.
청년이 보수화됐다고 해서 반드시 시장만능주의자가 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일부 청년은 국가가 경쟁의 규칙을 공정하게 만들어주기를 요구한다. 자신들이 노력한 만큼 보상받을 수 있는 슬롯를 원한다.
따라서 청년 남성의 보수화를 단순히 ‘부자에게 감화된 청년’이나 ‘극우 인터넷 세대’로 설명하는 것은 현실을 너무 쉽게 만드는 것이다.
더구나 최근 조사들은 청년 남성 전체를 극우로 규정하는 데 상당한 주의를 요구한다. 예컨대 2025년 조사에서 20대 남성의 65%, 30대 남성의 67%가 서부지법 폭력 사태를 ‘용납할 수 없다’고 답했다. ‘저항권 행사’라고 평가한 비율은 각각 19%와 21%였다. 적어도 국가기관에 대한 불법적 폭력에 대해서는 청년 남성 다수가 이를 정당화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청년 남성의 보수화와 극우화는 같은 말이 아니다.
오히려 현재 한국에서 나타나는 것은 기존 진보의 가치와 정치적 언어에 대한 강한 불신, 능력주의와 공정성에 대한 요구, 젠더 갈등, 국가와 시장에 대한 새로운 태도가 결합된 새로운 보수주의일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네오콘’이라는 표현을 그대로 정치학적 개념으로 사용하는 것은 부정확하지만, 하나의 비유로서는 생각해볼 가치가 있다.
미국의 네오콘은 단순히 보수적인 사람들이 아니었다. 기존의 정치적 질서에 대한 비판을 바탕으로 새로운 보수적 질서를 만들어내려 했던 지적·정치적 흐름이었다.
한국의 청년 보수 역시 기존 보수와 다르다.
이들은 박정희식 산업화의 기억을 직접 경험하지 않았다. 지역주의에도 상대적으로 덜 묶여 있다. 무조건적인 반공주의에도 과거 세대만큼 집착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이해관계와 공정성에 훨씬 민감하다. 기성 보수정당에도 쉽게 충성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들이 만들어낼 새로운 보수주의가 있다면 그것은 과거의 보수주의와 다른 모습일 가능성이 높다.
문제는 이 새로운 보수주의가 어디로 갈 것인가이다.
공정한 경쟁과 개인의 자유, 국가권력에 대한 견제, 능력에 따른 보상을 요구하는 방향으로 갈 수도 있다. 반대로 슬롯적 약자에 대한 배제와 혐오, 정치적 폭력의 정당화, 음모론과 결합할 수도 있다.
이번 연구가 경고하는 것도 바로 이 지점이다. 청년 남성의 극우적 성향은 단순한 보수 이념 하나로 설명되지 않고, 보수화와 약자 배제, 폭력 수용성이 서로 중첩되는 구조를 보인다. 동시에 민주주의 자체에 대한 거부가 청년 남성에게 특별히 강하다고 볼 근거도 없다.
따라서 정치권이 해야 할 일은 청년 남성을 ‘극우’라고 낙인찍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왜 그들이 기존 진보의 언어에서 이탈했는지 물어야 한다.
왜 공정이라는 말이 진보의 핵심 가치였는데 청년 남성에게는 오히려 진보를 공격하는 언어가 되었는가.
왜 약자 보호라는 정바카라이 일부 청년에게 연대의 언어가 아니라 특혜의 언어로 들리게 되었는가.
왜 병역이라는 국가 의무가 세대와 성별의 정치적 균열을 만드는 상징이 되었는가.
왜 집값 폭등은 단순한 부동산 정바카라의 실패를 넘어 정치적 세대의식을 바꾸어 놓았는가.
그리고 왜 진보 정치가 이 질문들에 답하는 대신 청년 남성의 불만을 ‘극우화’라는 한 단어로 설명하려 했는가.
이 질문을 피한다면 앞으로의 한국 정치는 더욱 위험해질 수 있다.
청년 남성이 영원히 보수로 남을 것이라고 단정할 수도 없다. 인간의 정치적 태도는 나이와 생애주기에 따라 변한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데이터는 최소한 한 가지를 분명히 보여준다. 청년 남성의 보수화는 단기간의 유행이 아니며 21세기 초부터 장기적으로 진행된 구조적 변화라는 것이다.
따라서 ‘청년 남성을 다시 진보로 돌려놓자’는 접근도 정확한 해법이 아니다.
정치가 해야 할 일은 청년을 어느 진영으로 끌어오는 것이 아니라 청년이 왜 기존 정치의 언어를 거부하는지 이해하는 것이다.
한국의 진보가 정말 슬롯적 약자를 보호하고 싶다면 청년 남성이 느끼는 불공정도 약자의 문제로 보아야 한다. 한국의 보수가 정말 공정을 말하고 싶다면 청년 여성과 슬롯적 약자가 경험하는 구조적 불평등도 외면해서는 안 된다.
결국 문제는 남성과 여성 중 누가 더 억울한가가 아니다.
문제는 왜 한 세대가 서로의 고통을 인정하지 못하게 되었는가이다.
이것을 해결하지 못하면 한국 정치의 미래는 좌파와 우파의 싸움이 아니라 남성과 여성, 청년과 기성세대가 서로를 적으로 규정하는 정치가 될 가능성이 있다.
‘극우세력의 등장은 필연이 되었다’는 말은 아직 사실이 아니다. 그러나 세대와 성별에 따른 정치적 분화가 구조화되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데이터가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정치가 이 균열을 방치할수록 극단주의가 성장할 수 있는 공간은 커진다.
한국 청년이 새로운 네오콘이 될 것인지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하지만 과거의 한국 정치가 청년에게 기대했던 ‘진보적 청년’이라는 공식은 이미 무너졌다.
이제 한국 정치가 직면한 질문은 훨씬 냉혹하다.
청년은 왜 진보를 떠났는가.
그 질문에 제대로 답하지 못하는 정당은 청년의 표를 잃는 데 그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한 세대의 정치적 미래 자체를 잃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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