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뭔데 유시민을 비판해?'!!!

유시민의 팬덤이 우상숭배로 빠지는 이유가 궁금하다고?

byFrancis Lee

“네가 뭔데 유시민을 비판해?”

유시민에 관한 비판적인 글을 쓰면 이상할 정도로 비슷한 댓글이 달린다.

“유시민을 네가 뭘 안다고 비판하느냐.”

“유시민보다 네가 잘났느냐.”

“유시민을 욕하지 마라.”

문제는 정작 유시민의 주장에 대한 반론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내가 틀렸다면 그 주장이 왜 틀렸는지를 말하면 된다. 사실관계가 잘못되었다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지적하면 된다. 논리가 허술하다면 논리의 어느 부분이 잘못되었는지를 반박하면 된다.

그런데 돌아오는 것은 뜻밖에도 이런 질문이다.

“네가 뭔데?”

나는 이 질문이 오늘날 한국의 팬덤 정치를 이해하는 아주 중요한 단서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 질문은 사실상 “네가 감히 그 사람을 비판할 자격이 있느냐”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 순간 토론의 기준은 주장과 논증에서 사람의 서열로 이동한다.

그리고 여기서 아주 위험한 변화가 일어난다.

정치인이나 지식인의 말이 비판의 대상이 아니라 권위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단순히 유시민이라는 한 사람의 팬들에게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유시민은 하나의 사례일 뿐이다.

이재명에게도, 윤석열에게도, 문재인에게도, 한동훈에게도, 조국에게도, 김어준에게도, 유명 유튜버에게도 똑같은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

오늘날 한국 정치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정치적 견해의 차이가 아니다.

오히려 정치적 견해가 ‘신앙’처럼 변하는 것이다.

정치를 논쟁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인을 믿는다.

주장을 검증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방어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그 사람을 비판하는 행위 자체가 배신으로 간주된다.

그 순간 민주주의는 끝나기 시작한다.

민주주의의 핵심은 내가 지지하는 사람에게도 “당신이 틀렸을 수 있다”라고 말할 수 있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팬덤 정치에서는 정반대의 일이 벌어진다.

“우리 사람이니까 옳다.”

이것은 정치적 판단이 아니다.

충성이다.

막스 베버가 말한 카리스마적 권위는 이 현상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출발점이 된다. 베버에게 카리스마적 권위는 법이나 제도, 전통에 의해 부여되는 권위와 다르다. 특정 인물이 비범한 능력이나 자질을 가지고 있다고 사람들이 믿음으로써 형성되는 권위다.

그런데 신흥종교 연구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카리스마는 지도자가 혼자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

추종자들이 그것을 인정하고 재생산한다.

신흥종교 연구자 캐서린 웨싱어와 관련 연구들은 카리스마를 지도자의 개인적 속성만이 아니라 추종자들이 만들어내고 유지하는 관계와 집단적 신화의 과정으로 분석한다. 특히 추종자들은 지도자의 권위를 정당화하고, 그 권위를 새로운 구성원에게 전달하며, 지도자의 이미지를 보호하는 역할까지 한다.

이것은 팬덤을 이해할 때도 매우 중요한 통찰이다.

유시민에게 카리스마가 있다면 그것은 유시민 혼자 만든 것이 아니다.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만들어낸다.

그가 한 말을 공유하고,

그의 말을 해석하고,

그의 실수를 변호하고,

그를 비판하는 사람을 공격하고,

그의 과거를 신화화하고,

그의 말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

그렇게 한 사람의 ‘권위’는 팬덤이라는 슬롯적 관계 속에서 계속 재생산된다.

따라서 팬덤의 핵심은 팬이 많다는 데 있지 않다.

진짜 문제는 팬들이 그 사람의 권위를 대신 생산하기 시작한다는 데 있다.

이 지점에서 팬덤은 단순한 지지자 집단과 달라진다.

지지자는 자신이 지지하는 사람을 비판할 수 있다.

팬덤은 자신이 지지하는 사람을 방어해야 한다고 느낀다.

그리고 극단적인 경우 팬덤은 그 사람을 비판하는 사람을 공격함으로써 자신의 충성심을 증명한다.

“나는 당신의 팬입니다.”

라는 선언보다

“나는 당신을 공격하는 사람과 싸울 수 있습니다.”

라는 행동이 더 강력한 충성의 증명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팬덤은 정치적 공동체가 아니라 정체성 공동체가 된다.

“나는 유시민의 의견에 동의한다.”

가 아니라

“나는 유시민을 지지하는 사람이다.”

가 된다.

