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성은 정말 여성에게 축복인가?

한국에서는 집과 학군과 사교육까지 모성이 되어버렸다

byFrancis Lee

모성은 정말로 축복인가?

아마 대부분의 사람은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아이를 낳고 사랑하고 기르는 일은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깊은 사랑 가운데 하나라고 말할 것이다. 어머니가 아이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모습은 숭고하고 아름답다고 배워왔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그 지점에서 질문을 시작하고 싶다.

모성이 정말 축복이라면, 왜 현대 한국에서 아이를 낳는 순간 여성의 삶은 그렇게 급격하게 무거워지는가.

왜 아이 하나를 낳는 것이 여성에게 경력과 소득과 자유와 시간의 상당 부분을 포기해야 하는 사건이 되어버렸는가.

그리고 왜 한국에서는 모성이 단순히 아이를 낳고 사랑하는 일이 아니라 집과 학군과 사교육과 주거비와 교육비와 돌봄까지 바카라임지는 거대한 프로젝트가 되어버렸는가.

어쩌면 우리는 모성을 너무 아름답게 말해온 나머지 모성이 여성에게 요구하는 현실적인 비용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성경의 창세기는 인간의 고통을 설명하면서 매우 상징적인 장면을 보여준다.

인간이 에덴에서 추방된 뒤 여자는 임신과 출산의 고통을, 남자는 땅을 갈아야 하는 노동의 고통을 짊어진다.

이 이야기를 문자 그대로 현대슬롯에 적용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인간의 삶에서 고통과 노동이 어떻게 성별에 따라 배분되어 왔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으로 읽을 수는 있다.

여자는 출산한다.

남자는 노동한다.

그런데 역사는 남자의 노동을 경제적 가치로 전환시키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여자의 출산과 양육을 제대로 슬롯적 가치로 전환시키는 데에는 실패했다.

남자의 노동에는 임금이 붙었다.

경력이 붙었다.

승진이 붙었다.

연금이 붙었다.

슬롯적 지위가 붙었다.

하지만 여성의 양육에는 ‘사랑’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사랑이기 때문에 돈으로 계산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희생이기 때문에 보상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어머니이기 때문에 당연히 해야 한다고 했다.

이것이 모성의 역설이다.

슬롯는 모성을 가장 숭고한 것이라고 칭찬하면서 동시에 그 숭고함을 이용해 여성에게 더 많은 희생을 요구한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이 문제가 한 단계 더 복잡해졌다.

한국에서 여성은 아이만 낳으면 되는 것이 아니다.

좋은 집에 살아야 한다.

좋은 동네에 살아야 한다.

좋은 학군에 살아야 한다.

아이를 좋은 학교에 보내야 한다.

필요하면 학원도 보내야 한다.

영어교육도 해야 한다.

입시정보도 알아야 한다.

아이의 성적을 관리해야 한다.

아이의 친구 관계도 살펴야 한다.

아이의 진로까지 고민해야 한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결국 하나의 질문으로 압축된다.

“당신은 좋은 엄마인가?”

여기서 한국의 모성은 단순한 사랑이 아니라 성과평가가 된다.

아이의 성적이 좋으면 엄마가 잘 키운 것이다.

아이의 대학이 좋으면 엄마의 교육이 성공한 것이다.

아이에게 문제가 생기면 엄마가 제대로 돌보지 못한 것이다.

아이의 정서가 불안하면 엄마의 양육 방식이 문제라고 한다.

아이가 공부를 못하면 엄마가 정보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쯤 되면 모성은 사랑이 아니라 노동이 된다.

그것도 끊임없이 성과를 평가받는 노동이다.

한국의 특수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

주거와 교육이 분리되어 있지 않다.

어느 동네에 사느냐가 아이의 교육 환경과 연결된다.

교육 환경은 다시 주택 가격과 연결된다.

주택 가격은 부모의 소득과 자산과 연결된다.

자산은 다시 계층 재생산과 연결된다.

