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민주주의의 적은 자유민주주의 자체이다
후쿠야마는 트럼프를 오판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후쿠야마는 트럼프라는 한 인간을 오판한 것이 아니라 인간 자체를 오판했다. 인간은 결코 온전히 이성적인 존재가 될 수 없다. 이성의 가면을 쓴 야만일 뿐이다. 그런데 그런 사실에 대한 오판은 후쿠야마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지난 수십 년 동안 자유민주주의를 신봉해 온 서구 지식인과 정치 엘리트들이 공유했던 집단적 착각이었다.
그들은 인간이 자유를 얻으면 합리적으로 행동할 것이라고 믿었다. 시장에서 충분한 부를 얻으면 욕망이 조절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민주주의가 정착되면 권력은 자연스럽게 견제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경제적으로 성공한 사람은 굳이 정치권력까지 탐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트럼프는 이 모든 낙관론을 비웃듯 등장했다.
부동산 재벌이었던 트럼프는 돈이 부족해서 정치에 뛰어든 사람이 아니었다. 이미 충분히 부유했다. 그런데 그는 더 많은 돈이 아니라 더 많은 권력을 원했다. 더 정확하게는 자신의 존재를 미국 슬롯 전체에 관철시키는 정치적 권력을 원했다.
후쿠야마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인간의 욕망에는 종착역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여기서 더 불편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
그렇다면 트럼프는 어디에서 왔는가.
그는 민주주의의 적들이 미국 슬롯에 몰래 침투시킨 인물이었는가.
아니다.
트럼프는 자유민주주의의 심장부에서 나왔다.
그는 선거를 통해 등장했다. 시장경제가 만들어낸 막대한 부를 기반으로 성장했다. 언론의 자유를 이용해 자신의 메시지를 확산했다. 대중문화와 방송산업이 만들어 놓은 유명세를 정치적 자산으로 바꾸었다. 소셜미디어가 제공한 직접 소통의 공간을 이용해 기존 언론의 중개 기능을 무력화했다.
트럼프는 자유민주주의의 외부에서 침입한 괴물이 아니다.
오히려 자유민주주의가 만들어 놓은 제도와 기술과 시장의 산물이다.
바로 이것이 자유민주주의 신봉자들이 가장 인정하기 싫어하는 역설이다.
자유민주주의가 트럼프를 만들었다.
그리고 트럼프가 자유민주주의를 위협하자 자유민주주의 신봉자들은 다시 트럼프를 민주주의의 적이라고 비난한다.
물론 트럼프의 모든 행동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민주주의 제도를 공격하거나 선거 결과에 대한 신뢰를 훼손하거나 권력기관의 독립성을 약화시키는 행위는 비판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여기서 멈춘다면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다.
왜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지지했는가를 물어야 한다.
왜 교육 수준이 높은 사람들까지 그에게 표를 던졌는가.
왜 기존 정치권과 언론에 대한 불신이 그렇게 커졌는가.
왜 민주주의를 지키겠다는 정치인들이 오히려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사람으로 보이기 시작했는가.
이 질문을 하지 않는 순간 자유민주주의의 자기성찰은 끝난다.
트럼프를 단순히 ‘나쁜 정치인’으로 규정하면 편하다.
그렇게 하면 모든 바카라임을 한 인간에게 떠넘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트럼프가 사라진다고 문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트럼프를 만들어낸 슬롯적 조건이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불평등은 남아 있고, 계층 이동의 좌절도 남아 있으며, 세계화의 승자와 패자 사이의 간극도 남아 있다. 기존 정치 엘리트에 대한 불신도 남아 있고, 주류 언론에 대한 불신도 남아 있다. 무엇보다 “나는 열심히 살았는데 왜 내 삶은 나아지지 않는가”라는 대중의 분노가 남아 있다.
바로 그 분노를 정치적으로 조직한 사람이 트럼프였다.
그렇다면 자유민주주의 신봉자들이 정말 반성해야 할 것은 트럼프의 등장이 아니라 트럼프가 등장할 수밖에 없었던 환경을 만들어 놓은 자신들의 정바카라과 태도다.
그들은 오랫동안 경제성장을 이야기했다.
GDP가 증가하고 주식시장이 상승하고 기업의 이익이 늘어나면 슬롯 전체가 좋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사람들의 삶은 GDP 그래프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자신의 임금이 정체되고, 집값은 올라가고, 자녀의 교육비는 증가하고, 일자리는 불안정해지는데 텔레비전에서는 경제가 성장하고 있다고 말한다면 사람들은 결국 그 통계를 믿지 않는다.
여기에서 정치적 분노가 태어난다.
더욱 심각한 것은 자유주의 엘리트들이 이 분노를 이해하려 하기보다 교육시키려 했다는 것이다.
“당신들이 틀렸다.”
“당신들은 포퓰리즘에 속고 있다.”
“당신들은 가짜뉴스에 세뇌됐다.”
“당신들은 민주주의의 가치를 모른다.”