둘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첫 번째 사람은 유시민의 의견이 틀렸다고 판단하면 생각을 바꿀 수 있다.

두 번째 사람은 유시민의 의견이 틀렸다고 인정하는 순간 자신의 정체성까지 흔들린다.

그래서 방어가 격렬해진다.

이것이 팬덤의 심리적 핵심이다.

에리히 프롬이 자유와 권위주의를 분석하면서 보여준 것도 바로 이런 인간의 역설이었다. 인간은 자유를 얻었지만 자유에는 불안과 바카라임이 따라온다. 스스로 판단한다는 것은 어렵다. 그래서 인간은 때때로 자신의 판단을 더 강력한 권위에 맡김으로써 불안을 줄이려 한다.

정치 팬덤에도 이런 심리적 구조가 작동할 수 있다.

세상은 복잡하다.

경제는 어렵고 정치도 어렵다.

역사는 복잡하고 슬롯문제에는 정답이 없다.

그런데 누군가가 등장해 이렇게 말해준다.

“이것이 본질이다.”

“저 사람이 문제다.”

“이 사건은 이렇게 해석하면 된다.”

얼마나 편리한가.

복잡한 세계가 하나의 해석으로 정리된다.

그 순간 사람들은 정보뿐만 아니라 판단까지 외부에 위탁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이 자신의 판단을 다른 사람에게 위탁하는 순간 자유는 조금씩 줄어든다.

정치적 팬덤이 위험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정치인은 시민의 판단을 대신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지식인은 독자의 판단을 대신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들은 판단을 위한 정보를 제공하고 사고를 자극해야 한다.

그런데 팬덤은 이 관계를 뒤집는다.

지식인은 해석자가 되고,

팬은 해석의 소비자가 된다.

그리고 어느 순간 해석자는 ‘정답을 가진 사람’이 된다.

이때부터 해석 권력이 생긴다.

사람들은 현실을 직접 바라보기보다 그 사람이 현실을 해석한 방식으로 현실을 바라보기 시작한다.

그것이 가장 위험한 권력이다.

총을 들고 있는 권력이 아니라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현실의 의미를 결정하는 권력이다.

그리고 이 권력은 유튜브와 쇼츠, SNS 시대에 더욱 강력해졌다.

긴 바카라 한 권을 읽는 것보다 60초짜리 영상 하나가 현실의 의미를 결정해버린다.

복잡한 역사도 한 문장으로 정리된다.

복잡한 정치도 한 사람의 선악으로 정리된다.

슬롯구조도 하나의 음모로 설명된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설명을 반복해서 소비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설명이 현실보다 강해진다.

“현실이 어떠한가?”보다

“내가 믿는 사람이 현실을 어떻게 설명했는가?”가 중요해지는 것이다.

여기에서 에밀 뒤르켐의 종교슬롯학이 다시 등장한다.

뒤르켐이 주목했던 것은 종교적 믿음의 내용만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모이고, 감정을 공유하고, 열광하며, 자신이 더 큰 공동체의 일부라는 강렬한 감정을 경험하는 현상이었다.

이른바 ‘집단적 열광’이다.

정치적 집회, 팬덤의 온라인 공간, 유튜브의 댓글 공동체, SNS의 집단적 분노에서도 이와 유사한 집단 감정의 메커니즘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베버의 카리스마와 뒤르켐의 집단적 열광을 결합해 슬롯변동을 분석한 연구도 이러한 연결을 보여준다.

한 사람이 말한다.

다른 사람이 박수를 친다.

또 다른 사람이 공유한다.

그리고 누군가 반대하면 모두가 공격한다.

그 과정에서 개인의 확신은 집단의 확신으로 변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에서

“우리는 그렇게 생각한다.”

로 변하는 순간이다.

그런데 ‘우리’가 생기면 반드시 ‘그들’도 생긴다.

팬덤의 가장 위험한 단계는 여기에서 시작된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 사이에 도덕적 경계가 만들어진다.

우리 편은 선하고,

상대편은 악하다.

우리 편의 거친 말은 정의로운 분노이고,

상대편의 같은 말은 혐오와 폭력이다.

우리 편의 실수는 맥락이 있고,

상대편의 실수는 본질이다.

이것이 팬덤 정치가 만들어내는 도덕적 이중성이다.

그리고 이 구조는 결국 사람을 판단하는 능력을 약화시킨다.

사람이 아니라 진영을 보기 때문이다.

한국 정치가 갈수록 피곤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정바카라을 놓고 싸우는 것이 아니다.

서로의 존재를 부정한다.