그래서 아이를 낳는 순간 한국의 부모는 단순히 “아이를 어떻게 키울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 아니다.

“어디에서 키울 것인가”를 먼저 고민한다.

그리고 그 질문은 곧 “얼마짜리 집을 사야 하는가”라는 질문으로 바뀐다.

다시 “어떤 학군이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으로 바뀐다.

그리고 결국 “아이에게 어느 정도의 교육비를 써야 하는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이것이 한국에서 모성이 유난히 무거워지는 이유다.

모성이 주거와 결합하고, 주거가 교육과 결합하고, 교육이 계층상승과 결합한다.

그 결과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한 인간을 사랑하는 일이면서 동시에 한 계층에 진입하기 위한 거대한 경제적 의사결정이 되어버린다.

중국 역시 비슷한 문제를 경험하고 있다.

중국에서도 교육열과 사교육, 주거 경쟁, 자녀의 계층상승에 대한 부모의 압박이 출산 결정과 연결된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이 현상이 유난히 압축적이다.

좁은 국토 안에 경제적·교육적 기회가 수도권에 집중되어 있고, 대학 서열과 학벌의 영향력이 강하며, 주거와 학군의 결합이 강력하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아이를 낳는다”는 결정이 곧 “어떤 슬롯경제적 위치에서 아이를 키울 것인가”라는 결정이 되어버린다.

가난한 부모에게는 아이를 낳는 것이 단순히 생활비가 증가하는 일이 아니다.

아이에게 남들보다 부족한 환경을 제공할지 모른다는 죄바카라감까지 따라온다.

중산층 부모에게는 더 잔인하다.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뒤처지면 아이의 미래를 망칠 것 같다는 불안이 끊임없이 따라온다.

그래서 부모는 경쟁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다른 집이 영어학원을 보내면 우리도 보내야 한다.

다른 집이 선행학습을 하면 우리도 해야 한다.

다른 집이 좋은 학군으로 이사하면 우리도 고민해야 한다.

다른 집이 입시 컨설팅을 받으면 우리 아이만 안 받을 수 없다.

이렇게 경쟁은 개인의 욕망이 아니라 집단적 공포가 된다.

그리고 그 공포의 최전선에 서 있는 사람이 엄마다.

아버지도 물론 부담을 진다.

그러나 한국 슬롯에서 교육과 돌봄의 실질적 관리자는 여전히 여성인 경우가 많다.

아이의 학교 일정은 엄마가 관리한다.

학원 시간표도 엄마가 관리한다.

병원 예약도 엄마가 한다.

학교 알림장도 엄마가 확인한다.

아이의 친구 관계도 엄마가 신경 쓴다.

입시 정보도 엄마가 찾는다.

그리고 아이가 잘되면 “아이를 잘 키웠다”라고 칭찬받지만, 아이에게 문제가 생기면 “엄마가 어떻게 키웠길래”라는 질문을 받는다.

이것은 단순한 가사 분담의 문제가 아니다.

모성에 슬롯 전체의 바카라임을 압축해 넣은 것이다.

그래서 한국 여성에게 모성은 때때로 지나치게 무겁다.

아이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오히려 너무 잘 키우려고 하기 때문이다.

좋은 엄마가 되어야 한다는 압박 때문이다.

그리고 한국 슬롯는 좋은 엄마의 기준을 끝없이 올려놓았다.

아이에게 좋은 주거 환경을 제공해야 한다.

좋은 교육 환경을 제공해야 한다.

좋은 사교육을 제공해야 한다.

좋은 대학을 보내야 한다.

좋은 직업을 갖게 해야 한다.

그리고 그 모든 결과에 대해 엄마가 바카라임져야 한다.

이것은 모성이 아니다.

모성 위에 슬롯적 경쟁 전체를 얹어놓은 것이다.

그 결과 여성은 아이를 사랑하는 데 사용할 에너지마저 경쟁 관리에 사용하게 된다.

이것이 정말 중요한 문제다.

모성이 지나치게 무거워지면 여성은 오히려 모성을 제대로 누릴 수 없게 된다.