이런 태도는 정치적 설득이 아니다.
엘리트의 훈계다.
민주주의에서 가장 위험한 순간은 엘리트가 국민을 설득해야 할 대상으로 보지 않고 교정해야 할 대상으로 보기 시작할 때다.
그 순간 대중은 정치인을 더 이상 자신들의 대표자로 보지 않는다.
자신들을 무시하는 계층의 대표자로 보기 시작한다.
트럼프는 바로 그 틈을 파고들었다.
그는 세련된 정바카라을 제시하는 대신 분노를 제공했다.
복잡한 경제 문제에 정교한 해법을 제시하는 대신 적을 만들어 주었다.
“당신들의 문제는 당신들 탓이 아니다.”
“워싱턴 때문이다.”
“엘리트 때문이다.”
“이민자 때문이다.”
“기존 언론 때문이다.”
“기존 정치인 때문이다.”
정치에서 이것은 매우 강력한 언어다.
사람은 자신의 실패 원인을 복잡한 구조 속에서 찾는 것보다 하나의 적에게서 찾는 것을 훨씬 편하게 느끼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트럼프의 설명이 옳다는 뜻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 설명이 먹혔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설명하지 못하는 자유민주주의는 대중에게 민주주의를 가르칠 자격부터 의심받아야 한다.
여기서 자유민주주의의 또 하나의 모순이 등장한다.
자유민주주의는 모든 사람에게 자유롭게 말할 권리를 주었다.
그런데 자유민주주의의 엘리트들은 대중이 자신들이 싫어하는 말을 할 때 그 자유를 불편해한다.
자유로운 언론을 말하면서 자신들에게 불리한 언론을 ‘가짜뉴스’라고 부르고, 표현의 자유를 말하면서 자신들의 가치관과 다른 사람들을 위험한 극단주의자로 취급한다.
시장 경쟁을 찬양하면서 자신들이 원하는 정치적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대중을 무지하다고 비난한다.
이것은 자유주의가 아니다.
자신에게 유리할 때만 자유를 인정하는 선택적 자유주의다.
민주주의 역시 마찬가지다.
민주주의에서 선거란 국민이 올바른 답을 선택하는 시험이 아니다.
국민이 어떤 선택을 하든 그 선택을 받아들이는 제도다.
그 선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국민이 어리석다고 말하는 순간 민주주의는 이미 절반쯤 무너진다.
민주주의의 본질은 ‘현명한 국민이 현명한 지도자를 선택한다’는 믿음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국민이 잘못된 선택을 할 가능성을 인정하면서도 권력을 평화적으로 교체할 수 있도록 만드는 데 있다.
이것이 민주주의의 위대함이자 동시에 약점이다.
민주주의는 인간을 믿어야 하지만 인간은 믿을 수 없는 존재다.
바로 이 모순 때문에 민주주의에는 헌법이 필요하고, 사법부가 필요하고, 의회가 필요하며, 언론이 필요하고, 권력분립이 필요하다.
민주주의는 인간을 선하게 만드는 제도가 아니다.
인간이 악해져도 슬롯가 파괴되지 않도록 하는 제도다.
그런데 자유민주주의의 일부 신봉자들은 이 사실을 잊어버렸다.
그들은 민주주의를 하나의 도덕적 신념으로 만들어버렸다.
‘우리 편은 민주주의이고 저쪽은 반민주주의다.’
이렇게 세계를 둘로 나누는 순간 민주주의는 정치적 제도가 아니라 진영의 종교가 된다.
그리고 종교가 된 민주주의는 자신의 교리를 의심하는 사람을 적으로 만든다.
바로 그때 민주주의는 자신이 가장 경멸했던 권위주의와 닮아간다.
이것이 트럼프 현상을 통해 우리가 봐야 할 가장 불편한 진실이다.
트럼프가 민주주의를 위협한다는 말은 틀리지 않다.
그러나 트럼프가 왜 등장했는지를 설명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절반의 진실일 뿐이다.
더 정확한 질문은 이것이다.
왜 자유민주주의가 트럼프 같은 정치인을 만들어낼 수 있는 슬롯가 되었는가.
왜 자유민주주의의 승자들이 자유민주주의의 패자들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았는가.
왜 시장의 효율성을 말하면서 시장이 만들어낸 불평등에는 침묵했는가.
왜 세계화를 말하면서 세계화의 비용을 부담한 사람들의 분노를 무지와 국수주의로 치부했는가.
왜 표현의 자유를 말하면서 자신들이 싫어하는 표현에는 특별히 민감했는가.
왜 민주주의를 말하면서 대중의 선택을 믿지 못했는가.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하면서 트럼프를 민주주의의 적이라고만 비난하는 것은 너무나 편리한 자기면죄다.
마치 화재를 일으킨 사람이 따로 있는데 불이 난 집의 구조와 전혀 관계가 없다는 식이다.
그러나 정치에서 결과는 원인과 분리되지 않는다.