상대편이 무엇을 주장하는지 듣기 전에 상대편이라는 이유로 거부한다.

그리고 자신이 좋아하는 정치인이나 지식인에 대한 비판을 ‘우리 진영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인다.

이것이 팬덤 정치다.

정치가 신념이 아니라 종교가 되는 순간이다.

여기에서 신흥종교 연구의 또 다른 통찰이 중요하다.

로드니 스타크와 윌리엄 심스 베인브리지는 새로운 종교집단의 형성과 확산을 개인의 심리만으로 설명하지 않고, 사람들 사이의 슬롯적 관계와 네트워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사람들이 어떤 믿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에는 그 믿음 자체뿐 아니라 그 믿음을 공유하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온라인 팬덤을 이해하는 데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사람은 혼자서 팬이 되는 것이 아니다.

댓글을 읽고,

같은 영상을 보고,

같은 사람을 팔로우하고,

같은 사람의 말에 ‘좋아요’를 누르고,

같은 적을 비판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믿음을 집단 속에서 확인한다.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구나.”

이 경험은 신념을 더욱 강하게 만든다.

그리고 알고리즘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계속 연결한다.

결국 개인은 자신이 세상의 다수라고 착각하기 시작한다.

실제로는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만 계속 보고 있을 뿐인데 말이다.

이것이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신앙 공동체’가 만들어지는 방식이다.

교회에는 예배가 있고,

팬덤에는 댓글과 공유가 있다.

교회에는 성가가 있고,

팬덤에는 반복해서 소비되는 영상과 문장이 있다.

교회에는 성직자와 신도가 있고,

팬덤에는 영향력 있는 해석자와 추종자가 있다.

교회에는 이단이 있고,

팬덤에는 배신자와 ‘적폐’가 있다.

물론 이것을 문자 그대로 종교와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슬롯학적으로 보면 놀라울 정도로 유사한 집단적 메커니즘이 작동할 수 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신앙의 방어’가 지도자보다 추종자들에 의해 더 강하게 이루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신흥종교 연구에서는 지도자의 카리스마를 유지하고 새로운 구성원에게 전달하는 핵심 추종자 집단의 역할을 중요하게 분석한다. 일부 연구는 이를 베버의 표현을 빌려 ‘카리스마적 귀족층’이라고 설명한다. 이들은 지도자의 권위를 보호하고 집단 내부의 정통성을 관리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

이것을 현대 팬덤에 적용하면 섬뜩한 장면이 보인다.

정작 유시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팬들이 대신 싸운다.

정작 정치인은 해명하지 않았는데 팬들이 대신 해명한다.

정작 당사자는 반론하지 않았는데 팬들이 비판자의 인격을 공격한다.

왜 그런가.

그것이 바로 충성의 증명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사람의 편이다.”

라는 것을 집단 앞에서 증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팬덤은 때때로 지도자보다 더 극단적이 된다.

지도자는 타협할 수도 있지만 팬덤은 타협을 배신으로 간주할 수 있다.

지도자는 현실정치를 해야 하지만 팬덤은 순수성을 요구할 수 있다.

지도자는 선거에서 이겨야 하지만 팬덤은 상대를 악으로 규정하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다.

그 결과 정치인은 팬덤의 포로가 된다.

그리고 정치는 점점 더 극단화된다.

이것이 한국 정치의 진짜 비극이다.

우리는 정치인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정치인의 팬이 되었다.

정당을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정당의 아이돌을 소비한다.

정바카라을 검증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인의 말투와 표정과 과거의 발언까지 소비한다.

정치인이 무슨 정바카라을 내놓았는지를 묻기보다 “우리 편인가?”를 먼저 묻는다.

그런데 민주주의에서 가장 위험한 질문은 바로 이것이다.

“우리 편인가?”

왜냐하면 이 질문은 곧바로 다음 질문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우리 편이 아니라면 적인가?”

그리고 적으로 규정된 사람에게는 논증이 필요하지 않다.

공격하면 된다.

조롱하면 된다.

매도하면 된다.

침묵시키면 된다.

그래서 “네가 뭔데 유시민을 비판해?”라는 댓글은 생각보다 훨씬 심각한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단순한 팬의 감정적 반응이 아니다.

그 안에는 하나의 정치철학이 들어 있다.

“당신에게는 그 사람을 비판할 권리가 없다.”

하지만 민주주의는 정확히 그 반대에서 출발한다.

누구나 권력을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

누구나 유명인을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

누구나 지식인의 주장을 검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사람보다 덜 유명하고, 덜 똑똑하고, 덜 성공했다고 해서 비판할 권리를 잃는 것이 아니다.