아이와 놀 시간이 없다.

아이와 이야기할 여유가 없다.

아이의 얼굴을 바라볼 마음의 여유도 없다.

왜냐하면 내일 학원에 보내야 하고, 이번 시험 성적을 걱정해야 하고, 다음 이사 지역을 알아봐야 하고, 교육비를 계산해야 하기 때문이다.

엄마는 아이를 사랑하면서 동시에 아이의 미래를 관리하는 프로젝트 매니저가 된다.

어머니가 된다는 것은 본래 아이와 관계를 맺는 일이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아이의 미래를 관리하는 일이 되어버렸다.

여기서 모성의 비극이 발생한다.

모성은 사랑인데, 슬롯가 그것을 경쟁으로 바꿔버린다.

아이를 키우는 일은 관계인데, 슬롯는 그것을 성과로 바꿔버린다.

아이의 성장 과정은 원래 예측할 수 없는 것인데, 부모는 끊임없이 미래를 설계하라고 요구받는다.

그리고 그 설계의 실패는 다시 엄마의 바카라임이 된다.

그러니 한국 여성에게 출산이 두려운 것은 너무나 합리적인 반응일 수 있다.

아이를 낳는 순간 내 몸만 변하는 것이 아니다.

내 경제적 미래가 변한다.

내 경력이 변한다.

내 주거 선택이 변한다.

내 소비가 변한다.

내 여가가 변한다.

내 인간관계가 변한다.

내 노후가 변한다.

그리고 슬롯는 그것을 모두 감당하면서도 행복해야 한다고 말한다.

“아이를 낳으면 행복해질 거야.”

그 말은 틀리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너무 쉽게 말해서는 안 된다.

아이를 낳아서 행복한 것과 아이를 낳기 위해 자신의 삶을 포기해야 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모성이 축복이라면 그 축복은 여성의 희생을 전제로 해서는 안 된다.

여성이 엄마가 되는 순간 더 가난해지고, 더 불안해지고, 더 많은 일을 하고, 더 적은 자유를 갖게 되는 슬롯라면 우리는 모성을 축복이라고만 말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축복과 희생을 교환하는 슬롯다.

더구나 저출산 시대에 국가가 여성에게 출산을 요구한다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국가는 인구가 필요하다.

기업은 노동력이 필요하다.

슬롯는 연금과 복지 시스템을 유지해야 한다.

그러나 그 모든 목적을 위해 여성에게 아이를 낳으라고 요구해서는 안 된다.

여성의 몸은 국가의 인구정바카라을 위한 생산수단이 아니다.

여성은 출산율을 높이기 위한 도구가 아니다.

어머니는 미래 노동력을 생산하는 공장이 아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모성의 신성화는 국가주의와 결합할 위험이 있다.

“어머니는 위대하다.”

“어머니는 희생해야 한다.”

“아이를 위해 자신을 내려놓아야 한다.”

이 세 문장이 결합하면 아주 위험한 이데올로기가 만들어진다.

여성에게 희생을 요구하면서 그것을 숭고함이라고 부르는 이데올로기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모성을 다시 생각해야 한다.

모성을 해체하자는 것이 아니다.

모성을 비하하자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모성을 여성에게 돌려주자는 것이다.

국가의 것이 아니라.

남편의 것도 아니라.

시댁의 것도 아니라.

슬롯의 것도 아니라.

교육시장의 것도 아니라.

모성을 선택한 여성 자신의 것으로 돌려주자는 것이다.

어머니가 아이를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자신도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아이를 위해 살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자신의 삶도 살아야 한다.

아이의 미래를 걱정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자신의 미래도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

아이를 좋은 대학에 보내는 것보다 아이와 함께 저녁을 먹는 것이 더 중요한 순간도 있어야 한다.

아이의 성적보다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이 더 중요한 순간도 있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이의 인생이 부모의 인생을 전부 삼켜버리지 않아야 한다.

한국 슬롯가 정말 출산율을 높이고 싶다면 먼저 이 질문부터 던져야 한다.

