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가 정치와 결합하면 결국은 선량한 시민들만 피해를 입는다
하나님과 하느님이 싸우면 누가 이길까.
참으로 우스운 질문이다. 하나님과 하느님은 다른 신이 아니다. 한국 개신교가 주로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가톨릭을 비롯한 일부 그리스도교 전통에서는 ‘하느님’이라고 부를 뿐이다. 영어로 God이라고 부르는 그 존재를 한국어로 어떻게 옮길 것인가의 문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한국 교회에서는 이 단어 하나가 아직도 묘한 경계선이 되고 있다. 개신교는 ‘하나님’이라고 해야 정통이고 ‘하느님’이라고 하면 가톨릭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반대로 가톨릭에서는 ‘하느님’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언어와 번역의 전통이 다른 것뿐인데, 인간은 그 차이를 가지고도 ‘우리’와 ‘그들’을 나눈다.
생각해 보면 참으로 기묘한 일이다. 하나님과 하느님이 다른 신이라면 모르겠지만, 결국 같은 대상을 가리키면서 인간들이 서로 다른 단어를 사용한다는 이유로 신앙의 우열을 따진다. 신학적 전통의 차이는 분명 존재한다. 교회론도 다르고 성례에 대한 이해도 다르고 성직제도도 다르다. 이런 문제들은 진지하게 논쟁할 수 있다. 그러나 단어 하나를 가지고 상대방의 신앙 자체를 의심하기 시작한다면 그때부터 문제는 신학이 아니라 진영 논리가 된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히 한국 교회만의 문제가 아니다. 기독교의 역사를 조금만 거슬러 올라가면 인간이 자신의 신앙을 절대화하고 그것을 정치권력과 결합시켰을 때 얼마나 끔찍한 일이 벌어졌는지를 보여주는 역사가 있다. 바로 30년전쟁이다.
1618년부터 1648년까지 이어진 이른바 30년전쟁은 흔히 가톨릭과 개신교가 서로 싸운 종교전쟁으로 설명된다. 물론 종교적 갈등이 전쟁의 중요한 배경이었다. 종교개혁 이후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의 긴장은 극단적으로 높아졌고, 신성로마제국 내부의 정치적·종교적 갈등이 폭발했다.
그러나 전쟁이 길어질수록 그 모습을 단순한 종교전쟁으로 설명하기는 어려워진다. 국가의 영토와 왕조의 이해관계, 세력균형과 경제적 이해가 얽히면서 종교적 명분은 점점 정치적 계산과 결합했다. 가톨릭 국가인 프랑스가 가톨릭 합스부르크 세력에 맞서 전쟁에 개입한 사실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프랑스가 갑자기 개신교 국가가 된 것이 아니다. 프랑스의 정치 지도자들은 국가이익을 위해 종교적 동맹의 경계를 넘어섰다.
결국 ‘하나님을 위해 싸운다’는 거대한 명분 뒤에서 인간들은 영토와 권력과 패권을 계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가장 처참한 대가를 치른 사람들은 왕이나 황제나 종교 지도자들이 아니었다. 평범한 시민과 농민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건 가운데 하나가 바로 1631년의 마그데부르크였다.
당시 마그데부르크는 대표적인 개신교 도시였다. 1631년 5월 20일 요한 체르클라에스 폰 틸리가 지휘하는 제국군과 가톨릭 동맹군이 도시를 함락하자 끔찍한 약탈과 살육이 벌어졌다. 도시 곳곳에 불이 붙었고, 군인들은 재산을 약탈했으며 민간인들이 살해됐다. 여성에 대한 성폭력도 광범위하게 발생했다. 당시 도시의 인구는 약 2만5천~3만 명으로 추정되는데, 그 가운데 약 2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물론 이 숫자를 ‘가톨릭 군대가 2만 명을 모두 직접 칼과 총으로 죽였다’고 이해해서는 안 된다. 직접적인 살육과 함께 방화로 인한 소사와 질식, 건물 붕괴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개신교 도시였던 마그데부르크가 가톨릭 측 군대에 의해 함락된 뒤 엄청난 규모의 민간인 희생이 발생했다는 사실이다.
마그데부르크의 참상은 당시 유럽 슬롯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특히 개신교 진영에서는 이 사건을 가톨릭 세력의 잔혹성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받아들였고, 수많은 선전물과 기록을 통해 그 참상을 전했다. 이후 ‘마그데부르크’라는 이름 자체가 도시를 철저하게 파괴하고 주민을 대량 살육하는 행위를 상징하는 표현으로 사용될 정도였다.
여기까지 이야기하면 우리는 쉽게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가톨릭이 개신교를 학살했다.’ 그리고 그것을 가톨릭의 역사적 죄악으로 규정하면 이야기는 간단하게 끝난다.