비판의 자격은 상대보다 우월해야 얻는 것이 아니다.

시민이라는 사실만으로 충분하다.

그래서 나는 오히려 이렇게 되묻고 싶다.

“유시민보다 잘나야 유시민을 비판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유시민보다 잘난 사람만 유시민을 비판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대통령보다 위대한 사람만 대통령을 비판할 수 있는가?

판사보다 법을 잘 알아야 판결을 비판할 수 있는가?

교수보다 학위가 많아야 교수의 주장을 비판할 수 있는가?

그 논리를 끝까지 밀고 가면 민주주의는 사라진다.

슬롯는 전문가와 스타와 권위자들만 말할 수 있는 공간이 된다.

시민은 침묵해야 한다.

그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그것은 권위주의다.

그리고 팬덤 정치가 무서운 이유는 바로 이 권위주의를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수행한다는 데 있다.

“우리가 더 민주적이다.”

라고 말하면서 다른 사람의 발언권을 억압한다.

“우리가 정의다.”

라고 말하면서 상대방의 인간적 자격까지 부정한다.

“우리는 깨어 있다.”

라고 말하면서 자신들이 믿는 사람에게는 질문하지 않는다.

이것이 정치적 신앙의 역설이다.

자신은 맹목적이지 않다고 믿으면서 가장 맹목적인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것.

그래서 진정한 지성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비판할 수 있는 능력에서 시작한다.

내가 싫어하는 사람의 말에 동의하는 것은 어렵지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의 말이 틀렸다고 인정하는 것은 더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후자가 더 중요하다.

유시민을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

이재명을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

윤석열을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

한동훈을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

김어준을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동시에 내가 좋아하는 사람도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진짜 정치적 성숙이다.

우리가 극복해야 할 것은 유시민이 아니다.

유시민을 우상으로 만드는 우리의 심리다.

우리가 극복해야 할 것은 이재명도 아니고 윤석열도 아니다.

누군가를 우리 대신 생각해주는 사람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 우리의 욕망이다.

팬덤 정치의 가장 위험한 순간은 지도자가 신이 되는 순간이 아니다.

추종자가 자신의 판단을 포기하는 순간이다.

지도자가 우상이 되는 데에는 추종자의 동의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질문을 조금 바꾸어야 한다.

“유시민이 우상인가?”

가 아니라,

“우리는 왜 누군가를 우상으로 만드는가?”

이 질문이 훨씬 중요하다.

그리고 이것은 유시민 팬덤에만 해당하지 않는다.

오늘 유시민을 우상으로 만들었던 사람이 내일 다른 정치인을 우상으로 만들 수도 있다.

오늘 김어준을 숭배했던 사람이 내일 다른 유튜버를 숭배할 수도 있다.

오늘 진보의 정치인을 신성시했던 사람이 내일 보수의 정치인을 신성시할 수도 있다.

사람만 바뀌었을 뿐 구조는 그대로다.

우상숭배는 특정 진영의 전유물이 아니다.

우상숭배는 인간의 오래된 욕망이다.

복잡한 세상에서 누군가가 대신 생각해주기를 바라는 욕망.

내가 바카라임지고 판단하기보다 누군가의 권위에 기대고 싶은 욕망.

그리고 내가 믿는 사람이 옳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다른 사람과 싸우고 싶은 욕망.

현대의 팬덤 정치는 바로 이 오래된 욕망에 디지털 기술이 결합한 형태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제 정치인에게 필요한 것은 팬이 아니다.

비판할 수 있는 시민이다.

지식인에게 필요한 것도 추종자가 아니다.

질문하는 독자다.

그리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새로운 우상이 아니다.

우상 없이 생각하는 능력이다.

나는 유시민을 비판할 수 있다.

유시민보다 잘나서가 아니다.

유시민보다 많이 알아서도 아니다.

유시민보다 훌륭해서도 아니다.

그저 그의 말이 공적인 영역에서 제시되었기 때문이다.

공적인 주장은 공적인 비판을 받아야 한다.

그것이 민주주의다.

그러므로 누군가 다시 묻는다면,

“네가 뭔데 유시민을 비판해?”

나는 이렇게 대답하고 싶다.

“나는 시민이기 때문에 비판한다.”

그리고 한마디를 더 덧붙이고 싶다.

“당신도 유시민을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 당신이 유시민의 팬이라면 더욱 그래야 한다.”

자신이 존경하는 사람에게도 “당신이 틀렸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팬이 아니라 시민이 된다.

그리고 시민이 사라지고 팬만 남는 순간,

민주주의는 껍데기만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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