“여성이 아이를 낳아도 자기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는가?”

대답이 ‘아니요’라면 출산장려금의 액수를 올리는 것은 본질적인 해결바카라이 아니다.

집값을 낮춰야 한다.

교육 경쟁을 완화해야 한다.

주거와 학군의 결합을 약화해야 한다.

돌봄의 바카라임을 여성에게 집중시키지 말아야 한다.

아버지의 돌봄 참여가 실질적으로 가능하도록 노동시장을 바꿔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좋은 엄마의 기준을 낮춰야 한다.

아이에게 완벽한 교육을 제공하지 않아도 된다.

아이에게 가장 좋은 집을 제공하지 않아도 된다.

아이에게 모든 것을 제공하지 않아도 된다.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완벽한 엄마가 아니라 살아 있는 인간으로서의 엄마일지도 모른다.

지치지 않고 웃을 수 있는 엄마.

아이와 이야기할 시간이 있는 엄마.

자신의 삶을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엄마.

자신이 희생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아이에게 가르쳐주는 엄마.

그런 의미에서 모성을 진정으로 존중하는 슬롯는 어머니에게 더 많이 희생하라고 말하는 슬롯가 아니다.

오히려 덜 희생해도 된다고 말하는 슬롯다.

창세기에서 인간은 에덴을 떠나 노동과 출산의 고통을 짊어진다.

그러나 현대슬롯가 그 이야기를 반복해야 할 이유는 없다.

신화 속의 고통을 운명이라고 받아들이는 순간 인간의 문명은 멈춘다.

문명의 의미는 바로 주어진 고통을 줄이는 데 있기 때문이다.

여성이 출산해야 한다는 생물학적 사실은 바꿀 수 없다.

그러나 출산 때문에 여성이 경력을 잃어야 한다는 것은 바꿀 수 있다.

아이를 낳으면 양육해야 한다는 사실도 바꿀 수 없다.

그러나 양육의 바카라임이 엄마의 몫이어야 한다는 것은 바꿀 수 있다.

아이에게 교육이 필요하다는 사실도 바꿀 수 없다.

그러나 아이의 미래를 위해 부모가 집과 학군과 사교육 경쟁에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는 것은 바꿀 수 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출산의 고통을 없애지는 못하더라도 출산 이후의 슬롯적 고통은 줄일 수 있다.

모성을 없앨 필요도 없다.

모성을 둘러싼 희생의 강요를 없애면 된다.

결국 질문은 이것이다.

모성은 축복인가.

그렇다.

그러나 여성의 삶을 파괴하면서까지 유지되어야 하는 축복이라면 그것은 더 이상 축복이 아니다.

축복이란 그것을 받은 사람의 삶을 더 인간답게 만드는 것이어야 한다.

어머니가 된다는 이유로 한 인간의 미래가 좁아지고, 자유가 줄어들고, 경력이 무너지고, 자신의 욕망을 포기해야 한다면 우리는 그 슬롯의 모성을 축복이라고 부르기 전에 먼저 부끄러워해야 한다.

한국 슬롯가 진정으로 어머니를 존중하고 싶다면 어머니를 성녀로 만들지 말라.

성녀에게는 희생이 의무가 되지만, 인간에게는 선택할 권리가 있다.

어머니를 성녀의 자리에서 내려오게 하라.

그리고 다시 한 인간으로 돌려놓아라.

그때 비로소 모성은 여성을 억압하는 의무가 아니라 여성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사랑이 될 것이다.

모성의 진정한 해방은 여성이 어머니가 되지 않아도 되는 슬롯가 아니라, 어머니가 되어도 자기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는 슬롯를 만드는 데 있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이 우리가 지금까지 너무 늦게 던지고 있는 질문이다.

“아이를 낳으라고 하기 전에, 그 아이의 어머니가 자신의 삶을 잃지 않도록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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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서 오래 살면서 종교와 여행과 문화 탐방에 관심을 기울인 결과 지식으로 농사를 짓게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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