트럼프는 원인이면서 동시에 결과다.
그는 자유민주주의를 공격하는 정치인이면서 동시에 자유민주주의의 실패가 만들어낸 정치적 결과물이다.
이것이 우리가 트럼프를 바라볼 때 가져야 할 가장 불편한 시선이다.
자유민주주의는 트럼프를 제거하는 것으로 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
트럼프가 사라진 자리에 또 다른 트럼프가 등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름만 바뀔 뿐이다.
어쩌면 더욱 위험한 트럼프가 등장할 수도 있다.
따라서 자유민주주의가 진정으로 자신을 지키고 싶다면 먼저 자신을 비판해야 한다.
시장경제가 인간의 욕망을 어디까지 확대시켰는가.
세계화가 누구에게 이익을 주었고 누구에게 비용을 떠넘겼는가.
민주주의의 제도는 왜 대중의 신뢰를 잃었는가.
언론은 왜 권력 감시자에서 정치적 부족의 구성원처럼 보이게 되었는가.
정치 엘리트들은 왜 자신들의 실패를 인정하기보다 국민을 탓하는가.
이 질문들을 피하면서 민주주의를 지키겠다는 것은 사실상 민주주의를 지키는 것이 아니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겠다는 말에 더 가깝다.
후쿠야마가 트럼프를 오판한 이유는 단순하다.
그는 인간이 부를 통해 만족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인간은 만족을 위해 사는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의미를 원하고, 인정받기를 원하며, 타인보다 우월하기를 원하고, 때로는 세계를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고 싶어 한다.
자유민주주의가 이 욕망을 없애줄 수는 없다.
다만 그것을 제도 안에서 통제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자유민주주의의 진짜 시험은 트럼프 같은 정치인이 등장하지 않는 슬롯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트럼프 같은 정치인이 등장해도 민주주의가 무너지지 않는 슬롯를 만드는 것이다.
이것이 훨씬 어려운 과제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자유민주주의의 진정한 가치가 시험된다.
자유민주주의가 정말 위대한 체제라면 자신의 적에게도 자유를 허용할 수 있어야 한다.
동시에 그 자유를 이용해 권력을 독점하려는 자에게는 헌법과 제도를 통해 제동을 걸 수 있어야 한다.
대중의 분노를 경멸해서도 안 되고, 그 분노에 굴복해서도 안 된다.
대중을 무시하지 않으면서도 대중의 감정이 헌법을 파괴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 것.
바로 그것이 민주주의의 어려운 기술이다.
결국 자유민주주의를 무너뜨리는 것은 트럼프 한 사람이 아닐 수 있다.
오히려 더 위험한 것은 자유민주주의를 완성된 체제로 착각하는 것이다.
“우리가 정답을 알고 있다.”
“우리 체제는 최종적이다.”
“우리의 가치가 보편적이다.”
“우리에게 반대하는 사람은 민주주의를 이해하지 못한다.”
이런 확신이 쌓이는 순간 자유민주주의는 살아 있는 제도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숭배하는 이념이 된다.
후쿠야마가 1992년에 말했던 ‘역사의 종말’은 어쩌면 너무 빨리 찾아온 결론이었다.
역사는 끝나지 않았다.
인간의 욕망도 끝나지 않았다.
권력욕도 끝나지 않았다.
불평등도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민주주의의 모순도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이제 시작일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트럼프가 민주주의의 적인가”가 아니다.
그보다 훨씬 불편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
“트럼프를 만들어낸 것은 누구인가.”
그 답의 일부는 트럼프에게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머지 일부는 자유민주주의 자신에게 있다.
자유민주주의가 자신의 실패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트럼프는 사라져도 트럼프주의는 사라지지 않는다.
정치인은 바뀌어도 분노는 남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분노가 다시 새로운 정치인을 만들어낸다.
바로 이것이 자유민주주의가 지금 직면한 가장 무서운 역설이다.
자유민주주의의 가장 위험한 적은 자유민주주의를 공개적으로 부정하는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
자유민주주의가 왜 실패했는지 묻지 않는 자유민주주의 신봉자들일 수도 있다.
자신이 만든 문제를 인정하지 않는 체제는 결국 자신이 만든 반대자를 통해 심판받는다.
후쿠야마가 트럼프를 오판했다.
그러나 우리가 더 경계해야 할 것은 후쿠야마의 과거 오판을 지금도 반복하는 것이다.
트럼프를 악으로 규정하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트럼프가 왜 가능했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그것이 민주주의를 지키는 첫 번째 단계다.
그리고 어쩌면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자유민주주의를 믿는 것이 아니라 자유민주주의조차 끊임없이 의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자유민주주의가 살아남으려면 자신을 신성시해서는 안 된다.
스스로를 해부할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의 실패를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이 만든 괴물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저것은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저것의 일부는 우리가 만들었다”라고.
바로 그 순간부터 자유민주주의의 진짜 자기개혁이 시작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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