하지만 역사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마그데부르크의 비극을 이야기하면서 반드시 함께 기억해야 할 사실이 있다. 개신교 측 군대 역시 결코 천사의 군대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스웨덴의 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이끄는 개신교 군대가 독일에 들어온 이후에도 수많은 독일의 민간인들은 군대의 징발과 약탈에 시달렸다. 스웨덴군을 비롯한 개신교 측 군대 역시 식량과 물자를 강제로 빼앗았고, 마을을 약탈했으며, 전쟁 과정에서 민간인들에게 폭력을 행사했다.
그 이유 역시 생각보다 단순하다. 당시 군대는 오늘날과 같은 국민군이 아니었다. 용병의 비중이 높았고, 군대는 막대한 식량과 물자를 필요로 했다. 군대가 이동하면 지나가는 지역의 주민들이 그 비용을 부담해야 했다. 병사들에게 약탈과 전리품은 중요한 경제적 보상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전쟁이 길어질수록 가톨릭 군대와 개신교 군대의 차이는 민간인의 입장에서는 점점 의미가 없어졌다. 어느 군대가 마을에 들어오느냐에 따라 약탈당하는 방식이 달라졌을 뿐, 민간인의 삶이 파괴된다는 결과는 같았다.
가톨릭 군대가 개신교 민간인을 죽였고, 개신교 군대 역시 가톨릭 민간인을 죽였다. 그리고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까지 그 전쟁의 피해자가 됐다.
여기에서 30년전쟁의 더욱 무서운 측면이 드러난다.
전쟁이 사람을 죽이는 방식은 총과 칼만이 아니었다. 군대가 농촌의 식량을 약탈하면 농민은 굶주렸다. 농사를 지을 사람이 사라지고 가축이 약탈되면 다음 해의 식량 생산이 무너졌다. 사람들이 전쟁을 피해 이동하면 전염병이 퍼졌다. 교역이 끊기고 경제가 붕괴하면서 사람들은 생존 자체를 위협받았다.
그래서 30년전쟁의 민간인 희생을 단순히 ‘학살당한 사람의 숫자’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 직접적인 살육뿐 아니라 기아와 질병, 전염병, 슬롯경제적 붕괴가 엄청난 인명 피해를 만들어냈다.
이것이 종교전쟁의 진짜 무서움이다.
전쟁터에서 싸우는 것은 군인인데 죽는 것은 민간인이다.
왕이 전쟁을 결정하지만 농민이 굶는다.
종교 지도자가 교리를 주장하지만 시민이 죽는다.
정치 지도자가 명분을 내세우지만 그 대가는 평범한 사람들이 치른다.
그렇다면 왜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바로 종교와 정치가 결합했기 때문이다.
종교적 차이가 단순한 신학적 논쟁으로 존재할 때에는 서로 다른 견해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정치권력이 그 차이를 이용하기 시작하면 상대방은 더 이상 단순히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이 아니다. 적이 된다.
그리고 여기에서 인간의 가장 위험한 논리가 등장한다.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
여기까지는 인간 슬롯에서 흔히 있을 수 있는 주장이다. 그러나 여기에 ‘나는 하나님의 편이고 너는 하나님의 적이다’라는 논리가 붙는 순간 문제가 달라진다.
상대방과 타협할 이유가 사라진다.
상대방을 설득할 필요도 없어진다.
상대방을 제거하는 것이 오히려 신앙적 의무처럼 느껴진다.
30년전쟁의 비극은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역사가 보여준 또 하나의 역설은, 그렇게 서로를 하나님의 적이라고 규정했던 세력들이 결국 정치적 필요 앞에서는 서로 손을 잡았다는 사실이다.
프랑스는 가톨릭 국가였지만 가톨릭 합스부르크 세력에 맞섰다. 종교적 동질성보다 국가이익이 더 중요해진 것이다.
그 순간 우리는 아주 중요한 역사적 사실을 발견한다.
종교가 정치의 명분이 될 수는 있지만, 정치의 최종 목적은 종교와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이다.
정치권력은 필요하면 종교를 이용하고, 필요하지 않으면 종교적 원칙을 뒤로 미룬다.
그런데 정작 종교인들은 자신들이 순수하게 신앙을 위해 싸우고 있다고 믿는다.
이것이 종교와 정치가 결합할 때 발생하는 가장 위험한 착시다.
그리고 이 역사를 생각하면 오늘날 한국 교회의 모습이 더욱 씁쓸하게 다가온다.
400년 전 유럽의 사람들이 가톨릭과 개신교를 놓고 서로 싸웠다면, 오늘날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적어도 서로 죽이지는 않는다. 민주주의 슬롯에서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고 있고, 가톨릭과 개신교는 서로 다른 교단과 전통을 유지하면서도 함께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아직도 아주 작은 차이를 가지고 서로를 구분한다.
하나님인가, 하느님인가.
어느 교회에 다니는가.
어느 교단인가.
어느 신학교 출신인가.
어떤 성경 번역본을 사용하는가.
어떤 신학적 입장을 가지고 있는가.
그리고 때로는 이러한 차이가 신앙의 본질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되어버린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사람들이 예수보다 자신들의 교파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사랑을 말하는 사람들이 상대방을 정죄한다.
겸손을 말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교리가 절대적으로 옳다고 주장한다.
화해를 말하는 사람들이 서로를 적대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하나님과 하느님이라는 단어까지 서로 다른 진영의 표지로 만들어버린다.
이것은 단순한 언어 논쟁이 아니다.
언어가 진영의 표지가 되는 순간 종교는 이미 정치와 비슷한 방식으로 작동하기 시작한다.
‘우리’와 ‘그들’을 만들고, ‘우리의 진리’와 ‘그들의 오류’를 나누고, 결국 상대방을 틀린 사람으로 규정한다.
여기에 정치가 들어오면 상황은 더욱 심각해진다.
정치적 선택이 신앙의 정통성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고, 특정 정당을 지지하는 것이 마치 하나님을 지지하는 것처럼 변하면 종교는 더 이상 종교가 아니다.
정치의 외투를 입은 종교가 된다.
“우리 편이 하나님 편이다.”
이 말보다 위험한 말도 별로 없다.
왜냐하면 이 말을 하는 순간 상대방은 단순한 정치적 경쟁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적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타협은 배신이 되고, 대화는 변절이 되며, 상대방에 대한 증오는 신념이 된다.
30년전쟁에서 벌어진 비극은 바로 이런 인간의 심리가 정치권력과 결합했을 때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래서 마그데부르크의 2만 명을 기억할 때 우리는 가톨릭의 죄만 기억해서는 안 된다.
가톨릭 군대가 저지른 학살과 약탈은 분명히 기억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스웨덴을 비롯한 개신교 군대가 저지른 약탈과 민간인에 대한 폭력도 기억해야 한다.
한쪽의 죄를 기억하면서 다른 쪽의 죄를 지워버리는 순간 역사는 다시 종교적 선전물이 된다.
역사의 교훈은 ‘가톨릭이 나쁘다’도 아니고 ‘개신교가 나쁘다’도 아니다.
인간은 어느 교파에 속해 있든 권력을 가지면 타락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대변한다고 확신하는 순간 인간은 더욱 위험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30년전쟁이 우리에게 남긴 가장 중요한 교훈이다.
하나님을 위해 싸운다는 명분이 인간을 죽여도 된다는 면허가 되어서는 안 된다.
자신의 신앙이 옳다고 믿는 것과 다른 사람의 신앙을 부정할 권리가 자신에게 있다고 믿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자신의 교리를 사랑하는 것과 다른 교파를 미워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그리고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신앙의 원칙으로 받아들이는 것과 하나님을 자신의 정치적 진영 안에 가두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이제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한번 진지하게 질문해야 한다.
하나님과 하느님은 정말 싸워야 하는가.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사람과 하느님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정말 서로 다른 신을 믿는가.
하나님은 한국 개신교의 전유물이고 하느님은 가톨릭의 전유물인가.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가지고 싸우고 있는 것인가.
예수가 우리에게 가르친 것은 ‘내 교파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라’는 것이 아니었다.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이었다.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을 돌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예수를 따른다는 사람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서로를 심판하고, 자신의 정치적 선택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예수의 가르침을 배반하는 일이 아닐까.
하나님과 하느님은 싸울 필요가 없다.
싸우는 것은 인간이다.
그리고 인간이 하나님과 하느님의 이름으로 싸우기 시작하면 가장 먼저 피해를 보는 사람 역시 하나님도 하느님도 아니다.
평범한 인간이다.
마그데부르크에서 죽어간 수많은 시민들이 그것을 증명한다.
그들은 황제도 아니었고 왕도 아니었다. 추기경도 아니었고 신학자도 아니었다. 그저 자신의 집에서 가족과 함께 살아가던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종교와 정치가 결합하고 권력투쟁이 신앙의 이름을 쓰기 시작하는 순간 그들의 평범한 삶은 너무나 쉽게 희생됐다.
400년이 지난 지금 우리가 정말 그때보다 현명해졌다면 적어도 하나는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을 정치의 편으로 만들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과 하느님 가운데 어떤 이름을 사용하느냐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그 하나님을 믿는 인간이 다른 인간을 어떻게 대하느냐는 것이다.
신의 이름을 정확하게 부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신의 뜻에 맞게 사는 것이다.
교리의 순수성을 주장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인간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믿는 하나님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믿는 하나님 때문에 다른 인간을 함부로 미워하지 않는 것이다.
마그데부르크의 불길이 우리에게 남긴 교훈은 바로 이것이다.
종교가 정치의 무기가 되는 순간 신은 침묵하고 인간만 피를 흘린다.
그리고 하나님과 하느님이 싸운다고 믿는 순간, 정작 싸우고 있는 것은 하나님도 하느님도 아니다.
인간의 오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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